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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트남 전쟁/한국군

마블마운틴 2013. 6. 14. 08:22

 

베트남 전쟁/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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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사실 그 이전에...
3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4 한국군의 활약
5 파월 자체의 정당성 논란
6 파월 한국군의 현지 활동의 정당성
7 양심 논란
8 용병 논란
8.1 용병인가?
8.1.1 옳다고 보는 시각
8.1.2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
8.1.3 용병이라는 표현이 과연 모욕인가?
9 학살 문제
10 그 밖에
11 주요 전투 기록
12 라이따이한 문제
13 국제사회의 이미지
14 포로?
15 과장된 한국군?
16 월남전 한국군 외신보도
17 관련 인물

1 개요

베트남 전쟁대한민국과도 연관이 많은데, 당시 전투 병력이 모자라게 된 미군주한미군 제7사단을 빼내서 베트남으로 보냈고, 곧 이어 2사단마저도 빼내서 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이 빠져나가 전력에 공백이 생기면 북한의 침공이 벌어질까 두려워 하게 되었고, 미군 측에 먼저 '우리가 너네 대신 병력 보내줄게!'라고 제안을 하게 되는데, 미국이 결국 이를 승락하여 우리나라도 수도사단(맹호부대), 해병 2여단(청룡부대)의 전투 병력을 보내고, 뒤이어 9사단(백마부대)을 파견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측에 '우리가 잘 싸우려면 너네가 돈도 잘 주고 장비를 잘 지원해 줘야 함!' 이라고 요구를 하여 군 현대화와 더불어 경제 지원을 약속받게 되는데, 이때 받은 어마어마한 물량의 장비와 자금이 대한민국 국군 장비의 현대화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것도 그냥 원동력 수준이 아니라, 60년대에는 공장이 없어서 군인들 전투복도 제대로 못만들고 지급 못하던 한국, 고속도로 하나 없고 가발공장에서 만드는 가발이 수출 1등공신이던 한국이 70년대에 들어서면 제대로 산업다운 산업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의 뒷면에서는 한국 장병들의 피가 한 몫을 한 것이다.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으며, 비슷한 경제사정이었던 태국군보다도 낮았다. #. 한국군의 전과는 괜찮은 편이지만, 미군측으로 참전한 다른 연합국(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군들도 대체로 비슷한 평가(잘싸운다)를 받았다. 이는 남베트남군이 워낙 막장이고, 미군의 사기가 워낙 낮아서 참전 외국군들이 상대적으로 돋보인 탓도 크다.

2 사실 그 이전에...

사실 '베트남전'이라고 하면 모두 북베트남 vs 미국 + 남베트남(+ 한국군 + ...)의 전황이 이루어졌던 2차 인도차이나 전쟁만을 생각하지만,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벌어진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한국에서 참전하려는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1954년 1월 막 6.25 전쟁을 마친 이승만 정권은 1개 사단을 파병할 의사를 보였는데, 이는 이승만 정권에서 제시한 명분처럼 '6.25 전쟁 해외 파병에 대한 보답'뿐만 아니라 해외 파병을 통해 6.25 전쟁 이후 국군의 위상을 살리고 미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남한에 주한미군 체제를 구축하고 대규모의 무상 지원을 하는 와중에 한국 군대를 해외 파병하도록 할 경우 여론의 반대가 일어날 것을 의식한 미국이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1954년 6월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가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공산권의 세력이 뚜렷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리잡는 쪽으로 흘러가자 미국은 이승만 정권과 협의해 한국군 3개 사단의 파병을 고려했다. 하지만 식민지 문제의 당사국인 프랑스 측에서 이를 거부해 한국군의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

3 파병 당시의 사정과 명분

당시 미국이 단순히 전황이 안 좋아서 주한미군을 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게 모조리 외면을 받았기에 한국을 압박해서 동맹군을 뜯어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 중에는 미국의 압박을 받은 만큼 그 당시의 한국 입장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파병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는 그 당시 대통령박정희가 자신의 정권을 미국에게 인정받기 위해 장병들을 팔아먹었다음모론도 있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미 박정희의 쿠데타가 끝나고 군인에서 물러나고 난 뒤에 대통령 국민 선거로 정식 대통령으로 부임한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지지도에 의심이 가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측에 먼저 파병 '제안'을 했다는 말은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이전에 베트남 공화국의 시궁창스러운 실상을 알지 못한 그 당시 국민들에게 파병에 대한 명분은 충분했다. 남베트남은 어쨌거나 냉전기에 한국과 같이 반공을 표방하던 나라였고, 또한 당시의 남베트남 정부는 대한민국과 국교도 제대로 맺고, 대사관도 서로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동남아에 "태극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라, 외교관계 있는 동맹국에 원군을 보낸 것이다.

