빨간명찰 Viet nam veterans

[스크랩] [한국군] 미국인이 본 파월 한국군 - 청룡부대★ 베트남 전쟁

마블마운틴 2016. 7. 25. 13:47

 

 

[한국군] 미국인이 본 파월 한국군 - 청룡부대 ★ 베트남 전쟁

The 2nd ROK Marine Brigade

  "Blue Dragons"

호이안,청룡포병대대에서105미리 시승하는 청룡부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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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병과함게 작전중인 한국해병대...

 

한국군 해병 2여단 ‘청룡’은 65년 10월 초 캄란만에

상륙했고, 그 바로 직후 맹호사단이 퀴논에 도착했다.

당시 백마사단은 월남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

 

한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380명으로 시작했고, 병사

들은 주로 한국해군과 해안경비대 출신인데 병기는 2

차대전 말기 구식 일본군 소총으로 처음 무장했다. 2

개 대대로 증강된 것은 49년 말이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침공해 부산방어선까지 밀려 고수

하는 동안인 8월 한국해병 제3대대가 창설된다. 그리고

이 3개 대대가 모여 한국해병 제1연대가 되어 미 해병 1

사단에 배속되었다. 이어 인천상륙이 있었고 이후 서울

로 미군을 따라 진격했다.

 

1952년 봄에, 한국 해병대를 황해와 동해의 섬들을 방어

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되었다.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

해병 제2연대가 3개 대대로 창설되었고, 2개 대대는 황해

와 동해의 섬들로 전개되었다. 지도를 보면 한국해병이

방어하는 섬들이 북한 해안선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았

는데, 이때 방어하던 해병 일부가 종종 북한 해안에 대한

기습작전을 했다. 섬 방어에만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해병대는 빠르게 성장하여 한국전을 통해 강한 전투

부대가 되었고, 일부는 ‘귀신 잡는 해병’ ‘무적해병’이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해병 청룡여단은 해병 1-2-3보병대대를 근간으로 하는

해병 제2연대로부터 형성되었고, 여기에 포병대대, 중-

박격포중대, 항공제대 등 지원부대가 있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청룡여단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자들과 싸우러 참전한다.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는 청룡여단을 사열하는 박정희 대통령 

 

한국 해병2여단은 65년 9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캄란만에

전개했다. 당시는 퀴논에 주둔한 맹호사단이 더 북쪽에

있었다.  

 

2대청룡여단장 김연상 준장. 1967년.

 

청룡여단의 모든 장교들은 미 해병대 기지인 콴티고나

샌디에고에서 훈련을 받았다. 어느 미 해병대 대령은

몇 년 후 이렇게 말했다:

 

"We taught them everything we know,

  and now they know it better than us."

 

당시 우리 미 해병대도 상당했지만,

한국 해병대는 정말 훌륭했고, 정말 대단했다.

 

 

 

위 지도에서 보면 청룡여단은 일련으로 이어진 자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는 전술1군단 지역에 있는 미 해병대 제3상륙군의

구역 이른바 "Marine Country"였다. 1966년 한국군 백마사단이

도착하자 청룡여단은 북쪽으로 이동한다.

 

여단은 캄란만에 두 달을 있었고, 이어 북베트남군 95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투이호아로 이동한다.  월맹군 95사단은 잠시

사라졌다가 쌀 수확이 좋은 지역인 투이호아에 더러운 얼굴

을 내밀었다.  

 

투이호아의 쌀 경작

 

투이호아는 벼의 재배가 좋은 기름진 땅이라, 그로 인해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 당시 101공수

사단 1여단이 투이호아에 들어갔고, 그 외에 육군 1개 여단,

미 해병대 1개 여단이 있었는데, 거기에 청룡여단이 추가되

면서 65년 11월 말까지 같이 작전했다. 101공수사단 1여단

은 투이호아에 있다가 청룡여단이 들어오자 투이호아를

넘기고 판랑으로 이동했다.

 

 

 

베트콩 포로 3명을 압송하는 청룡여단 1대대 해병. 68년 4월

투이호아 수색섬멸작전에서 잡힌 포로들이다. 길에 부비트랩

을 설치하다 발각되었다.

 

65년 12월부터 66년 1월까지 청룡여단과 월남군 47연대는

제퍼슨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는 투이호아 계곡의 쌀 수확

을 경계하는 임무였다. 미 육군과 해병대 헬기들이 지상작

전을 지원하는 가운데, 청룡과 월남군은 북베트남군 95연대

와 교전했고, 결국 1번 국도를 개통하고 붕 로 만으로 침투

하는 적의 루트를 차단했다.

 

 

1966년 퀴논. 한국 해병대원과 촬영한 1기병사단 1여단 J. Hurley.

