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 12일에 명동의 한 대폿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배우 나애심이 여주인공인 영화 '백치 아다다' 개봉 전날.
그녀가 출연한 영화 선전을 위해
기자 및 문인들과 함께 한.,술자리.
그곳이 박인환 등이 자주 드나들던
주점 경상도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명동 동방싸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명동 은성 술집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동석한 이들은 나애심에게
노래 한곡 부르기를 청했으나
그녀가 뒤로 빼며 사양하고 있을때
박인환 시인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어 거기에
즉흥시를 썼다는.,'세월이 가면'
술을 마시던 박인환이 즉흥시를 쓰자
옆에 있던 이진섭이 즉석 곡을 붙였고
나애심이 즉석에서 곡에 맞춰 흥얼거렸다
그리고 송지영과 함께
먼저 돌아갔다 전한다
.
이후 명동백작 이봉구와 함께 술자리에 합석한
테너 임만석이 이 노래를 부르자, 명동의 대폿집 앞
골목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여 박수를 쳤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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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사랑 받는 노래
시인 박인환 詩, 이진섭 선생이 즉흥적 작곡.
그 자리에 동석한 나애심 씨가 즉석에서 노래.
1956년 3월 14일
명동 은성 주점에서
그렇게 탄생한.,노래.
이날 시인 박인환을 비롯해
극작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가수 나애심 등 몇 사람이 술한잔.
동석한 사람들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곡 불러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미사의 종’ 등 히트곡을 낸
당시 유명했던 가수이자 배우.
‘부를 노래가 없다’며
꽁무니를 뺐던 나애심.
이때 박인환이
종이에 끄적이더니
앉은 이들에게 보여줬다.
‘세월이 가면’ 제목이 붙은 시.
이 시를 읽고 샹송에 일가견이 있고
작곡할 줄 아는 이진섭이 샹송풍 곡을
붙였고 나애심이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1956년 영화.,백치 이다다.'
그런데, 나애심이 먼저 가고 나중에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이 곡을 노래.
이때 지나가던 행인들이 노래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1950년대 중반, 그때 그 시절 명동이
만들어 낸 걸작이라는 즉흥시이자 노래.
서울 명동은 당시 전쟁의 상처에서
겨우 회복하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9.28 수복 후 언덕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명동성당, 국립극장, 그리고 몇 개 건물만
남고 모두 불탔거나 부서져 폐허였던 거리가
그럭 저럭 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다방이 생기고, 술집들이 생기고,
달러 골목과 헌 잡지 등을 파는 골목
옷 가게들도 많이 생기기 시작할 때다.
............1950년대 명동................
1950/60대 명동은 문인들의 낭만과
애환이 골목마다 어려 있는 곳이다.
1950년대 ‘박인환(1926~1956)은
‘너무나 명동에 걸맞는 시인이었다.
명동이 문화 예술인들의
본거지가 된 이유는 국립극장이
장충단으로 가기 전 명동에 있었기 때문.
명동의 옛 국립극장은
1935년 세워진 영화관으로
객석 1180석의 3층 건물이었다.
광복 후 서울시가 시공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공연장으로 활용, 1959년 국립극장 전용극장.
그후 은행건물로 사용되다가 현재 명동예술회관.
명동은 다방과 주점의 천국이었다.
‘청동’, ‘돌체’, ‘서라벌’, ‘갈채’, ‘휘가로’,
‘모나리자’, ‘동방싸롱’, ‘은성’ 같은 다방
또는 주점에서 문인들은 시와 인생을 논했다.
명동을 가장 사랑했고 명동 뒷골목의
역사를 몇 권의 책으로 남겨 ‘명동백작’
‘명동시장’으로 불리는 이봉구(1916~1983).
문인들의 명동 시절, 연배가 가장 높았던
명동 터줏대감은 공초 오상순(1894∼1963).
‘폐허’의 동인으로 한국 시단의 1세대인 공초는
평생 고독 방랑, 담배를 친구 삼아 독신으로 보냈다.
집도 없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주로 조계사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청동다방에 나와 하루를 보냈다.
청동다방은 사보이호텔 뒤
좁은 골목 네거리에 있었다.
대부분 가난했고, 술을 좋아했던 문인들
당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문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암울하기만 했다.
술은 세상을 잊게 하는 망각제,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탈출구.
박인환처럼 술과 가난으로
건강을 해친 문인, 예술가들은
젊은 나이에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 한 사람이 ‘보리밭’, ‘나뭇잎배’,
‘광복절 노래’ 작곡자 윤용하(1922~1965).