거기다 불과 10여년 전에 북한의 공격 때문에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릴 뻔 하다 유엔군의 도움 때문에 겨우 살아난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베트남을 북베트남 도당(…)에게 핍박당하는 선량한 민주주의자로 봤을게 뻔하다. 10여년 전에 자신들 스스로가 북한에게 당해봤으니 안 그러면 이상하지. 이래서 '미국이 우리를 한국전쟁때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도 미국을 도와주자', 또는 '이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를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지켜주자!'라는 주장이 돌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많다. 저건 어디까지나 명분이지, 결국 한국도 콩고물 먹고자 한 짓이라는 것. 실제로 미군이 쓰다버린 탄피도 한국군이 죄다 주워갔다는 미군 측 기록을 봐도. 그리고 당시 생존해있던 독립운동가 박순천은 베트남에 가서 한국군을 칭송하면서 "이 땅이 우리땅이라면 얼마나 좋겠냐, 아니 이번 기회에 잘하면 한국이 차지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말을 하여 문제를 남겼지만 당시는 별다른 문제시되지 않았고 보수적인 정치가들도 매우 공감하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민주당 창단에 이바지하던 그녀조차도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당시 한국에서 베트남을 어찌 여겼는지 알법하다. 죄다 한국의 파병을 정당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

결론적으로, 미군은 베트남전 와중 한국군의 참전에도 주한미군 병력을 빼서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4 한국군의 활약

당시 한국군의 활약은 꽤나 인상적인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한국군이 그냥 잘 싸운건 아니다. 초기 파월 병력 대부분은 각 사단에서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으로 뽑아서 파월사단 병력과 교체시키는 식으로 전투력 강화에 힘썼고, 부사관100%, 중대장급 이상 장교 90% 가량을 한국전쟁 경험자로 배치시킨 상태였기 때문. 게다가 파병군 사령관인 채명신 중장은 아예 한국전쟁 당시 북한땅에서 게릴라전 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해서 간데다, 공교롭게도 불교 문화나 남북이 갈라져 싸운다는 전쟁 양상도 많이 닮았다. 채명신 장군의 경험에 의해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로 인해 전투병으로서의 명성보다도 이 분야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1]. 주로 싸운 대상인 베트콩들은 게릴라들이었고 이건 대 게릴라전의 기본 전략 중 하나다. 전공이 높은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3,364명, 식량1만9,640톤, 의류 46만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 공연 2,304회 등 평정사업과 동시에 많은 대민 사업을 펼쳤다.

무기 면에서도, 원래는 뒤떨어지는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던 한국군이,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과 다른 미군 병기로 무장했기에 화력 면에서도 미군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싸우는 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등의 임무가 많았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이라는 점에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보면 두코 전투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시키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안케페스 전투나 짜빈박 전투 등 월맹 정규군(북베트남군)과 여러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서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풍부하다.

정리하자면,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다.

여하튼, '짜빈동 전투'만큼은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 자세한 전투 경과를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5 파월 자체의 정당성 논란

미국의 명분없는 침략 전쟁에 파병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얘초 미군의 베트남전 참전 명분이 되었던 통킹 만 사건이 2차 공세에 한해서 조작으로 판명된 시점에서 확실히 명분없는 '침략' 전쟁은 아니지만 명분없는 '전쟁'은 맞다.

미군 특수부대가 소규모 월경작전을 벌인 적은 있지만,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을 제외하면 미군이나, 한국군의 지상군이 북베트남 영토에 직접 진격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이 논리로라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얘초에 악랄한 식민지배로 원성을 사던 프랑스의 베트남 재식민화를 마치 지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확실히 미국이다. 북베트남 영토에 진격한 적이 없으니 미군은 방어만 했다 - 그러므로 이건 전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어전쟁이다라는 논리가 성립하려면 얘초에 프랑스를 지원해서 핵협박까지 준비하던 것과 통킹만 사건에서 베트남군의 1차 공격 구실이 된 불법적인 34-A 작전을 지원하면서 베트남 해안에 대한 불법침입과 정찰을 한 것, 더구나 통킹만 이후에 국제법을 무시하고 선전포고도 하지않고 미국 상/하원의 동의도 없이 Pierce Arrow 작전으로 베트남 폭격을 시작한 것 등을 고려해 보자. 이런데도 굳이 '영토를 직접 침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면죄부가 될까?

공세를 펼친건 죄다 북베트남군과 남쪽에서 양산된 게릴라가 일방적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식. 게다가 폭격 자체도 북베트남의 공세를 중단시키고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정치적 고려로 결정된 폭격제한구역의 설정 등으로 흔히 생각하는 무차별 폭격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 단,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폭격이 상당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차별 폭격이 아니라고 해도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폭격피해는 분명히 발생하였다.

혹자는 당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독재적 성향을 한국군 나아가 미군 참전의 부당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조금 복잡한 문제다.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과 그걸 근거로 전쟁을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정당성 없는 전쟁에 파병되었다'라며 파월한국군 장병들을 비난하는 엉뚱한 사람들도 있는데, 명분없는 전쟁 개입결정에 대한 책임은 결정권자, 즉 당시의 행정부와 의회에 귀속되는 것이지, 군이 자의적으로 혹은 정상적인 국가의 의사결정과정을 거슬러[2] 그 개입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이상은 군에 귀속될 성격의 것이 전혀 아니다.[3] 하물며 장병 개개인을 대상으로야...