 

1966년 1월 전투에서, 북베트남군 2개 대대는 청룡여단

2개 중대를 점령하려고 달려들었다. 전투는 3시간이 걸

렸고 한국 해병대 초병선에서 적 400명이 전사했다.

 

66년 가을 백마사단이 들어오자 청룡여단은 투이호아를

백마에게 넘기고 1군단 지역, 미 해병 3상륙군 지역으로

이동했다. 위치를 잡은 곳이 1군단 지역 최남단인 쾅나이

지역의 남쪽 추라이였다.

 

베트남 전술1군단 지역은 비무장지대 라인과 라오스가

맞닿아 있는 곳으로, 미 해병 제3상륙군이 이곳을 맡자

곧 ‘Marine Country’가 되었고 거기 있던 육군부대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베트남 주둔 미 해병 사령부가 65년 5월에 창설되었는데,

그로 인해 제3상륙군은 제3원정군(III MEF)으로 명칭이 전환

되었다. 그런데 2년 뒤인 5월에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명칭

을 다시 III MAF로 바꾸게 했는데, 미군 참모부에서 이 ‘원정’

이란 단어는 베트남에서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프랑스군이 바로 French Expeditionary Corps란

명칭을 썼었기 때문이다.

 

   

1969년 다낭 남쪽의 한 한국 해병대 진지. 미 해병대 헬기 촬영.

 

1군단 지역의 청룡여단으로 돌아오면,

 

1966년 8월 추라이 구역이 청룡여단의 책임 작전구역이

되었다. 바로 이때 미 해병 제3원정군이 비무장지대를

떠받히는 1군단 지역 전체를 맡는 작전전환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청룡의 1대대가 8월 1일 추라이 남쪽 3마일

지점에 도착했고, 2대대는 9월에 도착했다. 그곳을 맡고

있던 미 해병 26연대 1대대는 미 해군 전함 이오지마에

있던 5연대 3대대 특수상륙부대와 교체된다.

 

청룡여단과 미 해병대는 조정을 거쳐 한국 해병에 대한

미군부대와 똑같은 공중지원을 약속했다. 미 해병대에는

1st ANGLICO란 조직이 있었는데, 이는 제1항공해상함포

-연락중대를 의미한다. 65년 예하제대로 베트남에 들어

왔다.

 

이들은 주로 화력지원을 위한 계획을 짜고 공조하고 말단

부대에 대한 화력지원을 하는 제대로, 주로 해안 가까이

있는 부대들을 지원했다. 이 제대는 1군단 지역으로 전개

해 야전의 청룡여단을 위한 air umbrella를 책임지게 된다.

이 제대는 한국해병 보병중대에 2명 씩 배속되어 같이 행동

했다. 1967-68년 동안 베트남에 참전했던 미 해병 병장

스테픈 하딘의 말이다:

 

“우리 2인팀들은 야전에 나가 있는 모든 한국 해병대 중대에

동반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고정익 항공기의 항공타격을

요청했고, 재보급도 의무헬기도 우리가 불렀으며, 유효사거리

에 있는 해군 전함의 함포도 유도했다.

 

우리 호출부호는 ‘햄 샐러드’였는데 이는 한국해병 제1대대에

배속된 ANGLICO 호출부호였다. 난 그때 호이 안에 있었고 호

출부호는 ‘햄 샐러드 알파’였고 이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를 말해준다. 3중대는 ‘햄 샐러드 찰리’다. 바로 그때 호이 안의

작은 랜딩존에서 헬기 다섯 대 중 한 대가 격추되었고, 우리가

포위되는 일이 일어났다.”

 

 

추라이 전경. 175공격헬기중대 승무원 촬영.

 

한국 해병대 제5대대는 1967년에 도착해 1군단 지역으로

왔고, 그 시기는 비무장지대와 라오스를 통해서 침투하는

강력한 북베트남군을 막던 때다. 5대대는 아주 적기에 도

착했다. 1967년은 1군단 지역이 붉게 물들 정도로 치열한

한 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룡여단도 짙은 상황을

똑같이 맞이했다.

 

 

1970-71년 화력지원진지 키 트라. 이 당시 진지에는 198경보병

여단 46대대 5중대가 들어가 있었다. 이 진지는 추라이 북동쪽

으로 청룡여단이 축성하고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청룡은 경계

선에 부비트랩을 빙 둘러 깔고 고지에 안전한 길은 그림에

나오는 딱 하나였다.

 

1967년 2월, 청룡여단 3대대 11중대가 짜빈동(트라 빈 동)에서

 전투를 벌였고, 미 해병대 제임스 듀런드 중령은 이 전투를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전투라고 말했다.

