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명찰 Viet nam veterans

[스크랩] 월남참전용사 권익포럼/ 연구발표요지

마블마운틴 2012. 8. 23. 08:38

  

월남전쟁 개요

 

1955~1975년까지 공산국가인 북월맹과 자유우방인 남월남간의 내전에 미국이 주변 라오스,캄보디아,태국 등으로의 도미노현상을 우려하고 있던차 1964년 8월 통킹만공해상에서 미국 군함이 북월맹의 공격을 받자 이를 빌미로 북월맹에 대한 보복폭격 등 본격적인 군사개입으로 확전된 전쟁임.

월남전은 자유월남정부와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군과 태국,오스트리아,호주,필립핀 등 연합군이 참전했으며 한국은 약32만명 파병에 1만5천여명의 전상자를 냈고 미국은 55만 3천명 파병에 5만 8천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2.4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들이고도 공산월맹의 승리로 막을 내렸음.

 

패망원인은 월맹군과 민족해방전선(베트공)의 게릴라 전술의 성공과 월남 지도층의 부정부패 그리고 공산월맹을 지지하는 정치,언론,종교계 등의 반전시위와 오랜 식민지를 경험한 월남인들에게 민족공조로 자주적 통일을 이룩하자는 베트공들의 교묘한 모략전술과 이간책으로 월남국민들의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한편으로 파리협상을 정략적으로 이용 1973년 미군 및 한국 등 연합군을 철수 시키고 1975년 4월 30일 자유월남정부의 항복선언을 받아냈다.

 

한국군의 파병배경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미국의 요청과 당시 한국내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제반 요인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볼수 있다. 1964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월남에서의 전황이 예상외로 어렵게 되자 한국을 포함하여 25개 자유우방국에 월남전 지원요청 서한을 보낸 것이다. 당시 5.16 혁명후 박정희 정부가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경제 및 군사원조가 절실했던 시기로 과거 한국동란시 연합국에 진 빚에 대한 명분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동남아 전략속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으로 얻은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만일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주한 미군 2개 사단이 월남전에 투입 될 것임으로 한국방어의 공백은 물론 한.미동맹의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외도 가시적인 성과는

① 군원 이관을 중지케 하고  ② 군사원조로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와 ③ 3개 예비사단을 전투사단으로 개편 하였고  

④ 군수관련공장 증설과 ⑤ 한국군의 현대전 경험 축적 등을 들수있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일지

 

  1664.9.22 : 제1차로 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 파병

  1965.3.16 : 비들기부대(육군.해병공병 건설지원단) 파병.

  1965.10.14 : 청용부대(제2해병여단) 캄란파병

  1965.10.20 : 주월 한국군 사령부 사이공에 개소

  1965.11.2 : 맹호부대(수도사단 1연대) 본대 퀴논파병

  1966.4.19 : 맹호부대(26,연대 등) 한.미브라운각서 교환후 전투부대 추가파병

  1966.6.1 : 십자성부대(100군수사령부) 파병.

  1966.10.3 : 백마부대(제9사단) 닌호아 및 캄란파병

  1967.8.20 : 청용지원부대 증파. 해병여단을 사단으로 개편

  1973.3.13 : 주월 한국군(맹호,백마사단 등) 철군완료

  1973.3.20 : 주월 한국군 개선 환영대회(서울운동장)

 

 

브라운각서란 : 1966년 3월 미국정부가 한국군 전투사단의 월남 추가파병을 요구 해 옴으로서 우리정부가 그 전제조건으로 요구한 양해사항을 당시 브라운 주한 미 대사를 통해 한국정부에 전달한 미국정부의 공식문서다.

한국은 1964년 비전투부대 파병에 이어 1965년 10월 국군 맹호사단 본대를 월남에 파견 했으나 월남정부는 전세가 불리 해 지자 미국을 통해 추가 파병을 요청 하였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추가 파병에 따르는 국가안보에 대한 담보와 경제원조 등 선행조건을 미국정부에 제시했고 미국은 이에 대한 보장과 약속을 각서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통고 해온 것이다.