또한 일부러 정당성 없는 전쟁에 몰아넣었다면 그 책임은 해당 정치가들에게 있을 것이다. 물론 군인 개개인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정당성 없는 전쟁에 군인들이 가도록 방조한 책임도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게 어느정도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 전체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거기 간 군인들만 죄인으로 몰아세우는건 오히려 책임 전가 및 회피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것을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한국군에게 묻는 행위는 번지수가 틀렸다. 오히려 정말로 베트남전에 정당성이 없었다면, '정당성 없는 전쟁에 가서 싸운 장병'은 피해자로 분류되는 것이 맞고, 그걸 오판했거나 알고도 행하도록 지시한 자는 애꿎은 장병들을 오판/사탕발림/강요로 일부러 정당성 없는 전쟁에 몰아넣은 역적인 셈. 당연히 그 책임은 군이 아니라 그 당시의 정책을 좌우하던 자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쪽은 정치의 문제지 군대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국군 파병은 남 베트남의 요청을 받아서 이뤄졌다는데서 정당성이 없는건 아니다. 따라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것을 결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한국군에게 묻는 행위는 번지수가 틀렸다.

즉 군인들은 말 그대로 군인들의 가장 중요한 수칙중 하나인 상관의 명령의 준수를 훌륭히 이행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정당성 없는 전쟁의 책임은 그분들을 전쟁터로 몰아놓은 정치인들, 그중에서도 그 파병안을 최종결정한 그 당시의 대통령에게 묻는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베트남 전쟁에서 산화하신 전사자분들 그리고 상이군인분들에게 정당성 없는 전쟁에서 참여한 사람 이라는 병크를 저지르는 일이 결단코 없도록 하자. 그분들은 다만 국가의 부름에 따라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신 일밖에 없다.

참고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05년 8월 26일 공개된 베트남 참전 외교문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64년 5월 9일 존슨 미국 대통령 자유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요청
1964년 7월 15일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 한국군 파병 요청
1964년 7월 31일 국회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4년 9월 12일 제1차 파병단 사이공 도착(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
...라고 한다.

6 파월 한국군의 현지 활동의 정당성


파병 자체의 정당성과는 별도로 파병된 군인들이 정당성 있게 행동했는가의 문제는 있을수 있다. 한국군은 위에서와 같이 이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병이었던 데다가, 게릴라전이라는 특징때문에 전쟁의 명분 확보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훌륭한 활약을 많이 펼쳤으나, 당시 한국군이 활동하던 지역은 전쟁시의 적군이 현재 정부로서 통치하고 있는 관계로, 당시의 활동이 많이 묻히는 편이다.

말단 장교나 사병이 베트남 파병기간중 전쟁범죄에 준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하나 정황증거만 가지고, 그것도 해당 집단의 구성원 전부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냐 하는 문제는 굳이 반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설령 베트남 전쟁이 정당성이 없는 것이 확실하고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참전 장병은 '전쟁 유공자'로 대접받아서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는 시각이 있다. 어쨌거나 그들은 적어도 그 당시 시점에서 '사악한 공산주의자의 야욕으로부터 선량한 남베트남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 하에 파견 나가서 싸운 건데, 그들을 어찌 탓하란 말인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 악당이 아닌 이상, 어쨌거나 적과 용감히 싸우고 돌아온 병사들은 대우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논리에 대해,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군도 그 시점에서는 동아시아 해방을 위해 싸웠고 그런 명분으로 알고 나간 것이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군은 명분도 행동도 전부 글러먹었으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는 NVA 전투원들에게 적용되면 모를까 한국군과 미군에 대한 비유로는 부정확하다. 일본군은 중국과 동아시아를 침략했지만 한국군,미군이 북베트남을 공격해 들어간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만 이 논리는 양날의 칼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듯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도 분명히 '한반도를 중국이 점령한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패하고 미국이 한반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중국의 안보에 위험하니 개입을 시작한 것이고 분명히 대외명분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그럴듯하게 내 걸었다. 이후의 소련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친소정권을 성립하여 NATO국인 터키를 압박하고 중동정세에 개입한다라는 목표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나지불라 정권을 지지하기 시작하였고 분명히 이 2개의 전쟁 모두 '강력한 외국에 개입을 요청하고' '그 요청에 수락하는' 형식으로 파병이 있었던 전쟁들이다. 단지 진영논리와 한국이 직접 참전했다는, 즉 우리가 개입자라는 입장 때문에 마치 베트남 전쟁과 이 2개 전쟁이 분리된 것처럼 편집 전에는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 3개 전쟁은 본질적으로 같은 전쟁이다. 당장 이 베트남 전쟁 이후의 중월전쟁, 중-소 국경분쟁과 정작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던 미국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는 등거리 외교를 시작한 것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라. 그리고 NVA 전투원들의 정당성 문제라면 이 전투원들 중 상당수는 프랑스-베트남 전쟁부터 참전하던 인원들이다. 이 사람들 눈에는 프랑스나 미국이나 똑같이 '백인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압제자들을 편들어 주고 있다'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7 양심 논란

아래의 용병 논란과 맞물려서, 정당성 없는 전쟁에 파병한 것에 대하여 한국군의 양심을 팔아먹었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8 용병 논란

당시 정권은 경제적 지원과 파병을 맞바꾸었고 많은 물자를 미군에게 직접적으로 지원받았고, 이는 엄연히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8.1 용병인가?

