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명찰 Viet nam veterans

[스크랩] 한국군 장교와 사이공 여대생과의 사랑이야기

마블마운틴 2015. 10. 2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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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장교와 사이공 여대생과의 사랑이야기

2008년 7월 미국에서 한통의 국제전화가 걸러온다.

[여 보세요 이남원씨 되십니까? ]

[예 제가 이남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이명우 라고 합니다 저는 70년도에 월남에서 민사심리전 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한국군 초급장교로 세번 파병했습니다. 1973년 3월20일 사이공 롱빈기지 공항에서 마지막 철수했습니다.]

[아~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 번호를 알고 전화를 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고 미국에 계신 정우진씨 하고 가깝게 지내고 미국 동부와 남부로 멀리 떨어저 살고 있습니다 마는 같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전우로써 자주 전화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전 정 우진씨가 저한테 38년만에 베트남 다녀온 이야기를 너무도 감동 깊게 해줘서 이남원 전우님 전화 번호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예 그렇군요.]

[그런데 부탁 있어서 전화 했습니다. 다름 아니고 1970부터 1973년까지 주월사 민사심리대 파견대장 으로 근무할 당시 알게된 사이공대학 법과대학에 다니던 베트남 여대생을 찾고 싶어서 전화 했습니다. 꼭 찾아서 만나보고 싶습니다.]

[35년전 사이공대학에 다니던 여대생을 찾을수 있을까요? 당시에 살고 있던 동래와 지역을 기억하십니까?]

[예 기억 합니다. 이름은 "뚜익"입니다. 당시에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살던 곳은 베트남 동나이성 빈증 지역으로 기억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살면서 뚜익을 찾기 위해 15년전과 10년전에 미국에 살고있는 사이공 출신 베트남 태권도 제자들을 보내서 몇번 찾아보앗으나 베트남이 북으로 통일되면서 행정구역이 많이 바뀌어서 찾지를 못 했습니다. 포기하고 있던중 정우진씨가 투이호아 지역에서 근무할 당시 부대근처 마을이장님을 살아생전 만나 보려고 미국에서 베트남으로 가 이남원 씨 도움으로 이장님 아들과 마을사람들로 부터 환영과 큰대접도 받고 왔다고 자랑을 하는데 감동 적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남원씨 연락처을 알게되었습니다. 지금 쯤 50대 중반쯤 되었고, 남편도 있을거고 자식들도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꼭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도 월남만 생각하면 항시 여대생 뚜익이 생각나고 사이공과 닌호아 지역이 생각납니다. 35년동안 투익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1973년 3월20일 마지막으로 철수당시 투익이 롱빈기지 공항까지 오토바이 타고 군용차 뒤따라와서 롱빈기지에서 마지막 슬피 울면서 한국에 가시거던 꼭돌아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울던 모습이 평생을 잊지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사이공과 닌호아 지역은 제가 초급장교 시절 월남 전쟁에 참전했던 지역입니다. ]

[이명우씨 알았습니다. 한번 찾아 보겟습니다. ]

[예 알았습니다. 부탁 합니다. 사진과 이름은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

태권도 교관단으로 월남 전선으로 파병


월남전선으로 부산항을 떠나는 미국수송선

(이명우 대위)
민사 심리대 파견대장으로 근무당시

" 뚜익"과 이명우대위의 첫만남

1972년 월남의 따가운 열대지방 햇살이 내려쬐는 일요일 오후 사이공 럴러이 와 동커이 거리는 미군과 연합군 한국군이 외출을 즐기고 있었다.

근처에는 미군전용 호텔이 있고 2키로 후방에는 주월 사령부가 있으며 일요일이면 동거이거리와 럴러이 거리는 외출나온 군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명우 대위도 쩔렁에 있는 주월사 장교숙소를 나와 야시카 카메라을 메고 동거이 거리에 있는 노천카페에서 월남어름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후 햐얀 아오자이를 입고 피부색이 유난히 희고 예쁘게 생긴 월남 아가씨가 왼손에 두툼한 책을 들고 긴머리을 찰랑이며 노천 카페에 들어온다.