명동에서는 이들 외에도 조병화, 김수영,
조지훈, 유치진, 김환기, 변영로, 이중섭,
박계주, 노천명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함께 어울려 논쟁을 하하며 술에 취하곤 했다.
그러나 문인들의 명동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무엇보다 명동이 개발된 탓.
1960년대 말이 되면서 명동은
금융과 상권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문인들의 사랑방이던
값싼 술집과 다방들은
서린동 무교동, 청진동으로
옮겨 갔으며 그 대신 명동에는
은행의 본점과 백화점, 고급 의상실
등이 들어서 금융·쇼핑가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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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명동의 밤.
1950년대 명동은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친지들 안부도 궁금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
박인환 이진섭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는 이진섭이 서너 살 위였으나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둘 다 신문기자를 했는데
박인환은 도중에 그만두고
'마리서사' 책방을 차렸다가
그나마도 적자를 견디다 못해
타인에게 인계해 버리고 만다.
두 사람은 매일 명동입구에
있는 주점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박인환이 평소와 달리
매우 우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의 시
'목마와 숙녀'를
좋아하는 여인과
피난통에 헤어졌다가
얼마 전에 만났다는 것.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 시가 '세월이 가면'이고,
이진섭이 즉석 작곡한 노래.
나애심이 그 자리에서 노래불렀지만
처음 레코드 취입은 가수 현인이 했다.
그 후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취입했고
한참 뒤인 1970년대에 와서 박인희가 불렀다.
박인환 시인은 훤칠한 키에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다 한다.
.
우정이란 무엇일까?
'이진섭과 박인환'의 우정
어려울때 서로 힘이 된 두 사람.
그러다가 박인환 시인은
31세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이진섭은 대성통곡.
그러던 이진섭도 1983년,
62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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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은 1950년대 대표문인
1950년대 한국문학사적 특징으로는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문인들.
.
이른바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간
김수영 · 유정 · 박계주 등은 한동안
청천강변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전선이 북상하면서
이들은 인민군 주력 부대를
대신해 평양 방어전에 투입된다.
이 때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으며 간단한 훈련을 받던 김수영이
먼저 탈출을 시도하자 유정 등도 탈출을 시도한다.
이들은 수수밭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지나가는 늙은 농부의 도움을 받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의용군으로 끌려가며 삭발 머리는 모자로 감춘다.
대동강 하류를 건너 남쪽으로 걷던 이들은 곧
평양주둔 국군과 미군을 만나 저희 뜻을 알린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평양형무소에 수용되며,
얼마뒤 인천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후송된다.
인천에서 거제도까지의 기나긴 항해 동안
배 안은 부상자들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고름,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눠놓은 똥오줌, 배멀미 때문에
토한 자국, 구더기 등으로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한다.
심지어 도중에 죽어 바다에 내던져지는
주검이 적지 않았으며, 이런 악몽 같은 현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간 뒤에도 계속된다.
겹으로 포개지 않고는 잘 수 없을 만큼
비좁은 천막, 여기저기 방치된 오물······.
더구나 수용소 안에서는 이내 파벌과 계급,
서열에 따른 하나의 왕국이 형성된다.
인민군 중국군 북한난민 등
17만명.,거제도 포로수용소.
이 작은 왕국의 주도권은 주로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골수 인민군 장교들이 장악한다.
이들은 곧 민간인 반공 포로가 주류를 이루는
남한 출신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횡포를 자행한다.
의복과 급식을 중간에서 빼돌리는가 하면,
눈 밖에 난 포로들을 집단 폭행하거나 살해.
.
밤에 변소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우익 포로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적색 분자가 그들을
변소에서 처치했었기 때문이다.
변소라고 하지만 큰 웅덩이에
널판을 걸어놓은 것이다.
밀어버리면 그대로
오물 속에서 익사한다.
실족으로 익사했다고
변명하면 되었다.
변소 수거 때마다 시체가
몇 구씩 발견되지만 그것은
휘발유로 변소의 밑바닥을
태울 때 함께 태워버리고 만다.
장용학의 『요한 시집』은
그 곳을 무대로 삼고 있다.
.
아침에 변소에 가보면 오물 위로
손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젯밤에 죽은 우익 포로의 손이었다.
고은, 『1950년대』(청하, 1989)
포로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미군들은
이런 만행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중립을
취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이유로 못 본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수영 또한 이북 출신의 골수 좌익
포로들이 장악한 수용소 안에서
고난에 찬 나날을 보낸다.
그는 영어를 잘해 수용소에서
미국인 외과 병원 원장의
통역으로 일한다.