용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8.1.1 옳다고 보는 시각

  • 아무튼 돈을 받고 전쟁을 했으니까 용병이라는 의견이 있다.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엄연히 파병의 대가로 파병 부대의 장비 현대화와 금전적/경제적 지원을 받은 만큼 용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한국 놈들 돈 달라고 너무 징징대는데 어떻게 좀 못하나여?' 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 파병은 한국 정부가 주도하긴 했지만, 중-근세 무렵에는 스위스나, 근대에도 쿠바 내무성 정보관리국 제5과 같은 예도 있듯이 국가적인 용병 사업도 드물지 않았으므로 정부가 주도한 파병도 용병 활동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 파병의 규모가 너무 크다. 전쟁을 벌인 당사자인 미군이야 가장 많을 것이 당연하나, 한국군의 병력은 2~3만명이나 되어서 2위를 차지했다. 반면 다른 동맹국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은 겨우 10여명이 될까 말까 한 고문단만 주재했다. 이렇기에 궁지에 몰린 미국이 다른 동맹국에게 다 외면을 당해서 애꿎은 한국을 갈구거나, 또는 박정희가 정권 유지를 하기 위해서 장병들을 팔아먹었다는 시각도 있다.

8.1.2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

  • 국가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동맹국으로서 파병했으므로 용병이 아니라는 의견. 파병의 대가로 미국에게 받은 여러 가지 지원은 '어차피 파병을 해야 할 상황인데 이거라도 얻어내자'의 결과지, 일부러 돈을 받기 위해 파병한 것이 아니므로 '용병'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쿠바처럼 여기 저기 손 벌려서 돈 벌려고 혈안이 된 것처럼 행동한 것도 아니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파병인데다, 20세기 중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투병이 직접 파견되어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일부 평화유지군이 있긴 하긴 하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동맹국 지원 중 동맹국간의 경제적 지원을 근거로 용병이라고 부를수는 없다는 의견. 파병을 대신해서 해준 지원은 이런 것의 일환이라고 한다. 한국군이 소비한 상당수의 전투용 물자도 미군이 지원해 주기도 했다. 뭐 집안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대한민국은 그당시 산업이 별로 잘 돌아가질 않았다) 동맹이 굳이 자기 힘 들여서 도와주는 만큼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도 이왕 받을 기회가 생기면 악착같이 받아야 하기도 했다.
  • 과연 '침략 전쟁에 한몫 하면서 돈이나 벌러 간 용병'께서, 그 많은 대민 사업을 굳이 해야 할 필요 따위가 있는가? 라는 주장도 있다. 단순히 싸워서 돈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쪽에서 고생해서 굳이 남베트남에 이런 저런 시설을 만들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한국에다 하지. 가끔 이것에 대한 반론으로 '일본이 대한민국을 점령한 동안 공장을 세워준 것'이랑 동급이 아니냐(…)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용병 논쟁 이전에, 한국군은 남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아서 공업 능력을 착취하려고 파병을 간 것도 아니니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8.1.3 용병이라는 표현이 과연 모욕인가?

용병 논란과는 별개로, 용병이라는 단어에 모욕감을 느낀다는 의견이 있다. 여기에 대하여, 부끄러워할거 없다. 그 시절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역사적으로 용병에 의해 벌어진 잔학행위가 많았으므로, 용병이라는 단어가 중립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한국군을 용병 따위밖에 안 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용병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욕적으로 쓰기는 하지만, 파병간 사람을 욕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부가 젊은 장병들을 용병 따위로 팔아먹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미로 정부를 탓하며 이런 말을 쓰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어떤 영화에서는 한국군이 미군에게 "네놈들 대신 싸워주려고 용병으로 팔려왔다!"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

일부 용병으로 묘사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용병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모욕적이지 않다고 하면서도, 또한 그 직후 한국군이 학살이나 강간을 저질렀을게 분명하다며 결국 모욕적인 듯한 식으로 몰아가기에 진의를 알 수 없을 지경.

그리고 용병 논란을 벌이기에 앞서 세간의 인식과 국제법상 용병의 정의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국제법상 한국군의 파병은 분명히, 적어도 현대적인 용병의 범주에 합치되지 않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굳이 한국군을 용병에 비견해야 한다면, 이들은 미국 독립전쟁에 고용되어 파병되었던 헤센군이 가장 유사한 사례가 된다. 이들은 "국가가 돈을 받고 자국의 정규군을 연합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독자적인 부대로서 참전시킨 경우"이기 때문에,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과 비교할 때 유사한 점이 많다. 단지 한국군은 헤센군과 달리 돈 이외에도 많은 것을 고려하여 참전했기 때문에, 헤센군보다도 용병으로서의 색채가 훨씬 옅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헤센군은 스위스 용병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헤센의 영주가 재정수입도 확보하고 영주민들에게 일자리도 마련하려는 차원에서 용병업에 뛰어든 경우이고, 그나마 헤센군을 고용하는 나라는 신교도 국가이거나 아니면 이교도들과 싸우는 기독교 국가여만 한다고 못박아 두었다. 때문에 헤센군의 실력이 유명세를 떨치던 17~18세기의 프랑스에서 헤센군을 고용하려고 시도했음에도 신교도 국가와 싸우는 구교도 국가였기 때문에 실패했다.[4]