카페에 들어와서 이명우 대위 옆자리에 앉는다. 20대 후반의 젊은 장교는 잠시 전류에 감전되듯 멍하니 아오자이 입은 아가씨을 처다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친다.

아오자이 아가씨는 생끗 미소를 지으며 '안녕 하세요'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할줄 아세요.]

[ 네 저는 비둘기 부대 PX 선물 코너에서 낮이면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인 같이서 한국말로 인사 했습니다. ]

[아~그러세요. 그런데 학생 입니까? 두툼한 책이 학생같아서요.]

[ 예 사이공대학 법과대학 학생입니다. ]

이렇게 이명우 대위와 투익은 동커이 거리 노천카페 에서 첫 만남이 있었다.

35년전 사이공 법과 대학 시절(22세)의 '뚜익' 이명우 대위가 처음 만나서 찍어준 칼라사진

사이공 법과 대학생 뚜익

1972년 뚜익은 사이공대학 법과 야간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고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월남군 장교로 있는 오빠와 언니 1살짜리 조카 아버지가 동나이성 작은 마을에 살고있다고 했다.

낮이면 투익은 동나이 디안면에 있는 비둘기부대 내 PX 선물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밤이면 오토바이로 사이공 대학 법과대학에 다니고 있다.

비둘기부대 PX 선물코너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배우게 된단다.

3번째 월남 전에 파병된 이명우 대위는 아직 보직을 못받고 쩔렁에 있는 주월사 장교 숙소에서 대기 하던중 1972년 주월 사령부 민사심리전 부대 비둘기부대 파견대장으로 발령 받는다.

민사심리전대 비둘기 부대 파견대장으로 근무 하게된 이명우 대위와 뚜익은 비둘기부대에서 다시만나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사랑을 나누게된다.

부대원들이 알세라 조심스럽게 일요이면 사이공시내와 담샘 공원 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뚜익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장래 까지 약속한게된다.

이명우대위 마지막 월남에서 철수

1973년 3월20일 한국군을 태우고 갈 미군 군용기가 롱빈 보급창 기지에 대기 중이다.

이명우 대위는 주월사 마지막 철군요원으로 비둘기부대에서 뚜익과 작별인사를 했다.

뚜익은 오토바이로 롱빈 기지창 까지 군용차량을 따라와서 이대위와 마지막 작별 인사을 한다.

[몇년이 되어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 합니다. 꼭 돌아오세요.]

[알았소 한국에 돌아 가서 전역을 하고 찾아오겠소. 전쟁도 곳 끝날 것이요.]

군용기가 롱빈기지 할주로를 요란한 괭음을 울리며 하늘로 날아간다.

뚜익은 군용기가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흐르며 배웅했다.

73년 이명우 대위는 한국에 도착하여 육군 본부에 전역신청을 하게된다.

전역을 기다려도 육군본부에서는 특수요원으로 3번이나 월남전선에 파병됐던 장교라고 전역을 시켜주지 않았다.

1974년 베트남 전쟁은 중부지방까지 월맹군에 함락되고 전세가 무척 불리 하다는 소식이다. 74년 다시 전역 신청을 하여 전역을 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뚜익은 미국에서 자리잡으면 연락할 생각이다.

미국 시애틀에 도착한 이명우 씨는 태권도 9단의 실력으로 시애틀 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성공하게된다.

1975년 월남은 월맹군에게 완전 함락되고 투익과 영원히 이별 하게된다.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면서 월남출신 제자들도 많이 생겨서 15년전부터 월남출신 제자들을 사이공으로 보내서 뚜익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를 못하게된다.

뚜익을 찾아나서다

메일로 받은 35년전 사진한장 달랑들고 3일동안 호치민시내와 동나이 지역 빈증지역 수소문하고 돌아다녔지만 허탕만 치고 마지막으로 디안지역을 찾아가서 수소문하던중 드디어 현지인 할머니가 아는 사람같다고 알려준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뚜익을 극적으로 찾을수 있었다.