따라서
좀 다른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좌익 포로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처지였다.
1952년에 들어 김수영은
미군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사지에서 벗어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빠져나온 그가
숨어든 곳은 피난지 부산이다. 뼈만 남은
몰골로 누더기를 걸친 채 나타난 김수영을 보고
박인환은 놀람과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박인환은 곧바로 ‘스타다방’으로 달려가
김경린 · 이봉래 등 몇몇 가까운 사람에게만
이 사실을 알린다. 김수영은 독신으로 지내던
이봉래의 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거제도
반공 포로 석방에 즈음해 친구들의 주선으로
도민증(道民證)을 발급받고 나서야 비로소
피난지에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젊은 문학도 유정은
미군 부대의 페인트공으로
일하다가 반공 포로 석방 때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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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사람들에게 1950년대는 6·25
한국전쟁의 전란 및 피난과 함께 열린다.
1948년 남과 북의 권력층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따로 세운다.
삼팔선은 남한과 북한의 대립선이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경계선이며,
세계에서 아시아 쪽의 분단선이 되어버린다.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북진 통일"을 구호로 주장하고,
북쪽은 "국토 완정론"을 내세운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의 휴전 협정으로
매듭지어진 한국전쟁은 20세기 한국사의
커다란 비극으로 기록된다. 이 전쟁은 남북한
인구 1/5인 6백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낳는다.
3년 남짓 이어진 이 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집과 공장뿐 아니라, 도로와 철도 및 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이 거의 다 파괴된다.
이로 말미암아 휴전 뒤에도
폐허 속에서 가족과 거처, 생계 수단을
잃고 떠도는 살아남은 이들의 절망과
비탄이 오래도록 한반도를 뒤덮는다.
보신각 종
휴전 협정과 함께 포성이 멎지만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다.
주요 교전 당사국끼리 종전 협정 또는
평화 협정을 맺은 적이 없는 것이다.
6·25는 삼팔선에 의한 유동적이고
잠정적인 분단을 휴전선에 의한 고착적이고
항상적인 분단으로 바꿔놓는다. 전쟁으로 성장
잠재력을 유실한 대한민국은 이후 정치 · 군사 ·
경제 ·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의 지원에
기대게 되며,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로써 남한 정권은
자주성을 잃어버린 채
자본주의 진영의 최강대국인
미국에 예속되는 길을 걷는다.
전쟁이 남긴 상흔과
파행으로 얼룩진 정치,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으로
한국 사회는 오래도록 가난과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서민 대중 사이에 현실 도피와
패배주의 정서를 담은 비탄조의
유행가들이 퍼져나간 것도 전후
남한 사회의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이 시기에는
「가거라 38선」
「굳세어라 금순아」
· 「꿈에 본 내 고향」
· 「이별의 부산 정거장」
· 「단장의 미아리고개」처럼
전쟁으로 말미암은 이산(離散)과
이향(離鄕)의 아픔을 반영한
노래 또한 유행한다.
매체가 발달하면서
대중 문화의 싹이 튼 것도
1950년대의 일이다. 이에 따라
외국의 대중 음악도 빠르게 퍼지는데,
그 한 가지 보기가 ‘맘보 음악’이다.
맘보는 음악만이 아니라
춤도 유행되고, 패션에도
영향을 미쳐 ‘맘보 바지’가
나오기도 한다.
전쟁 뒤 한국 사회의 일각에는
미군 PX나 암시장에서 흘러나온
군수품과 밀수품이 범람하고,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대다수
서민과 달리 일부 상류층은
호사와 향락을 누리기도 한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자유 부인」은 춤바람이 난
대학 교수 부인을 내세워 향락과 탈선에 빠진
유한 계층의 행태를 묘사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이 대중 소설은
『서울신문』의 발행 부수를
크게 신장시킬 뿐 아니라,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일약 베스트 셀러에 오른다.
1953년 2월 15일 0시를 기해
대한민국 정부는 화폐 개혁을 선포한다.
.
이에 따라 ‘원’ 표시의 통화가 금지되고
‘환’ 표시의 통화가 유통되는데, 교환 비율은
1백 원에 1환으로 정해진다.
이윽고 물가가 천정 부지로 올라,
미국의 압력 속에서 단행된 이 때의
화폐 개혁은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용마 역사 문화공원
망우리 공원.,박인환 시비
시비 앞면
시비 뒷면
박인환 시인 묘소.