9 학살 문제

이전까지는 북베트남의 선전공식문서 정도에서 언급이 있었고[5] 윌프레드 버쳇 등의 좌익계열 언론인들의 증언[6],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부 소문의 영역[7]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강창성의 일본/한국 군벌사에서 전두환이 양민학살을 주도했다는 언급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전두환과 사이가 안 좋았다는 점도 있고 월간조선에서 관련 사건 추적을 했는데 양민학살 수준은 아니고 처벌받은 대민사고 수준이었다. 강창성은 전두환이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양민을 학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갔다라고 했는데, 하급부대에서 사실인즉 거동 수상자를 확인도 안하고 사살하고 신체 일부를 잘라간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살되었다는 민간인은 살아 있었고 해당 지휘관은 고발 조치되어 처벌받았다. 전두환의 예하부대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전두환이 시킨건 아니다.

문제는 베트남전의 지휘관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광주진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학살은 베트남에서 배워온것..류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실지로 당대의 외국 서적들에서도 베트남을 연상시키는 광주의 학살이나 베트남에서 악명높은 공수부대를 광주에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고 일종의 연상으로 벌어진 소문이었다. 오해는 하지 말자. 육군 9사단은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광주엔 내려가지도 않았다.

2005년 경부터 조금씩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는데 이전에도 말은 많았고 가장 문제되는 것이 베트남 유학생인 구수정의 한겨레 통신이었다.

그녀는 여기서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의 B-52 폭격이나 독가스 사용등을 들었고 말 그대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대, 참전도 하지 않은 한국공군의 등장과 미공군에만 있는 B-52를 한국군의 것이라고 주장 하거나, 득보다 실이 많은 화학무기를 아주 당연히 썼을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나섰고, 덕분에 대단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이런식의 증언이나 미국 문서보관소라고 하지만 막상 문서 자체의 존재는 의심스러운류의 이야기들이 인터넷에서 떠도는 형편이다. 미국 문서 보관서 아카이브를 무시하지 말자. 40~50년대 한국전 관련 문서 분류나 보관은 말 그대로 개판으로 악명높지만 그것도 대부분 분류번호나 서지 정도는 있는 상태이다. 2010년의 안학수 하사건이나 그 전의 베트남전 포로 문제도 분명히 서지나 분류번호가 있는데 어째서 인터넷에서 나오는 학살 이야기는 분류번호도 제시못할까?

사실 그 당시 상황상 한국군이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피해를 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릴라전의 특성상 민간인과 전투병의 전환이 갑작스레 이뤄지는 기습적인 양상 때문에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판인데 민간인 피해가 없었다면 그 쪽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8]

어쨌거나 군인이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 맞다. 그러나, 민간인을 '실수로 사살한 것'과, 민간인인 것을 알고 신분도 확인된 상태에서 '홧김에 다 죽여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일반 형법만 해도 '살인'과 '과실치사'를 엄격히 나누고 있다. 둘 다 사람을 죽였으니 잘못인건 맞다만, 의도를 가지고 죽이려고 달려든 놈과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실수로 죽여버린 걸 같이 취급수는할수없다지만 살인은 살인이다. 단, 여기는 전쟁터이지만....

특히, 현재 베트남조차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도 같이 적들과 싸웠다고 인정하고 있으니 이런 피해는 스스로 자초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런 경우라면 병사들이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국제법상 저렇게 싸우는 자들은 잘 해봐야 의용군 정도고, 보통은 교전권 인정도 안 되는 국제법상 범법 행위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걸 다 떠나서, 어쨌든 누군가가 공격을 한다면 그게 누구든지 상관 없이, 병사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해서 반격할 권리가 있다. 그냥 총 맞고 죽으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전후사정이 어찌됬던 간에 전쟁터 한복판에서 총을 들고 나타났다면 그는 자기 자신이 죽던, 누군가를 죽이던간에 싸움을 선택 한거다. 만일 저 상황에서 살아남을려면 군인 발견시 즉시 총을 버리고 두손을 들어야한다아니면 누운뒤에 총을 버리고 싸우지 않는다는 의사를 보이는거다. 도망을 가면 안된다. 도망가면 즉시 사살된다.

그런 게릴라와의 싸움은 전투이지만, 어디까지나 저항의지가 없는 힘없는 민간인을 해치지는 행위와는 구분되야 한다. 한국의 노근리 사건을 예로 들자면, 미군이 남한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한군 유격대에 피해를 입자 발작적으로 노근리 인근에서 학살사건을 일으켰는대, 이때 미군은 급하다는 이유로 민간인과 게릴라를 구분도 하지도 않았다. 혼란스러운 전투중에 민간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있으며, 때문에 학살의 가능성 자체는 부정할수 없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학살자로 몰아가는 입장을 취해서도 안된다.