 

추라이 지역 짜빈동 마을에 있던 한국해병 3대대 11중대는

북베트남군 1개 연대 1,500명의 공격을 받았다. 1967년 2월

14일. (이 월맹군을 2,400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월맹군

은 11중대 진지를 두 방향에서 경계선 장애물을 뚫고 공격

해왔다.

 

3소대 1분대인 배장순 하사는 자기 참호를 버리는 대신 총알

과 수류탄, 야전삽과 도끼, 마지막에는 맨주먹으로 싸우며 버

텼다. 김명덕 일병은 전진해오는 적을 소총으로 10명을 사살

했고, 이학원 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적이 오기를 기다

렸다 아주 가까워졌을 때 수류탄을 들고 적에게 몸으로 돌진

해 같이 폭사시켜 적 4명을 죽이고 본인도 전사했다. 이영복

일병은 마치 죽은 것처럼 밑으로 자기 참호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간 다음 다가오는 적에게 수류탄 공격을 가했다.

 

1소대장 신원배 소위와 소대 선임하사 김영길은 병력을 모아

함께 적의 박격포 거점을 격파했다. 이들은 박격포좌를 향해

전진하다 20미터 거리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다가서며 수류

탄을 더 던지고, 계속 적진해 포좌에 도달해 적을 죽이고 박

격포 포열을 들고 아군 진영으로 복귀했다. 포좌에는 적의

시체만 남긴 채.

 

월맹군이 화염방사기로 공격해오자, 한국군들은 화염방사기

를 향해 전진해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진 다음, 적을 죽

이고 화염방사기를 노획했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 미 해병 제3상륙군 사령관 루이스

왈트 중장이 11중대장 정대위와 대화하고 있다. 그 옆에는

청룡여단장 김영상 준장도 보인다. 이들 발밑에는 수많은

적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정대위는 표정을 읽기가 힘들다.

왈트 중장은 다정하게 정대위를 대하고 있고 정대위의

얼굴에 자신감이 보인다.

 

이후 해병대 포병이 도주하는 그들을 향해 포격했고, 미 해병대

A-4 전투기와 공격헬기들이 전투 마지막을 처리했다. 북베트남

군은 시체 243구를 남겼다. 그리고 철조망 경계선 부근에 적 100

명 정도가 죽어 있었고, 철조망에 뒤엉켜 죽은 시체도 140구 정도

있었다. 타임지는 1967년 2월 24일 호에서 "A savage week"란

기사를 실었다:

 

"한국군은 대검 대 대검, 맨 손으로 백병전까지 벌였다. 그들

에게는 치명적인 태권도가 있었다. (가라데에서 기원한) 패배

시킬 수 없는 그들이었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보니 철조망에 적 시체 104구가 있었는데, 많은 수가 내장

이 터지거나 뇌가 날아가 있었다."

 

미 해병대 역사 및 박물관은 [The Marines in Vietnam 1954

-1973]이란 타이틀의 기사에서 이 전투를 이렇고 말한다:

 

"추라이 남서쪽 한국 해병여단의 11중대 방어선으로 적은

연대급 공격을 가해왔다. 그 결과는 베트콩 1연대와 배속된

월맹군 21연대 다수에게 참화적인 결과를 선사했다. 적을

투라 쿡 강 굽이에 고정시키고 월남군 공수대대 2개가 헬기

로 투입되어 적 위치를 넘어 뒤로 들어갔다. 강 남쪽에 월맹

군 차단병력이 더 들어갔고, 해병 5연대가 북서쪽의 작은

언덕으로 진출하고, 한국 해병대는 자신들 진지 남서쪽으로

1번 국도를 따라 기동했다."

 

한국해병의 전상도 적지 않았다. 그 예로, 추라이에 있는

미 해병 1사단 1병원중대에 (후일에 다낭으로 이동) 많은

한국해병 부상자들을 받았다. 대부분은 심각한 중상이었

고 수족절단 대상자도 많았고, 양쪽 다리를 절단한 해병

도 매우 많았다.

 

 

좌에서 우로 : 지휘관 김중호 중위, 김정세 일병, 제임스 마우혼

중위, 작전 후 김일병의 수술 후 병문안을 온 사진이다.

 

추라이 1병원중대에 누워 있는 김정세 일병은 21세로, 심장과

여러 내장기관에 총을 맞았다. 야간에 추라이 근처 다탕간 반도

의 수색섬멸작전 중 다쳤는데, AK-47 총알이 방탄조끼를 뚫고

들어가 심장 심막(心膜)을 관통했다. 이 총알은 심장을 지나 횡

경막도 뚫고 결국 갈비뼈에 튕기며 간장과 비장을 찢으며 등

뒤로 관통해 나갔다.

