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잡지 VIETNAM 2008년10월호 "청룡"의 월남전 초기기사 !!청룡부대 전투상보
Why the Viet Cong feared Korea's Marines - 누구든지 시간 나시면 번역 부탁드립니다. 베트콩이 한국해병대를 두려워하는 이유 -2008년10월호 Vietn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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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만드는 한국해병”: 청룡해병여단은 베트남 전장의 전설이 되다
[저자: James Durand 미해병 중령]
이봉출 해병준장이 한국해병 제2여단을 이끌고 베트남 캄란만에 상륙한 때는 1965년 10월 9일이었다.
한국군 최초의 전투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취재하기 위하여 몰려든 기자들에게 한국전 참전 경력을 가진
이봉출 준장은 이렇게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이다: 전투이다”
이어서 이준장은 청룡부대를 구성하고 있는 제2여단 해병과 해군 및 육군병력들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언제, 어디서나” 즉각 싸울 준비가 되어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로부터 6년간 약 37,00명의 한국해병들은 이봉출장군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병력의 10%에 불과한 청룡부대는 숫자상 10%를 훨씬 상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한국해병 스스로의 존재감을 떨쳐 보여 주었다.
베트남 전역으로 작전영역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한국해병은 독자적 작전과 미해병과의 연합작전을 통하여, 한국전에서 보여준 한국해병의 희생의 정신과 용맹의 전통을 베트남에 와서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베트남전에서의 성공으로 해병대는 한국군내에서 새로운 임무와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한국 해병대의 황금기가 시작되는 첫 장을 열게 되었다.
청룡부대는 베트남에 파병된 최초의 한국군 부대는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국제적 지원요청에 부응하여, 1964년 9월 13일 한국정부는 10명의 태권도 사범과
이동외과병원을 베트남에 파견했었다.
또한 가을 몬순 우기철의 심각한 홍수범람은 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한국정부에 평화정착과
재건사업의 일환으로 공병부대의 파견을 요청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65년 2월 2,400명 규모의 한국 군사지원단이 비엔호아에 도착했다.
비둘기부대로 불리는 군사지원단은 육군 및 해병공병중대, 이들을 지원하는 경비대대, 수송중대 및
지휘부 및 연락요원과 탱크수송선으로 편성되었다.
비둘기부대의 첫 한해 동안 공병대는 학교 4곳, 교량 3곳, 의무시설 2곳, 촌락 사무실 2곳 등을 건립했다.
이외에도 공병대는 다수의 재건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1965년 봄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 보병전투사단의 베트남 파병을 선언했다.
이때 한국 해병대는, 김성은 전사령관이 국방장관직에 있음에 비추어, 베트남 파병부대 편성 시
해병대의 역할이 있을 것임을 예감하였다. 해병대 사령부는 해병대가 기여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은
5,800명 규모의 여단급 병력임을 상부에 권고하면서,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하여금 1개 여단을 편성하여 베트남 파병준비에 들어가도록 지시해두었다.
국방부는 육군도 수개의 연대급 전투단을 해병여단의 편제와 유사하게 재편성하도록 지시하였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작전 시 김성은 장관이 지휘하던 해병대대의 한 중대장이었던
이봉출준장이 한국군 최초 베트남 파병부대의 초대 지휘관이 되었다.
제2해병여단은 제2해병연대의 3개 보병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복합포병대대(105mm와 155mm),
중화기 중대, 항공분견대와 지휘부, 의무 및 경비중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육군은 해병여단에 155mm 포병대대와 공병중대를 지원하였고, 해군은 관례에 따라, 의사, 위생병 및
함상포격지휘장교 등을 보냈다.
해병대는 해병 제1상륙사단이 국가적 소명에 가장 먼저 응답하게 됨으로써,
다섯 명의 해병대 사령관이 내걸었던 “전투태세완비” 복무강령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1965년 10월 캄란만에 상륙한 한국해병대는
미제101공정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받게 되면서,
당시 미군보급기지창으로서 비중이 급격히 커지고 있던
캄란항을 지키는 책임도 함께 인수하였다.
이때는 몬순 우기철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청룡부대는
새로운 환경이 주는 도전에 신속하게 적응해야만 했다.
폭우와 진흙탕 속에서,
청룡부대는 벌집처럼 엮어진 지하땅굴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도주하는 적들을
추적해 나갔다.
청룡부대는 소규모 순찰대 운용에 주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합군측으로부터 습득한 새로운 전술을
즉시 받아들여 통합 운용하여 나갔다.