뚜익을 찾아 만나보니 이명우 씨와는 첫사랑을 한 남자며 지금도 무척보고 싶다고한다. '그렇게 오랜세월 기다렸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

첫사랑의 한국군 대위가 다시 베트남으로 자신을 찾아올 희망을 갖고 꼬박 10년을 기다렸으나 찾아 오지 않아서 34세가 되는해에 베트남 남자와 결혼을 해 22세된 딸을 두고있고, 결혼한 베트남 남자는 15년전에 행방불명 되었다고 한다.

1975년 베트남이 북으로 통일되면서 베트남군 장교인 오빠는 전사하고 같이살던 언니도 어린 조카만 놔두고 세상을 떠나 77년부터 어린조카 딸을 친딸처럼 돌보며 결혼시켜서 지금도 같이 살고 있다.

오빠가 월남군 장교이고 '투익'역시 한국군 부대에 근무경력 때문에 직장도 잡을수 없었고 목슴만 연명할수 있는 배급으로 살아가면서 배고품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이 도이모이 정책으로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하고 한국공장들이 베트남으로 들어오면서 한국말 통역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한국공장 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한국공장에서 통역관으로 2005년까지 10년동안 근무하게 된다.

몸이 아파서 3년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있는 중이라고 한다.

몇 년째 몸이 아파 직장도 없이 고생을 하면서 나에게 한국말 통역자리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

미국 이명우씨에게 뚜익을 찾았다고 연락하고 현재 직장도 없이 여자혼자 가장으로 어렵게 살고있다고 전해준다.

[뚜익은 한국말을 아주 잘 합니다. 전화 해보세요.]

이명우씨에게 뚜익 전화 번호를 알려줬더니 고맙다며 호치민에 빠른 시일에 오겠다 고 한다.

이명우씨의 감사 메일

이 사장님께 보

내주신 e-mail과 사진 잘 받았습니다. 정말 수고 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쉽게 찾을줄 몰랐읍니다. 역시 실력이 대단 하십니다.

뚜익 하고 한시간 이상 통화했읍니다. 무어라고 표현할수 없는 감격의 순간 이었습니다.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35년 이라는 세월이 너무나 많은 것 들을 변화 시켰음을 실감케 하는군요.

다음달 11월 20일 쯤 한국에 들렸다가 베드남을 방문 할 예정입니다.

이사장님을 만날 생각하니 기대가 되는군요.

제 e-mail 주소가 변경 되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이명우 전우 드림-

이명우씨는 하루에 한번씩 뚜익과 전화 통화을 하면서 22세 딸아이가 대학교 2학년이고 현제 뚜익이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투익씨 딸 학비와 병원비에 보태 쓰라며 usd 5.000 송금 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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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전 자신의 사진과 이명우씨 사진을 보고 있는 투익씨

이명우씨는 베트남에 2008년 11월22일 아세아나 비행기로 호치민에 도착 예정으로 비행기 예약 를 해놓고 뚜익씨 와는 하루에 한번 씩 미국에서 베트남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11월22일 13시20분 사이공 탄산루트 공항에서 서로가 만나기로 약속이 됐다.

2시간 전에 공항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2008년 11월11일 낯12시 울먹인 목소리의 베트남 아가씨의 전화 목소리

이남원 씨입니까?

예 제가 이남원입니다.

명함을 보고 전화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하셨나요?

저는 뚜익씨 딸 되는 사람인데요.

my mother die yesterday night
우리 엄마가 어제 밤에 죽었습니다.

my mother die my mother die

계속 우리엄마가 죽었다고 반복하면서 울고있는 전화 목소리

베트남 통역관을 시켜서 왜 무슨 일로 어머님이 죽었느냐고 자세히 물으니 어머님이 평소에 유방암으로 고생하고 있던중 35년 만에 이명우씨 소식을 듣고 만날 날만 기다리다 이명우씨를 만나기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볼려고 수술을 했으나 .............