 

총알을 맞고 30분이 지나 MAG-16 헬기로 후송되었는데, 병원에

도착한 15분 뒤부터 수술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존 리드 중위와

육군 간호장교가 집도하며 수술을 하며 비장을 제거하고 복부와

간장 상처를 치료했다. 결국 둘은 밖으로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

청했고, 야전병원 지휘관이던 짐 마우혼까지 투입된다. 해병대

군의관인 김중호 중위가 이 과정에서 수술을 도우며 옆을 지켰다.

김정세 일병의 수술이 끝났을 때 총 7리터 이상의 피를 흘렸다.  

 

위의 세 사진은 수술 후의 김정세 일병의 모습이다. 침상 밑에

보면 복부에서 나오는 체액을 빼내기 위한 병들이 보인다 

 

 

이 병원에서 근무했던 군의관들은 정말 많은 한국해병들이

실려와 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그러면서도 한국해병들은 매우 용감했다고 사진의 짐

켈로그는 말한다.  

 

 

김정세 일병의 소생은 사람들의 소문으로 자자했고 참 믿기

힘든 사건이었다! 야전병원의 관계자들은 한국해병들이 정말

심하게 아파도 광장한 용기로 다시 돌아가 적을 죽이고 싶어

다고 말한다. 심지어 수족이 날아간 병사까지.

 

 

다낭 남쪽의 한국 해병과 작전 중인 USMC CH-53

 

1967년 4월은 언급을 할 필요가 있는데,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적지 않은 시선을 1군단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웨스트모얼랜드와 미 해병대 간의 알력도 있었고, 당시

북베트남군이 비무장지대와 라오스를 통해 월남에 들어

오는 침투가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은 Task Force Oregon을 1군단 지역 최남단의 광틴

과 광나이 지역에 배치했다. 이 태스크포스 오리곤은 보병 6개

대대로 구성된 3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는 1군단 지역

남단에서 작전시킴에 따라 미 해병이 1군단 북쪽에 더욱 신경

을 쓰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1967년 10월, 이 오리곤 태스크포스는 사단으로 신규

창설되므로써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는 미군 일곱 번째 전투사단

Americal Division이 된다. 이 사단은 유일하게 Marine Country

내의 육군 보병사단이었다.

 

67년 여름 동안, 북베트남군 2사단과 베트콩은 1군단 지역

남부 3개 지방에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는데, 1군단 지역 최

남단은 또한 Blue Dragon Country였다. 당시 추라이 근처

에는 미 육군 9개 대대가 작전하고 있었다.

 

이들을 따라 한국해병 3개 대대는 추라이 남쪽을 맡았고,

미 육군과 연합해 월맹군과 베트콩 주력군을 인구밀집지역

에서 밀어내 산악으로 몰아내는 형태였다. 산악은 서로

작전하기 힘들었으나 적어도 인구밀집지역의 적은 몰아

내야 했다.

 

67년 7월 동안, 미 해군 - 미 해병대 - 청룡여단은 북베트남

군의 트롤선들을 감시했다. (이 트롤선들은 미군이 Skunk

Alpha라고 호칭) 이런 트롤선들인 해안선을 따라서 천천히

남하하며 탄약을 수송했다.

 

 

공해상에서 북베트남 보급선들이 어선으로 위장해 보급품

을 날랐다. 해군 정찰기 P2V 넵튠이 찍은 사진으로, 선박

외피에 459라는 숫자가 보인다.

 

미 해군의 ‘Market Time Northern Surveillance Group’이란

제대가 이런 트롤선을 전문적으로 추적했고 상공에서는 미

해군 정찰전대 P2V 넵튠이 감시했다.  

 

 

Map graphic presented by "Sa Ky River Victory."

 

 

청룡여단이 주둔한 지역의 해안 바로 앞에 파라셀 군도가 있었

는데, 한 트롤선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섬을 기점으로 내륙으

로 틀어 바탕간 곶(바탕간 반도)로 들어왔다. 추라이와 다낭의

남쪽 구역. 7월 11일 해안으로 접근하던 이 배는 갑자기 180도

선수를 돌려 파라셀 군도 쪽으로 튼다. 그리고 이틀 뒤에 다시

바탕간 반도로 재차 접근해왔다.

 

미 해군은 이 선박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고, 승무원들이 배를

그냥 폭파시켜버리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고 했다.

 

174공격헬기중대가 호출을 받아 무장헬기를 이륙시켜 근접항공

지원을 준비했고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수송헬기에 청룡여단 병

력을 공중강습을 위해 태워 대기시켰다. 이 작전은 지형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매우 흥미로운데, 전투는 [Sa Ky River Victory]라고

명명되었다.

