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빈동의 기적
짜빈동 전투는 대한민국 해병대 6대 전첩의 하나로 꼽히는 기적 같은 승리다.
1개 중대 병력이 월맹 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기습공격을 격퇴시킨 이 전투는 월남전 사상 미군이나 월남군에는 물론 해병대에도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은 전설 같은 방어전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앞 다투어 현장에 달려온 한·미·월 고위 지휘관들과 월남의 정치 지도자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승리가 가능할 수 있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연구반까지 날아와 전투상황을 낱낱이 조사해 갔다.월맹 정규군이 청룡 11중대 진지를 기습한 것은 추라이 지역에 있던 청룡부대 포병대와 미 해병대 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시설들을 공격하려면 지형상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11중대 진지를 격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룡부대 포병대와 미 해병대 비행장을 그대로 두고는 꽝나이 성 추라이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청룡은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에 화염방사가 3문, 대전차포 6문, 경기관총 2문, 4.2인치 중박격포 1문, 75㎜ 무반동총 7정, 수류탄 350발 노획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비해 우리 측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33명뿐이었다.
한밤중에 기습을 당한 소규모 부대가 10배 이상의 적 병력을 맞아 어떻게 이런 전과를 올렸는가? 이런 의문 때문에 짜빈동 전투를 ‘월남전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짜빈동 벌판에 있었던 11중대 진지는 남북 300m, 동서 200m 규모의 나직한 벌거숭이 야산에 구축된 사주방어 진지였다. 진지는 외곽 쪽으로 뺑 둘러 교통호로 연결돼 있고, 그 바깥에는 조명 지뢰군과 단선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그 안쪽으로 5중 원형 철조망이 가설된 견고한 진지였다.
조명 지뢰군이란 지뢰에 접촉하면 조명탄도 같이 터지는 지뢰를 많이 묻어 둔 것이다. 한밤중에도 집중사격이 가능케 하기 위한 장치다. 거기에 철조망이 여섯 겹이나 둘러쳐져 있다. 곳곳에 초소가 설치되고 수색정찰·매복·청음 조 운영 등으로 경계에 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월맹군이 이 진지를 기습한 것은 1967년 2월 15일 새벽 4시 10분쯤였다. 60㎜ 박격포와 82㎜·120㎜ 중박격포 공격과 함께 3개 방면에서 동시에 기습해 왔다. 진지 동남쪽 들판 가운데는 조그만 구릉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위가 많아 적이 몸을 숨기기 적당한 지형이었다. 청룡 11중대는 그곳에 포격을 가해 후속부대 접근을 차단하면서 조명탄을 올려 진지에 접근해 오는 적에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적은 철조망을 돌파하기 위해 온갖 폭발물을 동원했다. 새벽 4시 40분 폭발력이 강력한 파괴통 폭약을 터뜨려 철조망이 날아가자, 적은 그 자리를 돌파구 삼아 물밀듯 진지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그 다음은 백병전이었다.
3소대 1분대장 배장춘 하사는 들고 있던 무전기를 버리고 “백병전이다” 하고 외치면서 교통호 위에 놓여있던 야전삽과 곡괭이를 집어 들고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가까이 있던 적들이 맥없이 쓰러져 갔다. 그것도 잠시, 그도 팔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1분대 1조장 이학현 상병은 “진지를 사수하라”고 외치면서 사격을 계속하다가 어깨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적 수명이 전방 20m 오물통으로 접근해 오는 것을 보고 달려가 수류탄으로 처치해 위기에 처했던 분대장을 구출했다.
그 순간 발목 관통상으로 주저앉은 그는 조준사격으로 분전 중인 조원 도성룡 일병을 보호해 주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악물고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들더니, 몰려드는 적병들 쪽으로 기어가 그들을 끌어안고 함께 폭사하고 말았다.
청룡을 깔보다니
“수원시(1소대) 대전시(2소대)! 여기는 서울(중대본부) 장이다. 천안시(3소대) 전방으로 일제사격을 가하라.”3소대 지역 진지 한 귀퉁이가 돌파당한 상황이 보고되자, 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1·2소대에 3소대 지원을 명했다. 자기 지역 쪽으로 달려드는 적을 격퇴시키기도 힘겨운 판에 이웃을 도우라니! 대원들은 난감했다.
그래도 해병대는 해야 한다. 윗사람 명령이면 안 되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 해병이다.상황보고를 받은 조형남 대대장은 중대장에게 침착하게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당황하지 말고 각자 위치에서 사수하라! 3대대 전통을 살려 필승의 신념으로 싸우라! 충분한 지원을 해줄 테니 안심하고 싸우라! 대대장은 중대원들의 분투를 비는 심정으로 대대의 전통을 강조했다.
대대장의 말대로 진지 바깥쪽 상공에 미군 스쿠피 한 대가 떴다. 조명등을 밝히고 공중에서 기총사격을 가하는 스쿠피 항공기는 야간전투의 총아였다. 그러나 그날 새벽은 안개가 자욱한 날씨에 비가 추적거려 조명장치가 무용지물이었다. 먼저 온 스쿠피가 돌아가고 몇 대가 더 날아왔지만 마찬가지였다.그걸 보고 적은 용기백배한 듯 호각을 불고 북을 치며 달려들었다.
“따이한 라이(오라) 라이. 청룡 라이 라이.”수적인 우세에 고무된 월맹군은 청룡을 놀리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청룡이 그렇게 만만한 부대인가. 장병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철조망이 뚫려 진지가 위협받는 곳이 늘어나자 피해도 속출했다. 이학현 상병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던 도성룡 일병도 전사하고, 윤창호·전수철·김명덕·방기장 일병은 부상을 입었다.