최소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것과 같은 의도적인 학살작전은 한국군에서는 없었다. 악명높은 미라이 학살 이후에 미국과 그 연합국의 대민사고를 다시 한번 조사했지만 미라이급 사건이 한국군에게 일어난 상황은 없다. 그나마 미국도 일부 부대에 국한되었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한국군의 기본 방침은 상당한 수준의 대민 사업을 펼쳐서 최대한 민심을 끌어보려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점에서도 '어찌됐든 죽였으니 문제다'와 '전쟁중일 때 베트남 관료들은 3000건이 넘는다고 했는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베트남인들은 노예라서 여기에 항의 못했을 뿐 더 많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남베트남군과 당시 정부가 동맹국인데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과 달리 남베트남 정권도 분명히 작전권이 독립적으로 있었다. 그 민간인은 죄다 제대로 된 남베트남 국민인데? 더군다나 한국군은 개개인의 전공을 따질 때 베트콩의 모가지가 아니라 베트콩의 무기로 따졌기 때문에 공적을 얻으려고 죽일 리가 없다. 오히려 이 지침 때문에 베트콩 무기 수집에만 열중해서 무기는 얻었는데 베트콩은 놓친 경우도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지경이다. 강창성에 의하면 전두환은 암시장에서 무기를 사서 전공을 올렸다는데

…가끔, '한국군은 변방의 작은 나라 군대였으니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한국군 병력은 베트남 파병국 중에서 미군 다음으로 많았다. 2개 사단이 넘게 투입이 되고 항시 2~3만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했을 정도로 많았다. 적어도 반론을 하기 전에는 사료는 읽고 나서 하도록 하자.

뭐, 공식적으로 한국의 '학살'이 증명된 적은 없지만, 주요 학살지로 거론된 퐁니마을의 생존자나, 당시 2소대장 이상우의 증언 등 여러가지 말이 나오고는 있다. 하지만 이건 마냥 믿기에는 힘든 자료다. 그밖에 1969년 김종수 소위가 민간인 학살 죄건으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15년형으로 감축되었다.

그밖에 고자이 마을 등 여러가지 증언들이 조금씩 조금씩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민감한 주제다 보니 제대로 다뤄진 적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멀쩡한 참전용사들이 '우리가 뭔 학살자냐?'면서 반발하기 때문.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짓을 벌인 자는 비율이 많지 않으니 저런 사례가 나온다고 제대로 된 참전 용사가 나쁜 놈이 되는건 아니지만, 어느 쪽에서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게 문제.

실제 참전군인인 친척의 증언으로 지금 생각하면 학살같은데 그 땐 죄다 빨갱이라 무조건 죽이고 보자는 것도 많았다고 하여 학살로 인식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오랜 전쟁으로 외부인에 대한 증오 및 소수민족과의 갈등으로 우거진 복잡한 문제 와중에 북베트남도 심리전으로 이런 학살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KBS 등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든적이 있고, 옛날에 조성모의 뮤직비디오에 관련 묘사가 나오자 월남 파병용사들이 소송을 건적이 있다.[9]

또한 1999년 이래 한국의 언론 한겨레 신문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였으나, 참전자 단체들이 이에 반발하여, 2002년에는 사무실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MBC 방송국에 난입하기도 했다.

즉 일부 가해자인 베트남 참전군들이 입을 열지 않고 부정만 하는 상황이라,, 국내에서도 규명방법이 쉽지 않고 처벌또한 힘든 상황이다.

이런 것을 볼 때 '완전히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모양이고, 채명신 장군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어느정도 감안한 듯한 언급이 있었다. 사실 없었으면 그게 이상할만큼 상황이 혼란스러웠긴 했으니, 기록이 제대로 남았으면 찾아볼 경우 꽤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시 베트남에서의 대규모 작전에서는 미리 몇 차례에 걸쳐 삐라를 뿌려 '지정 일자까지 그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으면 베트콩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할 수 있다.'고 밝혔고, 그런 대규모 작전에서는 삐라를 보고 게릴라들이 잔전 지역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부비트랩에 의한 사상자가 주 였고 교전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정황상 마을에 설치된 부비트랩에 의하여 아군 사상자가 나면 작전 구역에서 소개하지 않은 민간인에 대하여 우발적으로 사고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수색작전의 경우, 베트남의 현지 상황은 남베트남 군 마저 낮에는 베트남군, 밤에는 베트콩으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던 만큼, 베트남 촌락에도 베트콩이 잠복하고 있거나 마을의 일부 인원이 베트콩일 수 있었으므로 마을 내에서 민간인이 대피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해당 상황에서 민간인의 사상은 불가피하다. 물론 그런 상황이다 하더라도 민간인 살해 자체는 정당화될수 없으며, 전장 스트레스등에 의해 발작적으로 학살이 벌어질 가능성은 있기에, 정황상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10 그 밖에

위에 나왔듯이 적군 시체가 아닌 무기를 통하여 공과를 확인했기에 일부에선 무기를 돈주고 사와서 적군 사살로 얻은 것으로 보고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 그만큼 막장인 베트남에선 무기를 사는 게 어렵지 않았던 점.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이며, 한국군이나 미군 헌병도 바보는 아닌지라 엄중히 조사했기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개망신이라 쉬쉬하면서 처벌했다고. 김형배의 베트남전 만화에서도 이걸 다룬 바 있다.