 

트롤선은 해안으로 다시 틀었고 아마도 기다리던 베트콩들에게

짐을 내리려는 것 같았다. 다양한 해군 함정들이 이 배를 잡기

위해 힘겹게 덫을 형성했고, 선박의 신원과 목적지를 파악하려

했다. 이것이 끝나자 미 해군 쾌속보트가 다가서기 시작했고,

174공격헬기중대 건쉽도 지시를 받았고, 같은 헬기중대 수송헬기

에 탄 한국 청룡여단 병력들은 해안에 강습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

미국과 월남 해군 선박들이 위치를 잡고 트롤선이 12마일 안쪽

까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기상은 안 좋았고 밤이었으며 해상은 8-10노트로 파도가 쳤고

바람은 30노트나 불었다. 트롤선은 사 키 강 입구의 부드러운

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아마도 거기서 베트콩과

접선할 모양인 것 같았다. 짐을 부리면 거친 기상과 어둠을

이용해 탈출할 수 있었다.

 

해안으로 다가서던 트롤선은 다가오는 다른 배들을 보고 곧장

발포했다. 쾌속보트에서 곧바로 응사했는데 총알이 조종실을

정확히 때려 승무원이 죽었고, 승무원들은 이제 배를 폭파시킬

수 없게 된다. 건쉽헬기도 발포하면서 일대에 조명탄을 투하해

밝혔다. 그리고 해안에 위치한 청룡여단의 포병이 포격을

시작했다.

 

 

트롤선이 불구가 되어 연기가 나고 있다. 67년 7월 15일.

 

이후 해안에서 벌어진 거친 바다에서의 공조와 선박조종술은

상당히 훌륭했다. 트롤선은 정지했고 승무원 대다수가 죽거나

다친 것 같았고, 배는 근처 바위에 서버렸다. 173공격헬기중대

는 한국 해병대원들을 해안에 공중강습시켰고, 베트콩들이

없나 수색한 다음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추라이 항에 견인된 트롤선. 미 해군 사격이 조종실에 적중되어

승무원 대부분이 참화를 맞았다.

 

트롤선에서 하역한 실려 있던 병기와 탄약

 

라울 헤레라는 이 작전을

1996년 베트남 매거진에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트롤선은 임무에 아주 적당한 배였다. 이 배는 외피에 섬유유리를

덮어 레이더에 안전했고 또한 강력한 펌프를 장치하고 있었다. 엔진

도 중간 외피로 싸 소음이 적었다. 그리고 배는 2천 파운드의 TNT를

적재해 유사시 자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 좋게 박격포탄 한 발

이 이 자폭장치의 버튼을 날려버렸다. 이 배를 잡음으로 해서 수천

명 동맹군의 목숨을 건진 것이고 만약 사격이 적중하지 않았다면

자폭으로 가까이 갔던 PCF-79호도 폭발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7년 북베트남군은 비무장지대를 횡단하는 대규모 작전을

감행해 남하했고 라오스를 통해서도 광트리 지방으로 들어왔

다. 라오스 침투로에서 정확히 걸리는 것이 바로 미 해병대의

케산진지였다. 1년 내내 케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68년까지

월맹군의 공격은 강력하고 매우 힘든 공격을 지속했다. 미 해

병대가 추산한 적은 병력 무장 모두 완편된 북베트남군 사단

들이었고 선봉은 304사단이었다. 이들은 케산을 완전히 격파

하려 했다. 68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테트공세와 케산

전투다.

 

 

미 해병대 CH-46이 비무장지대에서 돌아오고 있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 해병대원과 한국 해병대원에게 잡힌 베트콩 포로

7-8명이 타고 있다. 68년 4월, 다낭으로 향하고 있다.

 

 

청룡여단은 정글전에 특별히 훈련된 소수 제대를 투입했는데,

이들의 임무는 최대한 월맹군 포로를 잡아 심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무조건 야간에만 나가 작전했는데, 돌아올 때마다 항상

포로를 잡아 데려왔다고 한다.  

 

67년 12월, 보병 11여단이 광나이에 도착했고, 그러자 청룡은

더 북쪽으로 이동해 호이 안 구역에 들어갔고, 거기 있던 미

해병대대는 또 북쪽으로 이동했다.

 

68년 1월 18일에는 미 101공수사단 1여단이 도착해 반 버렌

작전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월남군과 한국해병도 참가해 월

맹군 95연대와 교전했다. 95연대는 베트콩 3연대와 지역 베

트콩의 증강을 받고 있었는데, 작전은 해리슨으로 개명되면

서 2월 21일부터 3월 25일까지 지속되었다. 돌연 이 지역을

침범한 95연대는 상당수가 사살되었다. 이들은 굉장히 사기

가 높고 강력했다. 결국 95연대는 소모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

 

잘 알다시피, 68년 1월 30일 시작된 테트 공세는,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이 미 태평양사령부에 보낸

전문으로 파악할 수 있다:

 

"적시에 공격의 징후를 간파했기에 미군/월남군/한국군은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다낭의 경우 곧 평정을 되찾았다.