죽었다고 합니다.

잠시후 미국에서 이명우씨 전화,

[이남원씨 지금 뚜익한테 전화를 하니까 뚜익 딸이 전화를 받으면서 우리엄마가 어제저녁 죽었다고 울면서 얘기를 하는데 무 슨 사연인지 알아봐 주세요]

[예 저도 지금 막 딸한테 연락 받았습니다. 베트남 통역관이 그러는데 어제 저녁 갑자기 죽었다고 하네요.]

[뭐요 사실입니까 ? ]

[예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사실입니다. ]

[ 아~이것이 무슨 운명이 이렇습니까? 몇 일만 기다리고 있으면 10일후면 내가 베트남에 들어가는데 나를 만나보고 가든지 ........... 후~말문이 막힌니다.]

그러나 예정대로 호치민에 들어가서 뚜익 영혼이라도 만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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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익씨 딸 22세 대학생이 어머님이 사랑하던
한국군 장교의 사진을 들고 이명우씨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보는 분이지만 엄마을 대신해서 꽃다발을 전해주는 뚜익씨딸

35년전 22세된 사이공 대학교 학생을 만나서 사랑을 했고 지금 뚜익은 저세상으로 가고 엄마의 학생시절과 똑같은 나이에 사이공 대학교 여학생인 뚜익 딸이 엄마의 옛 애인을 맞이하고있으니 세상에는 이런 사연도 있을까?

35년전 찍은 육군대위 사진을 들고 엄마대신 이명우 씨을 기다리고 있다가 건장한 체격의 노신사가 공항문을 나서는 순간 투익씨 딸은 어떻게 이명우 씨을 알아보았는지 꽃다발을 들고 이명우 씨에게 달려가서 돌아가신 엄마대신 꽃다발을 전해드린다.

공항에는 뚜익씨 조카 와 가족들 같이 나와서 이명우씨을 반갑게 맞이하고있다


투익씨 조카딸가족과 통역 미스쫍


비둘기 부대가 주둔 했던 디안면 지역 비둘기 부대 예하 부대가
주둔했다는 부대자리는 지금은 공동 묘지로 변하고 뚜익도 그 자리에 묻혀있다.
사진은 현제 단장중인 뚜익묘소에서 이명우씨

35년만에 수만키로을 날아왔는데 싸늘한 세멘바닥 밑에 잠들다니 믿어 지지가않는다.

11월9일 미국에서 전화 했을때 우리만나서 동커이 거리도 가보고 담샘 공원도 가보고 닌호아와 나트랑도 같이 여행하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그때 그 목소리 그것이마지막 유언이었을까?

"송금 해준 돈으로 딸 앞으로 2년 동안 대학 학비도 해결 했고 딸이 대학들어 갈때 은행에서 받은 융자도 해결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저는 이제죽어도 한이 없 습니다"

한국말로 또렷이 들러오는 전화 목소리 그날 전화가 이명우씨와 뚜익씨에 마지막 대화내용이다.

이명우씨는 한창 단장중인 뚜익 묘지를 찾아 천국에 가서라도 행복하게 살라고 우리의 이생에 인연은 여기까지가 끝인것같다. 천국에가서 다시만나자고...


뚜익이 이명우 대위을 기다리던 집에 들려 뚜익영정 앞에
35년동안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잎마춤으로 대신한다.

35년전에 뚜익과 같이 데이트을 했던 럴러이 거리와 동커이 거리을 다시한번 돌아보고 이명우씨는 한국을 거처서 12월2일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35년전 럴러이거리 뚜익과 이곳분수대 앞에서 만나서 데이트을 즐기던곳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베트남 전쟁이 만들어낸 한국군 장교와 사이공 여대생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출처 : 베트남 전쟁
글쓴이 : vietnam wa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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