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붐을 타고 탄생한 재벌
1966년 3월 월남진출 제 1호로 한진(韓進)상사가 '퀴논' 소재 월남미군병참부와 연간 800만달러에 달하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항만하역 및 수송 용역계약을 맺게 되었다. 기술자 3백명이 현지로 떠났다.
그 후 대한통운(大韓通運), 경남기업(京南企業), 공영건업(共榮建業), 동진기업(東進企業), 한양건설(漢陽建設), 대림건설(大林建設), 삼환기업(三換企業), 현대건설(現代建設) 등 국내업자들이 속속 진출하게 되었다.
굵직한 건설 혹은 용역 이외에도 세탁, 군복수리 및 자수, 사진현상, 그리고 군위문을 위한 연예단 진출까지 진출업종도 매우 다채로웠다. 이러한 월남붐은 그 후 국내재계의 판도마저 바꾸어 놓아 일찍 월남에 진출한 업체는 제일 먼저 현지에 나갔다는 단하나의 이유만으로 새로운 재벌로 부상했다. 월남전으로 재벌이 탄생하게 되는 대목이다. 월남붐을 타고 이룩된 한진의 신화는 만일 다른 A라는 사람이 먼저 갔다면 월남의 신화는 한진의 신화가 아니고 A라는 사람의 신화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월남붐은 우리나라 경제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외진출 이었다. 60년대의 고도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후 약 3∼4년 뒤에 그보다 더 규모가 큰 중동진출을 위한 사전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아주 크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능력이 모자랐던 시대이다.
좀 특수한 물건을 팔아야 했는데 일반상품은 1966년 4월에 단행된 BA정책(Buy American Policy : 미국상품 우선 구입정책)과 SA정책(Ship American Policy : 미 國籍船 우선 사용정책)에 묶여 우리나라 상품수출은 별 재미를 못본 것이다. 6만이라는 군인을 파견했는데도 팔 물건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 기술자가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그것도 적도 밑, 폭염 속에서 흘린 땀값, 즉 인건비만 챙긴 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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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당시 상공부에서는 수출통계를 작성할 때는 "입금베이스"라고 해서 입금한 것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결재기준과는 차이가 난다. 한국은행 통계에 의하면 연도별 월남에 대한 무역 외 특수(特需) 수입은 66년에 6,049만 달러, 67년 1억 3,497만 달러, 68년 1억 6,556만 달러, 69년 1억 5,886만 달러, 70년에는 1억 5,185만 달러에 달해 66년부터 70년까지 5년간 6억 5천만 달러를 상회했다. 68년이 최고 액수인데, 68년의 월남 특수는 우리나라 총수출의 36%에 달했다.)
우리나라는 70년에 대망의 10억 달러를 수출했는데 월남특수가 큰 몫을 했다
월남이라는 무대에 등장한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남자였다.
연령층으로는 20대가 주가 된다. 현역 군인이 아니면 군을 갓 제대한 기술자들이었다. 모두 군의 경험을 갖고 있는 젊은 한국 청년이었다는 뜻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농촌 인구가 많을 때이니 자연히 농촌 출신자가 주류가 되었고, 학력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정도였다.
거의 전부가 외국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자기 자신을 외국인과 비교해서 생각해 본 경험도 없었다. 모두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다. 연인원으로 쳐서 30~40만 명의 한국 청년이 한꺼번에 외국에 가게 된 것이다. 이들은 외국에서 몸소 경험을 하고 미국인, 월남인들과 비교하고 각자 나름대로 느끼고 귀국한 후 자기 소감을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들 청년들은 전국 각처에서 골고루 차출되어 월남 경험을 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행해진 전국 규모의 대규모 해외연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의 가치관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외국과의 교류를 시작한 것이다.「한국인의 국제화」의 출발점이다.
이들 파월 장병 중에는 월남 현지에서 제대하고 월남에 남아서 외국 기업이나 한국 기업에 취직한 사람도 많이 생겨났다. 월남에 갔던 일부 사람은 외국말을 배워가며 장사를 시작했는데, 해외진출의 꿈을 갖게 된 사람도 생겨났다.
소위 인터내셔널 세일즈맨의 탄생이다. 이들은 동남아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뻗어나갔다.
연예인도 진출했는데, 노래나 춤에도 소질이 있어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인의 여러 가지 소질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회사들도 한국 인력을 활용하면 해외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월남에 진출했던 건설회사들은 동남아로 활동무대를 넓혔으며,
수년 후 제1차 석유위기가 발생하자 중동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월남 파병이야말로 「한국인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국인은 비로소 한국인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반만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보다 우수하다는 자부심과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다른 나라 사람과 경쟁하는 데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이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고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 월남파병의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한국 남성에게는 뜻깊은 의미를 가지는 계기였다. 한국 남아가 비록 「단순기능직 노무자」일 망정 처음으로 일자리를 찾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즉, 한국 남성이 비로소 인력자원, 근로인력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
[출처] 월남 파병을 통한 한국인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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