적 사살 89명에 아군 전사 7명. 이날 아침 이른 시각에 한국

해병대가 주목할만한 반격을 시작해 호이 안 지역의 적을

헬기로 기동해 공격했다. 적 사살 21명에 아군 전사자는 없음."

 

 

다낭 남쪽의 ‘햄 샐러드 알파’ 한국군 진영. 68년 봄에 이 지역은

1군단 지역에서 가장 뜨거운 구역이 되었다.

 

태평양 지역 잡지 성조기는 68년 3월 청룡여단장 김윤상

준장을 인터뷰했다. 준장은 테트공세 딱 하루 전에 여단

이 광남 지역 호이 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도시 안의 적에

관해 폭격을 하는 대신 김준장은 지상에서 적을 도시에서

몰아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1월 30일에서 2월

29일까지 청룡여단은 적 609명을 사살했고 청룡여단은

전상자 50명이 났다.

 

68년 동안 청룡여단은 ‘승룡(Victory Dragon)작전’을 6회

실시했고 69년에는 12회를 더 실시한다. 미 해병대 에드윈

사이몬스 준장은 해병대 역사관에 써서 기록한 서적 [Marine

Corps Operations in 1968]에서 68년 승룡작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월남군은 테트공세란 시험에서 잘 버티며 성장했다. 68년 적

26,688명을 사살했고 이는 67년과 비교하면 두 배였다. 한국해병

청룡여단은 일련된 승룡작전을 통해 적 2,504명을 사살했다.

1군단으로 넓게 보면 총 10만 명의 적을 사살하고 병기 35,000

정을 노획했다."

 

월맹군 31연대 출신 적 부사관은 자신의 임무를 이렇게 증언했다.

“호이 안을 공격하는데, 가능하다면 총 5회를 하려 했고, 해방정부

를 세우려고 했다.” 이 공격은 실패했다.

 

 

  Hoi An area

 

배리어 섬은 다낭 남쪽 34마일 거리로 호이안에서 보면 바로

남쪽 아래인데, 거기 아주 강력한 적이 오랫동안 자기 땅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 벙커와 참호를 축성해 요새

화했고, 해병대는 싸우고 나서 또 들어가 싸워야 했다. 특히나

배리어 섬이 가장 눈길을 끌었는데, 이 위성사진에서 구역이

잘 보인다.

 

1969년 5월, 미 해병대 헬기들이 26연대 1대대를 태우고 섬

으로 향했고, 그 일대는 사각형으로 완전히 차단하는데 월남

군과 청룡여단과 이 아메리칼 사단 제대가 참가했다. 작전

명 다링 레벨. 베트콩을 분쇄하기 위한 대규모 수색섬멸작전

이었다.

 

 

Washtenaw County (LST-1166)

 

69년 9월 11일, 다시 한 번 배리어 섬이 목표로 떠올랐다. 1953

년부터 전투작전에 사용된 미 해군 탱크랜딩용 LST 1166호가

한국해병대를 상륙병력으로 탑승시켰는데 이는 함 역사의 상륙

20주년 기념도 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디파인트 스탠드로, 여러 부대가 참가한 연합작전

이었다. 청룡을 수송하는 미 해병 265헬기전대, 미 해병 26연

대 1대대 상륙팀, 청룡여단 3대대, 월남군 정찰선과 미 7함대

의 여러 함선들이 사용되었다.

 

여러 부대가 동시에 공격작전에 나섰기에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부대들은 최선을 다했다.

 

이 상륙공격 전에, 미 전함 벤쿠버가 실제 목표 남쪽 10마일

지점에 위장 상륙작전을 실시해 적 방어병력을 분산시키면

효과를 유도했다.

 

먼저 지휘통제함이자 상륙함인 ‘숫돌(Whetstone)’에서 이륙한

미 해병대 헬기 CH-46D들에 미 26연대 1대대 병력과 청룡여단

일부가 타고 섬의 상륙지점 레드비치로 향했고, 미 해군 구축함

Taussig이 해안 화력지원에 나섰다.

 

청룡여단 병력이 섬을 가로지르는 차단선을 구성했고, 미 해병

26연대 1대대가 상륙해 남쪽에 차단선을 만든 다음 북으로 이동

해 서로 만나는 방식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숫돌’에서 발진한

상륙함들이 미 해병과 청룡여단 3대대 5-6중대를 섬 북쪽 끝

해안에 상륙시킨다. 이 병력은 역시 남쪽으로 전진하며 미군과

한국군 해병들이 만든 차단선을 압축해가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적 293명이 사살된다.