12 라이따이한 문제

라이따이한 항목 참조

13 국제사회의 이미지

베트남전 참전 결정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은 베트남 참전으로 인해 제3세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나빠질 것이라고 예언했고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민 학살 문제가 '일제의 피해자인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아시아, 더 나아가선 세계에 인정받기 힘들게 한다는데 근거는 없다. 또한 라이따이한 문제는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들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했다는 증거이며, 한국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한 반성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주로 혐한들이 자주 써먹는 떡밥이다. 혹자 들은 이런 한국민의 원죄 자극이나 국제사회 이미지 드립이 원조를 담당하는 민간단체들이 지원금을 더 받기위해 벌이는 상투극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판국이다. 라이따이한 숫자가 5천에서 3만명까지 최대 6배까지 다른 이유중에는 민간 단체들이 서로 자기네가 자체적으로 파악한 라이따이한 숫자를 가지고 지원금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왠지 베트남에 피해를 줬다는 의식도 꽤 있는데다 그것 때문인지 매년 한국의 봉사단이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며, 김대중/노무현/이명박(98,01,04,09년) 대통령 때에는 각각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베트남 정부에 사과를 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우리가 승전국으로 끝난 전쟁인데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고, 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92년 베트남과 수교당시 과거사는 더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상황, 하지만 베트남은 외국자본 유치등이 필요하기에 그냥 경제적 마찰을 빛지 않기 위하여 이런 반응을 보였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 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 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당했다. 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 따라서 불필요한 마찰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베트남 입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피곤할 수 있는 게, 자기들 역시 구린 구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미군 철수 및 파리 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을 기습남침해서 점령한데다, 당시 대한민국의 이대용 공사같은 사람은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붙잡혀서 몇 년이나 투옥당했다. 거기에 멀쩡한 대한민국 국민이자 외교관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공작하기도 했다. 여기다가 당시 미군이나 한국군이 포로가 되거나 했을 때 제대로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를 했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10]

또한 이명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국가유공자법 개정 과정에서 베트남 참전 유공자들을 한국 전쟁 유공자와 동일하게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세계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쟁 유공자"라는 문구에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운동〉으로 자부하고 있던 베트남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다. 결국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10월 12일 하노이를 방문하여, 외무부 장관을 만나 "월남전쟁"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일단락 지었던 사건이 있었던걸 보면 베트남 역시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걸수도 있고 아직도 잠재적인 문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14 포로?

민간인 학살만큼이나 잘 안 알려졌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포로 의혹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 교수 전경수 교수가 최초로 베트남 전쟁 박물관의 사진을 토대로 수백명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다가 채명신 장군 등 참전 군인들의 노력으로 그 사진 자체는 의문시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 실종자 관련 단체에서 3급 정보로 일부 전사로 처리된 장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북한과 베트남 생존설을 주장해서 PD 수첩을 타기도 했다.

사실 당시 주월사의 기본 방침은 한국군은 너무나 용감해서 포로가 없다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실종자들을 발표한다. 그 중 몇명은 북한에서 생존한걸로 확인되었다. 사실 1973년 파리 협정 당시 북베트남이 억류중인 한국군 유종철 일병을 송환하였는데, 그의 집은 이미 전사 통지서를 받은 상태였고 국방부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

유종철 일병 사건후에 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현재 파악된 실종자들은 월북한 상태이고 그들은 반역자.'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오오, 황군의 향취! 아니, 이건 소련군인가?!

2000년대 베트남에서 포로가 된 후 북한 생존이 확인된 안학수 하사에 대해서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월북을 부정하고 납북을 인정하게 된다. 당사자는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으로 탈출하려다 실종되었다고 한다.

PD 수첩에서 실종후 베트남 생존의혹이 제기된 국방부 말에 의하면 반역자 한국군 장교는 90년대말 미국 실종자 협의회의 발굴로 전사 시체가 발견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15 과장된 한국군?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과 왜곡된 것이며 한국군은 무능하였고 부패했으며 잔혹했다고 한겨레신문이 주장한 바 있다.#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내는 장문의 보고서인 이 내용은

  • 한국군은 주요 전투에서 베트콩 등 적들에 대한 주요 군사행동을 주도적으로 취하기를 꺼렸으며 미군과의 제대로 된 작전연계를 펼치지 못하였다.
  •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살이 빈번하였으며 베트남 농민은 베트콩보다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였다.
  • 암시장에 물건을 내다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현지를 약탈하는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였다.
등 한국군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려놓았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 베트남전의 성격 규정에서부터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 행사를 허용할지 여부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두고 주월미군과 주월한국군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 미군이 아시아문화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다 게릴라전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나중에는 한국군이 채택했던 전술개념 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다
  • 해병대의 경우 적극적인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오히려 참전 초기 성급하게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베트콩들의 매복이나 기습공격에 다수가 사망한 사건 등을 허위보고하는 사례도 발견돼 3명 이상의 적군을 추격할 때는 사령관의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지시를 내려야 할 정도였다
또, 이 평가는 제임스 맥이 일방적으로 생각한 해병 2여단에 대한 평가로 그것도 쿠앙남성 이남지역의 한국군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으며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거의 일관적으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1][12]

게다가 제임스 맥이 부정적 평가를 내린 해병 2여단은 베트남전의 활약으로 한국 대통령 표창은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까지 받았다. 또,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5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사상자 비율은 둘째치더라도 제임스 맥 외에 한국군의 군사적 활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한 사람은 없고, 설사 해병 2여단이 그렇다 하더라도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한 부대는 2여단만이 아니니 전체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건 아니고 패배한 전투도 있다. 참고바람