와싱턴 작전기간 중 제2여단은 판랑 지역으로 공수되어
캄란공군기지를 위협하던 게릴라부대를 깨끗이 소탕하였다.
다시 캄란으로 복귀한 제2여단은 그간 불란서군이나
월남군이 끝내 실패하였던 작전임무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Ca Tau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11월 4일 Ca Tau산을 기어 오른 제2여단은 18년 동안 장악해온 견고한 진지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적들을 하나씩 남김없이 소탕해 나갔다. 약 9시간의 전투 끝에 한국해병은 그 산을 확보하였다.
4일 후 제2여단은 여단규모로는 처음인 번개작전을 개시하였다.
청룡부대원들은 신속히 기동하면서 그간 연합군 시설을 정기적으로 공격해온 베트콩 게릴라들이
은거하고 있는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고 남부베트남의 간선도로인 1번 도로를 확보하였다.
한국해병들은 나트랑 공군기지를 내려다 보는 고지를 점령하고, 적들로부터 상당수의 중화기를
노획하였으며, 이로서 미공군 기지에 대한 위협은 제거되었다.
한국해병대의 참전 초기 활약의 결과로, 베트콩 사령관은 한국군부대와의 직접적 조우는 피하고,
한국군이 공격해오면 퇴각할 것을 예하 조직에 하달하였다.
10월이 되면서, 투이호아로 이동하여왔다.
그간 월맹정규군과 베트콩 비정규군은 풍부한 쌀이 생산되는 이 지역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국해병대는 월남 육군 제47연대와 함께 미해병대와 미육군 항공대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적으로부터 가을추수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청룡1호 작전을 전개하였다.
1966년 1월 16일까지 청룡부대는 Tuy Hoa지역에서 적을 소탕하고 월맹군 95연대를 격퇴하여
1번 국도를 확보하고 바다로부터 적이 침투하는 접근로를 봉쇄하였다.
청룡 1호 작전에 이어 청룡부대는 Tuy Hoa 지역에서 민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수의 재건사업을 통하여 지역주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다
1966년 11월 12일부터 제2여단은 해풍작전을 벌여,
해안지대에서 산속으로 도망친 다음 산속에서 은신하면서 공격하는 게릴라들을 추적하였다.
이 해풍작전에서 이인호대위?한국해군사관학교와 미해병대 기초교육과정을 이수한 보병장교-의
영웅적 행동은 한국군의 용감성에 대한 상징으로 떠오르게 된다.
8월 11일 청룡부대 제3대대 해병들은 포획한 2명의 여자 베트콩을 대대 정보장교인 이대위에게 데려왔다.
심문과정에서 여자베트콩은 그들의 본거지 위치를 자백했고,
자백한 여자베트콩은 이대위와 6명의 순찰대원을 어느 동굴 입구로 안내했다.
이대위와 부하들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동굴 속에 숨어있던 게릴라 1명이 수류탄을 던져 올렸고,
이 대위는 이 수류탄을 바로 집어서 적들 쪽으로 다시 던졌다.
이 때 두 번째 수류탄이 날아왔다. 이 대위는 부하들에게 즉각 뒤로 물러설 것을 지시하며,
두 번째 수류탄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폭발하였다.
이 대위는 수류탄 파편을 온몸으로 받아 부하들을 날아오는 파편들로부터 보호하였으나
자신은 현장에서 산화하였다.
이 대위의 이야기는 한국 주요신문의 톱기사로 일제히 보도되었으며,
신문들은 사설에서 이대위의 덕목을 칭송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젊은 청년장교의 장렬한 희생에 깊이 감동한 박대통령은 이 대위의 가족에게
자필로 작성한 위로의 서신을 전달하고,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하였다.
미국 존슨 대통령은 그 해 가을 한국 방문 시 이대위의 미망인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전달하였다.
그 해 8월과 9월 제2여단은 반탄강 반도로 재배치되어 추라이 방어사령부산하 전술책임지역을 맡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해병대와 미국해병대가 1954년 3월 이후 처음으로 연합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양국 해병부대 사령관간의 오랜만의 해후이기도 하였다.
미제3수륙양용사단장인 루이스 왈트 중장과 이봉출 준장은 버지니아 콴티코 소재 미해병학교의
동급생이었다. 청룡부대가 미제3수륙양용사단의 지휘를 받지는 않았으나 한미 영국해병은
기지방어에 있어 상호 조율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추라이 도착직후부터 제2여단은 베트콩부대와 비정규 게릴라들로부터 촌락, 도로 및 수로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아오기 위하여 일련의 작전을 시행하였다.
