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old pop

[스크랩] 자유인 은희

마블마운틴 2011. 7. 1. 08:57

                          추억의 7080 음악 여행 (은희편 2-4)

 

                                                   

자유인 은희

높은 인기만큼이나 당돌하고 튀는 행동으로도 유명했던 은희는 대중의 관심을 몰고 다녔던 뉴스 메이커였다.

본명이 김은희인 그녀는 1951 513일 제주도 모슬포의 평범한 가정에서 21여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 제주 지점장이던 부친이 정년퇴직을 한 이후 집안사정은 어려웠지만, 뛰어난 예능 소질을 인정받아 입학료를 면제받고 제주여중에 진학한 그녀는 방과후 음악실에 홀로 남아 피아노를 연습할 만큼 음악에 빠져 들었다.

제주 남초등학교 시절부터 제주방송국의 어린이 합창단원과 성우로 활약할 만큼 그녀는 인기만점의 소녀였다. 제주여고 때는 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전국 민속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제주 해녀의 춤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1967 12월 여고1학년 겨울 방학 때 은희는 서울구경을 위해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 근무하는 작은 오빠 집을 방문했다가, 어머니가 선물한 손목시계를 잃어 버렸다는 이유로 작은 오빠에게 꾸지람을 듣자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을 터뜨렸다.

홧김에 가족들 몰래 여군에 지원한 것이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을 때 그녀는 이미 서울에서 여군 훈련소를 거친 후 대구의 육군 제2군사령부 소속 타자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고교생이 충동적으로 여군을 지웡했을 만큼 그녀는 당돌하고 자유 분방한 소녀였다.

 

                         

군에서도  노래 잘하고 귀염성 있던 은희는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 여군생활에 싫증이 났던 그녀는 또 한번 사건을 터뜨렸다. 1968 615일 보름간의 정기휴가를 마치고 김은희 일병은 귀대하지 않았다. 탈영을 한 것이었다.

필자도 군 지휘관으로  재직시 총기 사고 다음으로 탈영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풍운을 꿈을 안고 힘든 군사훈련과 교육을 이수하고,  고향을 떠나 인적 드문 외로운 임지에서도  별을 어깨에 다는 꿈을 먹고 살아가는 군인들이 한 순간에 보직을 잃기 때문이다.

필자가 중대원의 탈영 보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개인 화기가 있는지 확인 후, 무장 탈영이 아님을 대대에 보고 후 자체 수색대를 편성, 체포한 사건이 있었다. 무장 탈영이 아니면 일단 군 자체에서 해결하고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타자병인 은희는 탈영 후 유명가수가 되기 전까지  4년 동안 군의 추적을 받지 않고 버젓이 서울 예고로 전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무명 가수 생활을 이어간다.

필자도 어렸을 적 그녀가 성형수술을 하여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사랑해로 유명 가수가 되어 탈영사실이 발각되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소위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였으니  가능한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여고 1학년이 입대를 하고 탈영 후 다시 학교를 다니고...그녀는 요즘 말로 4차원의 사고를 가졌던 소녀임에 틀림없었다.

1972년 초 KBS라디오의 신년 특집 프로에 서유석과 함께 출연해 "트로트 가수도 가수냐"는 튀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앳되고 여린 목소리와는 달리 당차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신 사고적 여성이었다.

 

트로트 가요 시비 이후 가요계의 신데렐라 은희는 온갖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A라는 30대 청년과의 염문설도 그 중 하나였다. 또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 유학중인 한 살 연하의 강모씨가 애인이라는 소문이 악의적인 동거설로 확산돼 당시 모든 주간지의 지면을 뜨겁게 달궜다.

 

뒤이어 72 3, 4년 전의 탈영이 발각되어 군 관계 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높은 인기는 끝임 없는 구설수라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그런데 하지만 1972 8월 평양 남북 적십자회담장에서 남과 북의 대표단장이 손을 맞잡고 데뷔 곡 <사랑해>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사랑해> 는 불멸의 국민 가요로 자리잡게 된다.

 

 

 

이념과 사상의 색깔이 없이 화합을 이끌어내는 내용을 담은 <사랑해>는 자연스럽게 남북회담장에서 합창되었다.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법을 어기고 탈영한 여군이 부른 노래가 국가적 행사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러니컬한 사건의 중심에 그녀가 서있었다.

 

그녀의 정열적인 예술적 혼은 정치적 갈등을 녹이는 뜨거움을 간직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에 지워지지 않은 한 획을 그은 그녀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자유인이었다. (계속)

 

칼럼니스트 : 김시우 / 시애틀 7080 기타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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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애틀 7080 기타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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