16 월남전 한국군 외신보도

한국군에 대해 자세한 홈페이지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뉴욕타임즈, 1966년 7월 22일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 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미국 에반스빌 저널, 1966년 3월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었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였다. 뉴스 위크, 1967년 4월 10일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수한 전술을 가진 적과 대치하여 지역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용감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찰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월넘 띠엔, 반지에서. 1968년 2월 17일

한국군은 우군피해에 대해서 15:1 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 부터 적을 추격,격파 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 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백마,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니 북베트남군의 문서에 의하면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사이공 포스트, 1968년 3월 20일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보고 이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96킬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영국 런던 타임즈

17 관련 인물

  • 채명신 - 1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 박정희 - 당시 한국 대통령.
  • 전두환 - 파견된 백마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 민간인 학살 의혹 있음.
  • 서경석 - 소대장 및 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 복무. 이때의 경험을 실감나게 그려낸 전투감각이라는 수기가 유명하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노태우 - 파견된 백마부대의 연대장으로 복무.
  • 황석영 - 소설가. 해병 제2여단 소속으로 참전.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다가 후방으로 전출되어 군 수사대로 복무했다[13].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 무기의 그늘 같은 소설을 집필했다.[14]
  • 박영한 - 백마부대 29연대 보도병으로 참전. 머나먼 쏭바강을 집필, 후에 SBS에서 드라마화 됨.[15]
  • 안정효 - 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 하얀전쟁 집필, 후에 안성기 주연으로 영화화됨.
  • 장태완 - 수기인 12.12쿠데타와 나에서 베트남전에 참전했을때의 경험이 수록되있다.
  • 남진 - 당시 파병가서 죽을고비를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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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라크 전쟁후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도 민사작전으로 유명하다. 대신 미국내 신보수주의자들이나 한국내 신우익들은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고 까지만, 주둔한 지역이 이라크 중앙정부에게 비호의적인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이 지역은 이라크 중앙정부를 편드는 인상만 보여도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곳이다.
[2] 쿠데타나 막후 정치공작 등
[3] 그럼 일본군의 침략전쟁도 정당하다는거냐 하고 엉뚱하게도 일본군하고 비교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데, 베트남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니깐 상관없다. 하물며 2차 세계대전때의 일본은 군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군복입은 현역 군인이 정치를 하던 나라고, 심지어 군대가 독단으로 정부의 허가없이 전쟁을 벌이는게 가능하던 막장이었다.
[4] 궅이 용병의 통상적인 정의를 보고 싶으면, 군사관련 항목, 또는 드라마들을 유심히 보자, NCIS경우, 용병 관련 에피소드가 몇개 있는 데 그 경우, 용병들은 대부분 정규직으로 군대에 업무하는 사람들은 아니며, 국가와는 독립된 엄연한 회사이다.
[5] 월간중앙에서 어느 참전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1주일에 남베트남군 20만 사살, 미군 함정 100척 격침류의 신빙성이라는게 문제
[6] 한국에도 번역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주요 증언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한국전쟁때도 북한을 취재했고 70년대 북한 취재기도 내었는데 이 사람의 저작들은 전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금서였고 서강대학교등의 일부 학교에서는 아직도 대출제한 서적이다. "미국의 조직적인 북침음모"-판문점에서의 사건이나 베트남을 통해 남한에서 의거 귀순해서 북한에서 행복하게 사는 안학수 하사등의 기사를 쓰는 분이니 정신상태 시각이나 신빙성은 각자 생각해볼 것.
[7]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건 아니다. 월남스키부대식의 자기 자랑도 있고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주제이지만 베트남 군사박물관의 한국군 항복 사진을 맹호부대라고 기록한 기자에게 근거를 물으니 맹호부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사진은 해병대 복장을 하고 있고 조작의 냄새가 짙다.
[8] 물론 강정구의 입장은 반대로 그런 게릴라전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이 잘 난다는 것이다.
[9] 사실 이 뮤직비디오는 양민학살보다는 군대 구타를 묘사했다는게 더 문제였다.
[10]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군 포로의 상당수가 안학수 하사의 사례처럼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점만 봐도 북베트남이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1] 참고 :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12] http://www.history.army.mil/books/Vietnam/allied/ch06.htm
[13] 누나 애인 빽 덕분에 뒤로 전출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출되기 이전까지 황석영은 전방에서 근무했으며 전투를 치렀던 경험도 있고 그 때문에 PTSD를 앓기도 했다.
[14] 여기서 탑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베트남 인민들의 토템을 두고 주인공이 속한 부대가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교전을 벌인다는 내용인데, 비슷한 내용이 논픽션인 그린베레에도 실렸다. 다만 이쪽에서는 미군이 전투를 벌이며 토템을 두고 민족전선과 전투를 벌인다는 단편적인 요소만 빼면 별 다른 유사성이 없다.
[15] 쏭바라는 뜻이 원래 강이다. 즉 역전 앞식의 중어 반복.
출처 : 서북미 월남참전 국가유공자 전우회
글쓴이 : 동백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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