단독작전이나 소규모 부대작전은 수많은 용감무쌍한 실전사례들로 특징 지워진다.
그러나 지덕철 해군중사와 비견할 만한 사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강구작전 중이던 1967년 2월 1일 청룡 제2중대 제3소대는 어느 마을로 진입하던 중
베트콩의 매복에 걸렸다. 베트콩들은 한국해병들을 에워쌌고, 청룡의 피해는 커져만 갔다.
중대 위생하사관인 지중사는 부상한 해병들에게 달려갔다.
그 와중에 그는 적의 소총에 피격되었으나 자신의 부상에는 개의치 않고 세 사람의 부상병을 치료했다.
20명의 베트콩들이 한국군 쪽으로 접근하자 지중사는 소총사격으로 접근하는 적들 중 상당수를 쓰러트렸다.
구급헬기가 부상병 이송 차 도착했을 때 지중사는 헬기 탑승을 거부하고,
자신이 치료하던 해병부터 먼저 이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부상당한 해병을 실은 헬기가 후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숨을 거두었다.
전장에서 스스로 자신을 먼저 버린 그 용기를 인정받아, 지중사는 진급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가 받은 태극무공훈장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해군이 받은 유일한 태극무공훈장이 되었다.
2월14일 이른 새벽에 약 2,400여명의 월맹 정규군이 청룡제3대대 11중대를 공격해 왔다.
당시 정경진 11중대장과 중대원은 짜빈동 외곽의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월맹정규군이 11중대 3소대
방어망을 돌파했을 때 한국군은 야전삽, 곡괭이와 맨주먹으로 싸웠다.
신원배 소위는 화기분대를 지휘하여 방어선 100미터 후방에 위치한 적의 박격포 분대를 타격하였다.
기관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신소위와 오성환하사는 월맹군을 사살하였으며,
소대원을 재규합하여 방어망을 복구하였다. 월맹군이 마지막으로 중대기지 진입을 시도하였을 때
한국해병대는 적들을 정통으로 타격하여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
패주하는 월맹군은 243구의 시체를 남겼으며 그 중 100구의 시체는 한국군 방어망 내에서 발견되었다.
11중대는 15명의 해병을 잃었다. 짜빈동 전투에서 패한 월맹군은 다음 공격목표로 삼았던 쾅나이 시와
추라이 미해병기지에 대한 공격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정부는 베트남 참전기간 중 짜빈동 전투 승리에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하였다.
박대통령은 짜빈동 전투에 참여한 사병 전원에게 일계급 특진시켰다.
이러한 부대단위 진급은 한국전 이후 처음이었다.
정경진 중대장과 신원배 소위는 각각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는 한번의 전투에서 두 사람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또한 11중대는 한국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각각 부대 표창장을 받았다.
외신기자들에 대한 브리핑직후 “신화를 만드는 해병”이란 문구가 미디어에 등장하면서,
청룡여단은 한국전에서 얻은 “귀신 잡는 해병”과 “무적의 해병”의 유산을 계속 이어 가게 되었다.
짜빈동 전투가 끝난 후 수개월 동안 청룡여단은 일련의 적군 소탕작전을 계속해 나갔다.
한국해병대는 미해병대, 미육군 그리고 월남육군과 공조하여 가면서,
얼기설기 얽힌 복잡한 해안지형과 산악 속 자연동굴을 게릴라 전투기지로 삼아 교묘하게 활동하는
적들을 사냥하였다.
청룡여단의 소총수들은 한국전이래 사용해왔던 제2차대전형 MI Grand소총을 반납하고 M16을 지급받았다
신형무기는 지급받았지만, 작전은 만만치 않았고 그 진척도를 평가하는 것은 더욱 난감할 따름이었다.
용두2호 작전을 수행하던 1967년 7월 1일은 예외였다.
한국해병대는 월맹군 제2사단 지휘부 위치를 포착했고 무기와 탄약 그리고 350톤의 식량을 노획하였다.
그 해 늦은 여름 한국해병 제5대대가 베트남에 도착하면서, 청룡의 심장박동은 4개 보병대대로 강화되었다.
1967년 하반기 청룡 제2여단은 호이안 외곽지역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청룡은 베트남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청룡여단은 1968년 구정공세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호이안으로 이동을 완료하고,
곧이어 시작된 월맹군 제3사단의 대규모공세를 한달 간의 혈투 끝에 격퇴시켰다.