인제군에서 태어난 시인 박인환의 얼은 기리고자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옆에 건립된 박인환문학관은
그가 집필하던 시절의 공간을 전시실에 구성하여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모더니즘 시의 대표시인인
그의 작품으로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등이 있다.
개관일 : 2012년 10월 5일.
..................박인환 시인.....................
아버지 광선과 어머니 함숙형 사이에서
장남으로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 졸업.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의학전문학교 입학
1945년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 서점을 경영
서점을 그만두고.,자유신문. 경향신문 기자.
6·25전쟁때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1956년 3월 20일
밤 9경 심장마비로 30세 나이에 죽었다.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
문단에 나온 뒤 〈남풍〉(신천지, 1947. 7)·
〈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였다.
,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
시 〈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생전에
〈박인환 시선집〉(1955)이 나왔고, 이어
〈목마와 숙녀〉(1976) 등이 발행되었다.
죽기 1주일 전 지었던 <세월이 가면>은
뒤에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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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이봉구 조병화 천경자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
폐허의 명동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사람들은
술과 낭만을 사랑한 문화예술인, 문인들이었다.
그들 예술인들은 전후 허무와 절망을
술로 달랬고 당시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
박인환과 전혜린 죽음은 명동의 전설이었다.
천상병, 김관식의 기행은
‘명동 야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화제거리였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소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심한 고문과 옥고로
몸과 마음이 깊이 상해 가난과 방탕, 주벽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71년 그의 첫 시집 〈새〉는,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가 서울시립
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유고시집으로 엮은 것.
이후 그의 시는 동심에 가까운
순진성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서정으로
가난·죽음·고독 등을 일상적이고 소박하며
순수한 말로 표현했으며, 간경변증으로
죽음을 앞둔 시기에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인생을
받아들이는 달관과 관조의 태도를 형상화.
......천상병 시인(1930~1993).......
19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서울 인사동 큰길은 총길이 2km 남짓.
그러나, 인사동 큰길 뒤쪽으로 구비구비
이어지며 뻗어나간 골목길은 큰길의 10배.
인사동 큰길에서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면
‘귀천’ 간판 작은 찻집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아내가 운영을 한다.
그 찻집 벽면에는 천상병 시인의
커다란 웃는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했던 시인이었다.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놀면서
동료 문인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 2천원을
거리낌없이 뜯어내도 그를 미워한 사람은 없으며,
시인 그 자신도 당당함을 잃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 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 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기인이라고 정의한다면,
천상병 시인, 그는 기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 히메지 출생.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살다가 해방 후 귀국.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
당시 마산중학교 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띈다.
1949년 그는 김춘수의 추천으로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
곧 6·25가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
1952년 『문예』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으며 문단에 나온다.
195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서적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
1967년 어이없게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
6개월 정도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만 살아간다.
고문 후유증과 심한 음주벽, 영양 실조로
심신이 황폐해진 천상병은 1971년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서 쓰러진다. 행려 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그는 이 때
행방 불명인채 지인들과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그러자 가까이 지내던 문우들은
천상병이 어디 가서 죽은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서로 뜻을 모아 그의
첫 시집 ‘유고’ 시집인 『새』를 간행.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
그에게 새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自由)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
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시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미 초연한 태도로
삶의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새」와 마찬가지로 「귀천」에서도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존의 삶을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다. 누구보다도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시인은 놀라운 관용과 초연함으로 삶을 끌어안는다.
천상병이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삼은.,가난.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자연스러운 일.
오죽하면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노래했을까.
여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할
정도 가난이라면 몹시 심한 가난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저승에도 영영 못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한갓진 걱정을 늘어놓고 있을 뿐.
이미 가난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따로
불만을 갖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 시인.
오히려 그 가난을 길들이고, 즐겼던 그.
가난의 고통과 힘을 동시에 체득한
시인은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삶의 신비에 대해 경이감을 나타낸다.
가난은 비참이나 불행,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족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조촐한 행복의 조건들을
욕심 없이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원천
이런 마음을 지니고 살면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작은 것의
귀함과 삶의 거대함, 그리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병원에서 요양하며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민다.
시인은 밤 버스를 타고 있는 서민으로서
감당할 현실을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
“비시적인 것과 시적인 것,
일상적 관찰과 철학적 의미,
초연한 관조와 정치적 관심,
소박한 표면과 깊은 내면을
결합하는 독특하고 뛰어난 시”
천상병은 후기로 접어들며 한결 단순하고
소박하며 고졸한 세계를 보여준다.무엇보다
그의 시는 순수한 어린아이 순진성을 지향한다.