 

월남군 정찰선들이 섬에서 탈출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록으로 보면 사이몬스 장군은 1군단 지역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다. 테트가 터졌고 분명히 테트공세의 적은 격퇴되었다.

68년에는 케산진지에서 대규모 포위전이 벌어졌고, 또한 그

일대 고지군에서 Hill Battles이 근 1년 동안 진행된다. 적은

모든 공격에서 분명히 격퇴를 당했다. 사이몬스 장군은

1968년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제3상륙군과 상대한 베트콩 정규군과 지역베트콩

부대들은 오랜 전투로 인해 파편화되었고 구조 체계가

와해되어 사실상 전선에서 더 이상 효력이 없었다. 심지어

북베트남군 병력도 점차 질이 떨어지고 있었다. 포로로 잡

힌 북베트남군을 보면 어떤 경우 너무 어리고 훈련도 부실

했다. 전장은 기강으로 승패가 기운다. 적 전사자와 부상자

들이 병기와 함께 뒤에 쳐지기 시작했다."

 

사이몬스 장군은 69년이 되자 더욱 낙관적인 이유를 보게

된다. 1군단 지역에서 화해 프로그램이 잘 수행되어 적 6만

명을 죽였고 월남군과 한국군이 공조해 27,440명을 죽였

으며, 총 10,567명이나 되는 포로가 투항하거나 잡혔다.

 

 

사진은 한국 해병대 벙커에 추락한 미 해병대 CH-53 헬기.

해병 승무원 한 명이 사망했다. 이 헬기는 1970년 가을 홍수

가 났을 때 청룡여단 후송작전을 수행하다 추락한 것이다.

 

이 당시 청룡여단을 후송했던 미 해병 승무원은, 헬기가 거의

반쯤 잠긴 상태에서 청룡대원들이 몸을 물에 담그고 물살을

헤치며 탑승했다고 말한다. 이 사진은 홍수 물이 빠진 상태에서

촬영된 것이고, 당시는 물에 잠겨 벙커 위만 노출된 상태에서

탑승시키다 사고가 났다.

 

 

1970년이 되자, 미군 지휘부는 1군단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1전술군단 지역은 총 책임이 미 육군 24군단으로 넘어갔고 해병

제3상륙군은 보조가 되어 24군단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미 해병

대는 책임구역이 광남 모든 지역과 투아 틴 북부 등으로 국한되

었다. 당시 다낭은 인구밀집 구역으로 이 지역 전체 97만 명 중

에서 다낭에만 41만 명이 넘게 살고 있었다.

 

[미 육군 24군단은 2차대전과 베트남전을 모두 참전했다. 잇빨 주]

 

미 해병1사단이 다낭의 적을 몰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1사단은

동심원 형태의 방어선을 형성했고, 다낭을 빙 둘러 방어하는 것

은 해병 5연대 1대대에 맡겼다. 미 해병1사단은 그 바깥에 다른

동심원 형태 2차 방어선을 만들었는데 이를 Rocket-Belt라고 불

렀다. 청룡여단은 호이 안과 위쪽의 마블마운틴을 책임구역으로

받았고,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가 더 서쪽의 구역을 맡았다.

다낭 방어는 성공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한국군은 숙련된 전투기술을 보여주어 마을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고 또한 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우애를 쌓는 방식도 동시에 취했다.

 

당시 한국군의 무술은 근접전투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다른 미군 해병들도 청룡여단의 무술훈련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 중 한 명이 3연대 2대대 G중대 소대장 제임스 존스 당시 중위로,

그는 최근에 유럽동맹최고사령관이 되기도 했다. 그 이전에 그는

전 미 해병대사령관을 했었고, 이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투무술

프로그램을 훈련과정에 필수로 넣었다. 그것이 바로 미 해병대

전투무술 프로그램(MCMAP)이다.

 

 

그는 나중의 회고에서 베트남 당시 자신의 해병대가 청룡여단

동료들과의 맨손전투술 교류와 경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앞서 짜빈동 전투를 말했는데, 당시 전투에서 맨손 백병전이

상당히 많이 일어났고 청룡여단 병사들은 맨손격투술을 이용

해 큰 효과를 봤었다. 짜빈동 전투의 11중대장이었던 정대위는

나중에 중령까지 진급했고 무술이 해병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

는지 이렇게 밝혔다.

