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동을 한바퀴 돌고 현저동으로 향합니다. 서대문역사공원 뒤쪽으로 동네가 보입니다. 대로를 건너가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을 보니 인왕산이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왕산을 마주보는 동네군요. 현저동은.
동네로 점점 가까이갈수록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꽃분홍 잎사귀도 보이고 초록빛으로 너울거리지만 왠지 회색빛 집들이 생동감을 잃은 듯 보였습니다. 현저동은 이미 재개발이 시작된 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발이 멈추어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낡고 퇴색한 빈 집들이 입을 벌리고 나자빠진 모양새였습니다. 사람이 살았다면 이렇게 흉물이 되지는 않았겠지요.
저 오래된 집들에서 얼마나 많은 달콤한 삶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남기고 간 살림살이의 흔적이 왠지 가슴에 남습니다. 미쳐 가지가지 못한 것들, 기탄없이 털어버리고 간 오래된 것들이 뒤섞여 잉잉거리는 것 같습니다.
큰 골목 가의 몇몇 집들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골목에는 조합과 재개발업체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담은 메시지들이 바람따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길을 걷고 있었지만 고요하기 짝이 없는 동네는 이미 삶을 잃어버린 듯했습니다. 현저동의 풍경이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책에서 전쟁을 맞은 서울의 풍경을 서술하면서 폐허의 곳곳을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폐허는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 도시 곳곳에 이런 폐허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전쟁 때는 공습으로 살던 집을 잃고, 지금은 대기업의 포크래인 아래서 살던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이 적층되지 않고 계속 부서지고 무너지는 상황을 볼 때마다 우리는 폐허를 힘겹게 디디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고 풀이 자라고 초록이 일렁입니다. 희고 작은 꽃들이 회색의 폐허를 덮어줍니다.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꽃과 풀들은 회색의 틈을 메우며 삶을 잃은 집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나도 위로를 받습니다. 괴불마당집에 일렁이는 꽃들도 이랬겠지요.
녹진한 삶을 위로하며 그렇게 피어났겠지요.
이글은 2013.08.05 19:23 에 sweet-workroom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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