어린 것, 순진한 것, 약하고 착한 것을
내포한 동심에 대한 사랑과 선(善) 지향은
천상병 시 세계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 하느님 예찬 시를 쓴다.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순진.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기적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었던 시인은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같은 해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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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귀천
2014.3.29 인사동 찻집 귀천
김관식 시인은 37세에 세상을 등졌다.
평소 술을 좋아해서 죽을 때도 막걸리
주전자를 천정에 매달아 놓을 정도였다.
술로 생긴 병으로 술마시지 못하자
눈으로나마 술주전자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하니 술사랑은 남달랐다.
한학 대가인 정인보, 오세창,
최남선에게서 '주역' '반야심경'
'동의보감' '당시(唐詩)'를 배웠는데,
스승들에게 신동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천재성을 타고난 시인이며
또 다른 천재성을 보인 기행.
한국 문단의 거물 중의 거물이며
십수 년 연상인 김동리, 박목월을
그는 김군, 박군이라고 불렀던 그.
32년 연상인 월탄 박종화 선생이
참가한 문학상 시상식에서 월탄의
축사가 길어지자 "어이, 박군 자네
이야기가 너무 길어. 나도 한마디
해야겠으니 이제 그만 내려오지"
김관식은 서정주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 '연(蓮)',
'계곡에서' 등으로 문단에 데뷔.
그가 공덕동 서정주 집을 드나들며
미당의 처제를 마음에 두고 청원 후
거절당하자 음독자살 소동 끝에 결혼
결국, 미당 서정주와 동서지간이 되었다.
.
그 명동이 문단사에서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1970년대 전후.
문단 대표적 술꾼이며
명동의 터줏대감이었던
조지훈· 김수영·김관식·
김광주 등이 차례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
1973년 8월 말 명동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던
중앙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면서 더욱
썰렁해진 명동 거리를 마지막까지 지킨.,이봉구
.
깊은 쌍꺼풀 눈에 듬성듬성 자란 턱수염과
반백의 머리, 그런 모습으로 그는 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로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앞에는 대개 막걸리가 그득하게 담긴
커다란 대접이 놓여 있었는데, 어느 한곳만
응시하다가 이따금 한두 모금씩 들이켜곤 했다.
이봉구가 명동에서 가장 많이 찾은 술집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경영하던 ‘은성’.
이봉구를 만나고 싶으면 누구나 ‘은성’을 찾았고,
‘은성’에 그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누구나 궁금.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전혜린
이봉구를 처음 만나 각별하게
친해진 곳도 주점 ‘은성’이었다.
65년 1월 10일 저녁
자살을 결심한 전혜린이
‘은성’으로 찾아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명동백작 이봉구였다.
왜 전혜린은 이승에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이봉구를 선택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이봉구가
‘명동 백작’으로 불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김수영 같은 사람의 요설이나
독설, 김관식 같은 사람의 천의무봉식
좌충우돌 등 시끄럽고 번잡한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그와 술자리를 함께하려는 사람들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곤 했다.
명동 시절 그가 세운
술자리의 세 가지 원칙
첫째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
둘째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 것,
셋째 돈 꿔 달라는 소리를 하지 말것.
그래서 그가 동석한 술자리는 항상
조용하게 시작돼 조용하게 끝났다.
명동 술자리에서 그의 ‘권위’는
문인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인정됐고,
‘명동 백작’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이봉구가 명동 거리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74년 봄 고혈압으로 쓰러져 수유리 집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때는 국립극장의 이전과 함께
명동이 문화예술인의 거리에서
유행과 소비의 중심지로 탈바꿈
하던 시기와 일치했다.
그러나 이봉구는 여전히
명동의 ‘살아 있는 전설’
문인들의 아지트는 종로 일대로,
인사동으로, 세검정으로 분산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그들의 기억 속에
명동과 이봉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
명동을 소재로 한
이봉구의 소설들을
떠올렸다.
이봉구는 생전에 다섯 권의 창작집을 남겼는데
그중 세 권이 명동을 무대로, 명동을 드나들던
문인과 예술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었다.
『명동 20년』『명동』 그리고
『명동, 비 내리다』가 그것이다.
문학적으로 주목을 끌 작품들은 아니었으나
5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전후
20년간의 문단 풍속도와 문인들의 애환이
차곡차곡 담겨져있는 작품들이었다.
그것은 이봉구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추구해 온 ‘사소설(私小說)’ 형식의 한 전형.
19세 때인 1935년 중앙일보에
단편소설 ‘출발’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이봉구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청강생으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은 뒤
귀국해서는 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서정주·김광균·오장환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펴내기도 하지만
해방 후부터 연합신문 등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다시 소설로 돌아왔다.
