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debeloper

경복궁 들어설 뻔한 안산 자락엔 ‘어린 박완서’의 추억이…

마블마운틴 2018. 12. 20. 12:18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결혼한 후 서울 용산구 청파동과 마포의 작은 집에 살다 아이가 크자 이사를 하기로 했다. 집과 일터는 가까워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아이의 학교와 내 직장과 멀지 않은 곳을 찾아 헤매다 만난 곳이 독립문 일대다. 

첫인상은 어렸을 때 살던 지방 변두리 같았다. 큰길에는 낡고 우중충한 건물들이 서있었고 뒷길에는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나 싶게 비좁은 골목에 개량 한옥이 들어차 있었다. 바로 앞이 광화문이고 시청인데 1970∼80년대 정서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니 신기했다. 어쨌거나 결정적으로 집값이 쌌기에 이곳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 뒤 간혹 동네가 옛 모습을 간직하는 건 사직터널에서 금화터널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고가도로 아래 동네들은 그 옛날 기찻길 옆처럼 후미져 보이니까. 선거철이면 가끔 ‘고가 철거’를 공약으로 내거는 이들이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여전히 독립문 고가도로에는 쉼 없이 차들이 지나간다.

이곳에 터를 잡고 나서 한동안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른바 ‘뜨는 동네’가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동네에 정 붙이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곳의 진면목을 발견했다. 토박이들이 건넨 첫 질문은 “안산에 가봤어요?”였다. 요즘은 내가 먼저 안산 자랑을 늘어놓지만 사실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니다. 하지만 제법 역사성이 있다. 이성계가 도읍지로 마음에 둔 세 곳 중 하나가 바로 안산자락이었다. 이성계는 안산(무악산 혹은 길마재라고 불렀다)의 남쪽 기슭(지금 연세대가 자리 잡은 곳), 충남 계룡산, 종로의 인왕산과 북악산을 주산으로 염두에 두었다. 비록 왕궁이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산 아래에 사는 즐거움은 살아본 사람만이 안다.

안산은 해발 296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고. 중턱부터 등산로가 시작되는 터라 아파트 뒷길로 가로지르면 불과 30여 분 만에 정상인 봉수대에 닿는다. 산자락에 대학, 아파트, 도서관, 관공서를 거느린 야트막한 도심 속 산이지만 막상 올라가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울울창창하고 샘이 많다. 독립문에 살기 시작한 후 종종 안산에 오른다. 사람들에게 업신여김 받은 날도 울화통이 터지는 날도 냅다 산길을 걸어 봉수대까지 간다. 바람을 맞으며 한참 서울 시내를 굽어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풀린다. 사람의 발걸음이 잦은 산이라 샛길과 갈림길이 많지만 어디로 가든 서대문구청이나 봉원사, 연대가 나올 터이니 겁날 것도 없다. 

안산에 재미를 붙여 다니다 보니 좋아하는 풍경이 자꾸 늘어났다. 봄이면 서대문구청 쪽에서 올라가 흐드러진 밤 벚꽃을 구경한다. 5월의 밤이면 안산의 아카시아 꽃향기가 아파트 앞마당까지 내려와 황홀경을 자아낸다. 숲이 무성해지면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오솔길에 멈추어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는 순간도 각별했다. 

안산 자락에 있는 봉원사는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함께 다녔던 절이다. 태고종의 총본산이라거나 절 아래 사하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다녔다. 시어머니가 건강하실 때는 일 년에 서너 번, 그 후로는 초파일에만 겨우 한 번 갔는데, 요양원에 가신 후로는 그것마저도 어려웠다. 봉원사 명부전에서 49재 불공을 드렸으니 마지막 길에 한 번 더 가신 셈이려나.  

나는 서울 어디서든 택시를 타면 “독립문으로 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확한 행정구역은 서대문구 현저동이다. 내가 현저동에 산다는 걸 으스대기 시작한 건, 소설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읽은 후부터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기집애도 가르쳐야겠어요”라고 시부모에게 대들 듯 말한 뒤 어린 완서를 서울로 데려오는데, 그때 살았던 곳이 현저동이다. 박완서의 어머니는 성 밖 동네인 이곳 현저동을 ‘문밖 동네’이자 ‘상것들이 사는 곳’으로 여기며 출세해서 ‘문안 동네’로 가길 학수고대했지만, 처음 말뚝을 박았던 현저동 집을 끝내 잊지 못했다. 

1997년 작가 박완서 선생은 현저동 일대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선생의 모습에 얼마나 감회에 젖었는지 모른다. 재개발을 하더라도 선생이 살던 집은 좀 남겨뒀으면 좋았을 텐데. 요즘도 소설을 들추며 어린 완서가 살았던 곳이 어디쯤일까 헤아려 보곤 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독립문 일대는 도성과 가까운 데다 험준한 무악재를 넘어온 사람들이 쉬고 묵을 곳이 필요했으니 일찌감치 마을과 시장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완서와 가족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도성 밖에 살며 도성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리라. 그래서인가 지금도 이곳은 시내에 직장이 있는 이들이 살기 좋은 곳이다. 

어린 완서가 살았고 지금 내가 사는 안산 자락은 무악재를 통해 인왕산과 이어진다. 무악재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문산을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에 닿는다. 지금은 통일로라 불리는 이 길은 예전부터 있던 주요한 길 중 하나로 중국의 사신들도, 한양의 관리들도 이 길을 통해 중국과 한양을 오갔다. 그래서 이 길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영은문과 모화각을 세웠는데, 1896년 서재필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건설된 고가도로 때문에 독립문은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북서쪽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곳이 과거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지금의 독립공원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경성 감옥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생겨난 뒤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1987년 시흥으로 옮겨간 후 서대문형무소의 일부가 문화유산으로 보존돼 공원이 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겪은 곳이지만 지금은 삼일절을 제외하고는 그저 시민들이 한때를 즐기는 한적한 공원이다. 견학 온 학생들, 하루를 소일하는 노인들, 가끔 영화 촬영을 하는 사람들도 드나든다. 이사 와서 한번 형무소역사관을 돌아본 후로는 그저 창을 통해 독립공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길 즐긴다. 인간사와 무관하게 독립공원에 계절이 오고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독립문 근처에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또 하나 있다.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딸을 기리기 위해 그 아버지가 지어 서대문구에 기증한 도서관이다. 공공도서관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지역도서관이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깨우쳐 준 곳이다. 집에서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으니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른다. 쉬엄쉬엄 책을 읽기도,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독립공원과 인왕산을 그저 바라만 봐도 좋다. 


독립문 일대는 도심에서 가깝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만 다니던 안산에 자락길이 만들어지면서 사람들이 북적댄다. 영천시장 건너편 교남동 일대는 재개발이 시작됐다.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교남동 골목길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허허벌판이 된 교남동 재개발 터를 오가며 들여다보다 이런 생각을 한다. ‘앞으로 이 동네에 어떤 일이 펼쳐질까…. 그래도 안산과 인왕산은 그 자리에 여전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