구정공세 전투에 뒤이어, 한국해병대는 쾅남성 전역에서 1968년 6회, 1969년 12회에 달하는
일련의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국해병은 외곽지역의 촌락에서 베트콩을 몰아내기 위하여
공세적인 순찰을 반복적으로 시행하였다. 동시에 한국군은 민사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장교와 하사관을 선발하여 월남어 통역으로 훈련시킨 다음 각 중대 별로 1인씩 내려 보냈다.
한국군은 부대단위 별로 촌락과 학교와의 연결고리를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노인들을 대접하고 존경심을 표시하면서, 농번기 모심기를 지원하고,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방법으로,
한국해병대는 월남사람들의 지원과 신뢰를 얻기 위해 애를 썼다.
1969년 여름 해병여단은 미해병대와 월남육군과 함께 월맹군 지뢰, 부비트랩 그리고 땅굴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Go Noi 섬에서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연합군의 11개 보병대대 병력은 화씨 115도의 폭염, 뱀 그리고 질병을 견뎌가면서
베트콩의 지하 기반시설을 제거하기 위하여 5개월 동안 작전지역을 휩쓸었다.
1969년 9월 12일 한미 양국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이래 처음으로 합동 수륙양용공격작전을 전개하였다.
Defiant Stand로 불린 이 작전은 베트남 전쟁의 마지막 특수상륙작전이었다.
한국해병대가 베트남에서 보여준 성과는 이후 한국에서 해병대의 지위와 역할을 크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해병 제5여단은 1966년 11월 창설되어, 곧 바로 김포반도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간 김포반도를 방어해온 제1해병예비여단은 포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무기와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해병 제2대대, 해병제3연대를 “99부대”로 명명하고,
대통령의 진해해군사령부 방문 기간 중 요인 경호임무를 부여하였다.
1967년 한국해병대는 사령부와 해병대학을 설치하고, 모든 훈련과 교육과정을 해병대사령부산하로
통합시켰다. 그 해 한국해병대사령관은 4성 장군으로 승격되었다
언론의 호의적 보도는 해병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우수한 청년들이 육, 해, 공, 해병대중 가장 규모가 작은 해병대로 몰려들었다.
사상 처음으로 해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은 직업군인으로서 해병대를 선택하기 시작하였다.
해병대 체육팀은, 다른 군과 대학팀들과 맞붙어서, 사격, 축구, 야구 및 태권도에서
전국 선수권을 석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병대 생활의 기본은 변함이 없었다.
모든 장교와 중견하사관들은 베트남에서 1년간 복무해야 되었다. 많은 해병들이 재파를 원했다.
사병들은 의무복무연한을 채우기 위하여 3년간 근무하기도 하였다.
군기는 절대적이었고, 훈련은 기본과정에 주안점을 두었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에 기초하여, 무술연마 정도가 전투 준비태세 측정단위로 추가되었다.
1971년 11월 박대통령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청룡부대가 가장 먼저 철수하는 부대가 되었다.
그 해 12월 수개 해병대대가 최초로 베트남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해병대대는
1972년 2월 22일 베트남을 떠났다.
6년 5개월간 37, 304명의 해병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그 중 1,075명이 전사하고 2,884명이 부상을 입었다.
청룡부대가 입은 사상자비율은 여타 한국군 부대의 그 것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해병제2여단은 1972년 3월 12일 해체되었다.
인명의 피해와 사이공정부의 몰락을 보면서,
한국해병들은 자신들의 베트남 참전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면서 발전을 지속해온 한국 성장과정의 일부라는
보다 큰 시각에서 대국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베트남 전장에서 체득한 실전경험에 힘입어 한국해병대는
한반도를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크게 진전시킬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모국이 직면하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의
위험성을 각인시켜주었고, 동시에 한국의 군사적 힘을
우방과 적군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은
한국의 산업과 경제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베트남에서 해외사업 추진경험을 쌓은 한국기업들은 오늘날
수출주도 한국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청룡부대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이 베트남에서 보여준 활약상은
한국의 새 세대 해병들에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이인호'소령의 동상이 서있는 해군사관학교 정문에서는
매년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밟아 해군사관학교로 온 다음 해병대로 가서 복무 중이다.
신원배 중장은 해병대에 몇 안 남은 마지막 월남참전군인으로 그 역시 조만간 퇴역할 예정이다.
태극무공훈장수훈자가 해병 제2여단의 핏줄을 이어받은 해병 제2사단을 지휘하고 있다.
오늘날의 청룡부대원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월남전장에서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의 헌신으로
강화도와 김포반도를 방어하고 있다.
(저자소개: Durand중령은 미국 해병대 정보 및 대외관계 담당 장교이다. 그는 5년간 한국에서 근무했고
한국해군대학 졸업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