 

"첫째, 적은 갑자기 우리 참호선을 강하게 압도했다. 잇따라

계속 적이 몰려들어 소총을 재장전하거나 쏠 여유가 없었고

심지어 대검을 쓸 시간마저 없었다. 그래서 적을 우리 참호선

안에서 밀고 당기는 일이 무척 많이 일어났다. 그 시점에서,

우리 해병대는 태권도가 무기가 되었고 우린 적의 급소들을

공격했고, 그러면서 우리 참호선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둘째, 우린 적과 맞서 용기와 담력 그리고 훈련된 태권도로

맞섰다. 우리는 적이 오는 길에서 퇴각하지 않고 자기 자리

를 지켰다. 몸을 노출하면서 불굴의 정신으로 싸운 것이

짜빈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짜빈동의 소대장이었고 중장으로 퇴역한 신원배 장군은

나중에 청룡여단장이 되기도 했었다. 신원배 장군의 말.

 

"적과 근접전이 일어나자 소총에 착검하고 적을 제압했다.

당시 우리 병기는 M-1 소총이었는데 빠르게 휘두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긴급한 상황에서 우리는 앞의 적 얼굴과

급소를 잔인하게 태권도로 가격했다. 일단 앞의 적이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옆의 해병이

소총으로 끝장을 냈다.

 

참고삼아 말하면, 이 당시 다가오는 적의 선도제대에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야전삽이었다. 그걸로 적 선도를 정말 효

과적으로 제압했다. 태권도가 실전에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태권도 훈련이 각 해병들에게

적을 쳐부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태권도 훈련은 정말로 중요하다."

 

베트남에서 적은 미군과 싸울 경우, 가까이 붙어 근접전을

전술적으로 선호했다. 그러면 박격포와 포병과 근접항공지

원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군에게는 그렇

지 않았다. 적은 한국군과의 근접전을 피하고 거리를 두려

고 했다. 월남군은 한국군에게 자기들 병력에게 무술을 가

르쳐줄 수 없는지 문의하기도 했다. 월남군은 대규모로 태

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첫 번째 외국군대였다. 태권도 프로

그램은 원래 1962년부터 시작된 바 있다.

 

아래 사진의 경례하고 있는 랜달 아놀드 미 해병대 퇴역

상사는, 2005년 7월 1일 퇴역하면서 미 해병대 내 마지막

베트남전 참전 해병이 되었다. 랜달 아놀드 상사 외에 더

이상 베트남 참전자가 없었다. [병/부사관을 의미하는

듯함. 장군 중에는 있을 것으로 예상. 잇빨 주]

 

 

아놀드 상사는 1970년 1월 다낭에 도착해 해병 7통신대대

통신지원중대 소속이었다. 나중에 지상작전지원으로 호이

안에서 청룡여단과 미 해병 사이의 통신지원을 하며 청룡

여단 작전에 참가했다. 그때 청룡여단 대원들이 아놀드에

게 무술을 가르쳐주었고, 아놀드는 그때 배우기 시작한

무술이 자신의 인생과 가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내가 처음 무술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는, 한국군 해병을

보면서부터였다. 그 친구들은 정말로, 정말로 강인했고

완강한 전사들이었다. 우리 대대가 다낭 레드비치로 이동

했고 그 이후로 그들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 한

한국육군 대령에게서 계속 배웠는데, 이것은 내 인생

내내 열정적으로 지속되었다.”

 

이라크전이 목전에 다달았을 때, 미 해병대와 육군은

원거리 살상법을 많이 개발시켰다. 그러나 대검 사용

법이나 백병전 훈련도 여전히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

었다. 해병대 제미슨 유가 쓴 [MCMAP and the Marine

Warrior Ethos]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진은 현대의 미 해병대가 MCMAP의 take-down 기술을 훈련

하는 모습. 중간의 작은 사진은 바그다드 작전시 그 기술을 이용

하고 있는 모습이다. [꺾기를 말하는 듯. 잇빨 주]

 

마이클 연은 2005년 [Gates of Fire]란 책을 냈는데, 로버트

프로서 주임상사가 이라크 모술 전투에서의 어느 날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백병전의 경험을 들려준다. 현대의 전장, 특히

나 시가전에서 백병전 기술이 아직도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다.

 

이 이야기는 두 사진으로 끝내도록 한다.

 

 

 

1970년 미 해병대와 같이 FAC 임무를 수행하던 O-1

"Bird Dog" 관련 한국해병들이 촬영된 사진. 이들은 미

해병대 정찰기 뒷좌석에 앉아 지상군 청룡과 교신하며

작전하던 관측병들이다.

 

미 해병대나 한국 해병대나 강인한 친구들이다.

어느 미 해병대 중사가 같이 근무했던 한국 해병

에 관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들이 얼마나 하드코어인가 하면,

 총을 맞아도,

 그냥 모기에 물린 것처럼 그런다니까."

 

 

[끝]

 

출처 : ?海/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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