그는 무려 9년 동안 병석에서
목숨을 부지하다가 83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1956년 3월 저녁
주점 ‘은성’에 앉은
박인환(당시 30세)은
시를 쓰고 있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으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탄생한다.
언론인 극작가였던
이진섭(1922~83) 작곡.
...............방송작가 이진섭.
본관 전의(全義). 호 청재(靑齋). 서울 출신.
아버지는 개화파 집안으로 은행원·광산업을
하였던 재홍(載弘)이며, 어머니는 변씨(卞氏).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1954년 박기원(朴基媛)과
혼인하여 4남매를 두었다.
1941년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리갑류
(文理甲類)에 입학하여 1948년 수료하고,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46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와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를 겸직,
1949년 서울신문 주간부 기자,
1951년 국제신보 문화부 차장·부장,
1952년세계통신(로이터) 편집부장 등.
1953년 조선일보 외신조사부 기자,
1954년 경향신문 조사부장·정경부장
1958년 안양촬영소 기획위원을 지냈다.
1970년 코리아헤럴드 편집위원,
1972년한국방송공사(KBS) 심의위원
저서로는
≪영원한 여인상≫(1960)·
≪진실한 애정≫(1962)·
≪저하늘에 내가 있다≫ (1966)·
≪한국의 언론≫(1967)·
≪화풍 花風≫(1968)·
≪용상왕자 龍祥王子≫(1969),
수필집으로
≪물방울 인생≫(1978).
시나리오로는
1959년<망향 望鄕>
이후 <생명 生命>(1959)·
<대원군과 민비>(1960)·
<묘향비곡 妙香秘曲>(1965)·
<방울대감>(1966) 등 다수
번역서로
스테본 빈센 베넬의 ≪미국은 이렇다≫(1953),
에드워드 원터의 ≪세뇌 洗腦≫(1953),
펄 벅의 ≪인생항로 人生航路≫(1955),
게오르규의 ≪제2의 찬스≫(1957),
스페테인의 ≪위대한 살인≫ (1959),
퓰리처의 ≪신문왕 新聞王≫(1960),
셰익스피어의 ≪소년소녀를 위한 동화≫.
그 밖에 방송극 및 라디오드라마로 30여 편
다재다능하며, 특히 어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어
외국의 신 문학을 빨리 접하여 많은 번역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라틴뮤직과 샹송 해설가
그 방면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
.
‘백치 아다다’의 가수 나애심
(가수 김혜림의 모친)이
곡을 따라 흥얼거렸다.
......................나애심............................
1930. 9. 5 ~ 2017. 12. 20 (향년 87세)
가수 겸 영화 배우이다. 본명 전봉선이다.
평남 진남포 출생. 1949년 연극배우로 데뷔
1953년 노래《밤의 탱고》로 가수 데뷔하였다.
1955년 《미망인 (과부의 눈물)》
1956년 《백치 아다다》
1958년 《종말 없는 비극》
1963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81년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나중에 들어온
테너가수 임만섭이
곡을 보더니 열창했다.
테너가수 임만섭
이날 낮에 망우리에 있던
첫사랑 여인의 묘지에 다녀왔던 박인환은
이 시를 남기고 사흘 뒤 만취한 상태로
숨져 망우리 그녀의 곁으로 갔다.
........................
.......................
64년 1월 9일
수필가 전혜린(당시 31세)은
밤색 밍크 코트를 입고
명동의 ‘은성’에 나타났다.
그녀는 쾌활했다.
“국제 펜클럽대회에 나가려고
건강진단을 받았거든.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 거야…. 박인환이 그리워.
가난에 시달리면서 미군 담요로 외투를 만들어
입고 머플러를 휘날리며 시를 읊던….”
‘은성’을 나오면서
전혜린은 친구에게 속삭였다.
“하얀 세코날(수면제) 40알을 구했다고!”
그리움.
거리 만이
그리움을 낳는 건 아니다.
아무리 네가 가까이 있어도
너는 충분히, 실컷 가깝지 않았었다.
더욱 더욱 가깝게,
거리 만이 아니라
모든 게, 의식까지도 가깝게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움은.,
전혜린 詩
이튿날 그녀는
수유동 숲길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전혜란(1934∼1965).........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래완료의 시간 속에,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수필가· 번역문학가
평안남도 순천 출생.
법률가 전봉덕(田鳳德)의
1남 7녀 중 장녀이다.