 

   군사원조

1.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수년동안 상당량의 장비를 제공한다.

2. 베트남 추가 파병에 따른 소요경비와 병력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제공한다.

3. 한국에서 추가병력 훈련 및 소요재정을 부담한다.

4. 한국군의 대간첩 활동을 위한 필요한 요구가 있을시 이를 지원한다.

5. 한국군의 탄약소요 증가에 따른 병기창 확장시설을 지원한다.

6. 베트남 주둔부대와 서울, 사이공 정부와의 통신망을 확충한다.

7. 한국군 작전을 위해 C-54 대형 수송기 4대를 지원한다.

8. 한국군의 막사,취사,오락실 등 부대 복지시설 개선을 위해 잉여물자를 제공한다.

 9. 한국군 처우개선을 위해 1966. 3. 4일 비치 유엔군 사령관과 김성은 국방장관이 합의한 비율에 따라

 미국이 한국군의 해외근무수당을 부담한다.

10. 전,사상자는 한.미합동군사위서 합의한 액수의 2배를 보상금으로 지급한다.

 

   경제원조

1. 한국군 1개 사단과 1개 예비여단 편성에 소요되는 예산을 방출한다.

2. 한국군 파월 기간중 군원이관을 중지한다.

3. 파월 한국군에 필요한 보급물자, 용역 등 을 한국에서 발주한다.

4. 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해 기술협력을 강화한다.

5. 현재 지원중인 1억 5천만$ AID차관외 한국의 경제발전을 돕기위해 추가로 1억 5 천만$을 제공한다.

6. 베트남 수출지원을 위해 1천5백만$의 프로그램을 제공한

 

                      파월장병 해외근무전투수당 문제점 제기

 

 

1) 박정희 정부는 1965년~1973년까지 8년동안 약32만 여명을 월남전에 파병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한국군 해외근무수당을 대통령령 제1895호 규정에 의거 아래와 같이 지급 하였음 (1968년도 환율 : 1$=272,55원

 

일병 : 40.5 | 상병 : 45 | 병장 : 54 | 하사 : 57 | 중사 : 60 | 상사 : 75 |

준위 : 105 | 소위 : 120 | 중위 : 135 | 대위 : 150 |

소령 : 165 | 중령 : 180 | 대령 : 195 | 준장 : 210 | 소장 : 240 |중장 : 300|

 

2) 1975년 종전후 국내는 물론 미주 등에 거주하는 파월 장병들이 월남전 참전당시 해외근무수당이 미군 및 연합국이었던 호주나 필립핀,태국군에 비해 20%수준 이었음을 지적하고 정부에 진상조사 청원서를 내자 2005년 5월 국방부가 브라운각서 등 몇가지 근거를 들어 파월장병 수당은 적법하게 지불됐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음에도 전투수당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고있음.

 

1) 국방부 발표의 오류

브라운각서 제9항(한국군 파월장병 대우)에 비취 유엔군사령관과 김성은 국방부장관과 합의 했다는 계급별 해외근무수당에 대한 지급세항 영문원안이 없는 상태(은닉 또는 파기추정)에서 당시 대통령령 제1895호에 의거 지급된 위 해외근무수당이 마치 해외근무수당+전투수당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

 

한국군의 베트남참전에 관한 <국방정책연구> 자료에 의하면 서울대 박태균 역사학교수는 2005년 외무부와 국방부가 발표한 문서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월남파병 군인들의 월급 및 수당은 얼마를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다며 다른 국방부 자료를 보면 한국군의 월급과 전투수당 등이 미국과 호주를 제외 하고는 아시아 참전국인 태국과 필립핀과 비교 할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며 전상자에 대한 우리정부의 요구도 미국정부가 상당한 정도로 보상금을 인상 해 줬다고 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목숨바처 피를 흘린 대가성 문제는 참전명분에 타격을 줄수 있음으로 현재 하나의 신화로 묻혀가고 있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2) 이면계약 가능성

1975년 미 육군성이 발간하는<월남참전 동맹국에 대한 연구>논문을 보면 1965년 6월23일 김성은 국방장관이 증파에 따른 국회동의를 앞두고 주한 유엔군사령관 비치장군에게 파병조건으로 제시한 10개항 중 8항임.