분대장 배하사를 2소대 지역으로 후송한 이영복 일병을 제외하고는 분대원 전원이 죽거나 다쳤다.경기관총 사수가 쓰러지면 부사수가 달려가 방아쇠를 잡았고, 그가 쓰러지면 1번 탄약수, 2번 탄약수 순으로 경기관총을 지켰다.손순태 일병은 너무 지쳐서 총을 잡을 힘조차 다 빠졌다. 달려드는 적을 껴안고 이빨로 물어 쓰러트렸다.
그러나 그 뒤로 여럿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총을 빼앗기지 않을 조치를 취했다. 번개같이 총을 분해해 총신을 사방으로 던져버리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김정동 하사는 철주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했지만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적 특공대가 들이닥쳤다. 그때 적 포탄이 아군 중박격포 탄약고에 명중해 수라장이 됐다.
피아 구별이 되지 않는 백병전 상황에서 적이 얼룩무늬 작업복을 입고 청룡인 양 행세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들은 그 위에 나뭇가지를 꽂았다. “위장복 입고 나뭇가지로 위장한 놈은 적이다. 안심하고 쏘아라!”많은 적병이 그렇게 처치당했다. 적은 진지 내에서는 이중 위장을 하지 않는 청룡의 관습을 몰랐던 것이다.
날이 밝아 특공부대가 가세하면서부터 적의 공세는 꺾이기 시작했다. 중대장 정대위는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에게 중대본부 요원 및 3소대 병력 일부로 편성한 특공대 지휘를 맡겼다.중대본부의 3.5인치 로켓포 지원 아래 특공대의 반격이 시작되고, 여단 본부가 진내사격 결정을 내려 전세는 한순간에 역전됐다.
진내사격이란 피아가 혼전 중인 진지 상공에 살상력이 강한 VT신관 탄을 쏘아 적을 격멸시키는 최후의 전법이다. 아군의 피해를 각오해야 하지만 아군이 개인호나 토끼 굴에 숨으면 엄폐물이 없는 적만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활약
짜빈동의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대급 작전에 동원될 11중대를 대신해 진지방어 임무를 맡았던 제1 대대 1중대 3소대 장병들의 역할이 없었던들 짜빈동의 기적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1중대는 바로 다음날 대대급 작전에 출동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았다.
11중대가 진지를 비우고 떠나면 그곳을 대신 방어하기 위해 1대대 3소대원들이 전날 밤 진지에 도착했었다.1대대 1중대 3소대장 정정상 소위는 소대원들을 수용할 시설이 없음을 알고 11중대 소대지역 후면 제2선 교통호 부근에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소대원들은 적정을 제일 먼저 파악할 수 있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원군이 된 셈이었다.
정소위와 11중대 부중대장 양백수 중위는 사관학교 축구부 선후배 관계여서 부대 간의 유대감도 강했다.숙영준비가 끝나자 정소위는 방어진지를 한 바퀴 돌면서 각 소대장들과 진지 인수에 관한 협의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첫 적정(敵情)은 그날 밤 11시쯤에 있었다. 적은 통로 개척조를 침투시키다가 발각돼 1명이 사살되자 퇴각하여 새벽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다음날 새벽 적이 3면에서 일제 기습을 시작했을 때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부대는 정소위 소대뿐이었다. 11중대원들은 각자 자기 책임지역 방어에 사력을 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책임지역이 없는 1소대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고전하는 11중대 소대원들을 도왔다.
“전방소대가 돌파당했다. 우리가 막지 못하면 다 죽는다.”11중대 3소대 진지가 돌파된 것을 본 정소위는 교통호를 뛰어다니면서 소대원들에게 분전을 독려했다. 교통호를 자유자재로 이동하면서 적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도 뚫린 구멍으로 몰려드는 적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들도 11중대원들과 똑같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기동성 있게 위기에 빠진 부대를 지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11중대원들과 생사를 같이한 이들은 상황 종료와 동시에 그 공로가 잊혀져 여기 특별히 기록으로 남긴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활약을 알리기 위해.
전투가 끝난 67년 2월 15일 그날부터 11중대 진지는 관광명소처럼 방문자 발길이 잦아졌다. 그날 오후 미 해병 제3상륙군사령관 웰트 중장과 한국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대장이 취재진과 함께 진지에 날아왔다. 교통호 안에 차곡차곡 쓰러져 죽은 적의 시체 더미와 진지 바깥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시체 무더기를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16일에는 월남군 최고사령부 참모부장과 주월한국군사령부(주월사) 작전참모 및 UPI 기자들이 찾아왔고, 17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가 김성은 국방장관과 신상철 주월대사를 대동하고 달려왔다. 21일에는 월남 국가원수 티우 중장과 키 수상이 찾아왔고 월남군과 미군은 연구반까지 파견했다.
“청룡부대 장병들은 육박전 때 두 손가락으로 상대 갈빗대도 부러뜨린다던데 정말입니까?” 키 월남 수상은 브리핑을 받은 뒤 항간의 소문이 궁금했던지 이런 질문을 했다.“갈빗대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것도 뽑습니다.”브리핑 장교는 한껏 고무돼 한 걸음 더 나가는 답변을 했다.
주월사 보도실 브리핑 때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브리핑 장교가 한국군은 손가락으로 ‘그보다 더한’ 것도 뽑는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주월사 고위 지휘관이 언짢아했지만 김성은 장관은 오히려 두둔했다는 소문이 났다. 정리=문창재 언론인
사진설명 ①짜빈동 전투의 영웅 정경진 대위. ②월남 전선에서의 미 제3해병원정군사령관 콜린스(오른쪽) 장군과 공정식 해병대사령관. ③공정식(오른쪽) 해병대사령관이 청룡부대장 이봉출 장군을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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