1953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5년 전공을 독문학으로 바꾸어 독일로 유학.
1959년 독일 뮌헨대학 독문학과 졸업, 조교로 근무
유학 중 1955년 가톨릭에 귀의
막달레나(Magdalena) 영세명,
이듬해 법학도 '김철수'와 혼인.
1959년 5월 귀국하여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 강사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으로
위촉되어 일하기도 하였다. 1965년 1월
11일 31세로 자살하였으며, 뜻하지 않은
그녀의 죽음은 전혜린의 총명을 기리는
모든 이에게 충격과 아쉬움을 남겼다.
독일 유학 때 시작된 전혜린 번역작품들
정확하고 분명한 문장력과 유려한 문체의
흐름으로 많은 독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사강(Sagan,F.)의 「어떤 미소」(1956),
슈나벨 「안네 프랑크-한 소녀의 걸어온 길」(1958),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1959),
케스트너(K○stner,E.)의 「화비안(Fabian)」(1960),
린저(Rinser,L.)의 「생의 한 가운데(Mitte des Lebens)」(1961),
뵐(Boll,H.)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4) 등 10여 편 번역
그밖에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
<미래완료의 시간 속에>(1966)가 있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제명으로
1976년 대문출판사(大文出版社)에서
일기가 유작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전혜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한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
여성의 심리로서 분석되는 등 관심의 대상으로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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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 60년대 ‘은성’의 기억을 다룬
‘명동백작’(2004)이 방영됐고, 혜화동에선
‘세월이 가면’이란 연극이 올려졌다.
은성도 인환도 혜린도 가버린 명동,
쓰러진 술병 속에서 우는 바람
(박인환 ‘목마와 숙녀’중에서)만 돌아와
쓸쓸하고 무표정한 시절을 흔든다.
은성 주점 주인.,김성옥 여사.
국민배우 최불암씨의 어머니.
은성주점
외상장부에는
이름을 적지않고
별명을 적었다 한다.
1950년대 문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섯달 그뭄날 외상장부를 소각.
사과 괴짝 만한
'외상장부'였다.
1957년 문인들의
구세주와 다름없던
아버지 김동근씨와
어린 아들이 뱃놀이
갔다가 귀가 길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해
은성 주점을 경영
하시게 된.,어머니.
1958년 가을, 명동의 막걸리집
‘은성’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은성 주점 술집 여주인의 18세
외아들이 서라벌예대에 합격한 때문.
술을 마시던 시인 변영로(1897~1961)가
술잔을 내밀었다. “영한아, 술 한 잔 받아라.”
쭉 들이켠 뒤 막걸리 잔에서
술 지게미를 바닥에 털던 영한.
시인이 냅다 영한의 뺨을 갈겼다.
“이놈, 곡식을 왜 버려?”
영한은 연기자 최불암 본명.
영한의 부친 최철은 영화제작자
48년 영화 '수우' 개봉 시사회를
앞두고 과로로 세상을 뜬다.
어머니는 대한제국 궁내악사를 지낸
분의 딸로 남편을 여읜 뒤 인천 동방극장
지하에 ‘등대’란 음악다방을 운영하다가
명동으로 와서 ‘은성’을 차린다.
단골이었던 소설가 이봉구
(‘명동백작’)는 이곳 풍경을
작품 속에 남겼다.
.
국민배우 최불암씨.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있네.”
박인환 시인의 유작 ‘세월이 가면’ 첫 부분.
명동에서 피어난 예술꽃이 그 뿐 아니지만
'향년 29세'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이토록 슬픈 유작을 남기고 갔을까?
1945년 해방 후 예술인들은 식민시대를 벗어나고
전쟁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문화 르네상스
중심지였던 명동거리., 크고 작은 다방과 주점 등에서
자신의 시간과 예술을 맞바꾸는 낭만을 아로 새긴 문인들.
당시 명동(明洞).
어떤 곳이었을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조선은행(한국은행 본점),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 백화점).
경성우체국(중앙우체국) 등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지로 성장 1970년대까지
예술가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는 문화예술 전당.
명동 중심부에 ‘명동예술극장’이 있었다면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다방과 서점, 명동 유일
공원 등이 명동거리의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지금 명동길(눈스퀘어 건너편)에는
1945년부터 명동을 지켰던 문예서림.
박인환 시인이
‘세월이 가면’을
지었다는 은성주점.
그 인근으로는
음악감상실 ‘쉘부르’,
맥주집 ‘오비스캐빈’ 등.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1960~70년대 청년문화의 성지.