 

(Provision of financial suport to Korean units and individual in Vietnam,

including combat duty pay at the same rate as paid to US personnel.---)

 

註) 파병되는 한국군 장병들에게 미군에 지불되는 동일수준의 전투수당을 지불하고

전상자의 보상금과 현지 월남 고용인의 급료도 미국이 지불한다.

위와같은 근거자료로 보아 최종적으로 합의할시 어느정도 조정 되었음을 감안 한다 하더라도 연합군의 20%수준은 턱없이 적은 액수로 박정희=김성은, 비치장군=김성은 장관 사이에 이면계(밀)약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박정희 영도력<베트남 파병은 한국과학기술의 기초>책자에도 월남파병장병의 해외근무수당 가운데 일부가 이면계약을 통해 전용댔다는 의혹이 있다고 했다.

 

3) 정부가 전투수당 유용

2012년 4월 18일 한국군 2대 주월사령관이 었던 이세호 대장(예)은 서초동 전자랜지 강당에서 있은 안보강연에서 월남파병 해외근무수당에 대해서 언급 하면서 정부가 미국측으로부터 병장기준 500$을 받아서 1/10인 50$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국고에 귀속하여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국가기간산업 확충을 위해 썼다고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보고 1968년 2월 착공하여 1970년 7월, 2년 5개월만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대의 역사로 그동안 국가 기간산업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사비 430억으로 월남파병 대가로 받은 미국의 원조, 그리고 월남특수 및 파월장병 해외근무수당 유입으로 충당했다. <국토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현재 경부고속도로의 국가경제영향은 연간 139조 2천억으로 평가 된다고 한다.

 

4) 천문학적 군사,경제적 효과

한편 1964년~1973년까지 약 8년동안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함으로서 얻은 ①미국의 군사원조는 약 17억$로 한국의 국방비 지출을 경감케 하였고 ②월남수출확대 급증과 ③물자수송 및 용역 등 전쟁특수로 12억 ④국내기업과 근로자의 월남진출에 따른 효과 등을 계산할 경우 총 외화수입은 대략 50억$로 추정했다. 당시 이 액수(5조)는 5천년 역사상 월남전 참전으로 얻은 조국 근대화에 기여한 천문학적 자산으로 이라고 했다 <채명신사령관 회고록:베트남전쟁과 나>

 

 

                                                  

                                            우리의 결의사항

 

1) 역대정부가 파월장병들의 공과를 과소평가 내지 홀대하고 있다.

우리는 월남전 참전유공자의 명예수당을 4.19 유공수당 및 국회의원 퇴직연금

120만의 50%인 60만원~향후120만원(호주월남파병군의 50%)

인상을 요구한다.

 

 

2) 월남참전권익위에서 제출한 청원서에 의거 청와대, 국민권익위원회, 국회국방위원장,

국방부장관, 국가보훈처장은 상식처럼 퍼저있는 전투수당 전용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한다.

 

 

3) 월남참전자회와 공동으로 단체소송을 위한 300만 파월가족 서명운동을 전개 할것이며

신문 및 인터넷 광고 및 거리투쟁 등으로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전국민에게 확산

실추된 명예와 자존심을 되찾는다.

 

 

4) 금년 대통령 선거를 기회로 32만 파월장병 및 그 가족(300만)등 유권자의 표심으로

                    파월장병 명예수당의 획기적인 인상과 역대정권이 유기한

                                정당한 전투수당 보상을 위해 투쟁한다.

 

 

5) 파월장병 전투수당 미지급 논란에 관계없이 월남참전과 고귀한 희생의 댓가로

             국가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만큼 어떤 형태로든

                              보상 해 주는 것이 마땅 하다고 본다.

 

 

                                             2012년 8월 22일

 

                    안중근의사숭모회/기념관 연구위원/홍보대사  최  명  재

 

 

 

출처 : 自我實現, self-realization
글쓴이 : 대한국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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