명동9길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예술가들의 후원자를 자처하면서
사재를 털어 첨단 콘크리트 3층 건물
동방문화회관을 지어 문인들에게 개방.
뜨와애모아(불어 : 너와 나)
가수 박인희
배우 이시영
천둥산., 세월이 가면
1950년대 초 3년 간의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전통사회 관습을 깨트렸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살길 찾아 객지를 방황.
아무런 대책이나 방비도 없이
낯선 객지로 내몰렸던 피난민들이
당장 겪었던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
난민에게 생존은 절대절명의 과제.
문인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현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온
‘정신 노동자’ 문인들에게 있어서
관념이 아닌 전쟁 상황은 혹독한 것.
전혀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
유엔군은 흥남 철수에 이어 1.4 후퇴.
전선이 남하 하자, 피난민 물결도 남하.
피난민은 서울 경기도, 충청도로
내려갈수록 더욱 불어나기만 했다.
.
6.25 전쟁 초기 피난 행렬에 비하면
1.4후퇴 피난 행렬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민족의 대이동을 방불케 하였다.
문인 중에는 김이석 · 강소천 ·
한정동 · 함윤수 · 장수철 · 원응서 ·
박남수 · 김영삼 · 양명문 · 이인석
등이 1·4후퇴의 물결에 합류한다.
주먹밥이나 건빵으로 허기를 채우며
남하하는 동안에, 언땅 위로 동상걸린
발을 질질 끌고 가는 사람, 열차 지붕에
올라타고 가다가 낙엽처럼 떨어져내리는
피난민들의 죽음을 헤일수없이 목격한다.
9·28수복 뒤 전쟁 전의 인구를 회복했던
대구와 부산은 1·4후퇴 후 피난민들이 북적
부산 대구는 전쟁통 정치, 언론, 예술의 중심지.
부산 대구는 토착민의 언어에
경기도 · 함경도 ·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 ·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피난지는 토속어 박람회장처럼 들끓는다.
공공 건물은 정부의 주요 기관이나
시설이 차지한 뒤라서 일반인들은
조그만 틈이라도 눈에 띄면
비집고 들어가서 정착
이조차 여의치 않게 되자
부산 용두산이나 완월동 또는
동래 등의 언덕 자락에 임시로
집을 지어 둥지를 튼다.
이 때 생겨난 바라크와
판자촌 문화는 전쟁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자
한 시절의 표상이 된다.
서울에서 소개(疎開)되어 내려온
학교 · 병원 · 교회 · 옷집 · 음식점 ·
다방 · 술집 등이 들어서고, 밤이 지나면
해가 떠오르듯이 피난지에서 이어가는
불안정한 유목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 길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거리는 이런 무리가 만들어내는
암울한 활기로 가득 찬다.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여기서 말미암은 자학과 절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덮는다.
현재 진행형의 전쟁과
후방 사람들의 암울한 정서,
바로 이런 것이 1950년대 초반에
피난민 문학의 발생론적 근거가 된다.
.................
.................
묘비명 : 세월이 가면
무덤 앞 비석(短碑)이 독특한 직사각형
무덤은 마치 생전의 모습처럼 늘 말끔하다.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유족 외에도
어떤 문인이 몇년 전부터 해마다 찾아와
비를 닦고 봉분 뗏장도 새로 입힌다는 것이다.
찾는 사람도 많은 듯, 겨울눈 내린 날
그의 묘소 주변에서 누군가의 발자국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묘비 앞면에
‘시인 박인환지묘
(詩人朴寅煥之墓),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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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3월 14일 명동 선술집에서
시를 짓고 곡을 붙였다는 즉흥시 노래.
이 노래의 가사말인 시와 곡도 좋지만
이 시가 노래를 빚어낸 사연이 애틋하다.
강계순의 박인환 평전에 따르면
박인환은 이 시를 쓰기 전날 망우리
첫사랑의 묘지에 갔다 왔다고 전한다.
박인환의 묘비 뒷면에 글귀.
“시인 박인환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에서 났으며 1956년
3월20일 31세를 일기로 불행한
시인의 일생을 마쳤다.
유족은
부인 이정숙 여사와
자녀 3남매로
세형 세곤 세화가 있다.
여기 친우들의 뜻으로
단비를 세워 그를 기리 추념한다.
그는 선시집 한 권을 남겨 놓았다.
1956년 9월 19일 추석 서(書)”
세월에 따라
‘사랑이 사라지듯’
묘비의 글자도
갖은 풍상에
색이 바래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의 내용을 읽어내려면
다른 자료를 찾아야 할 만큼
2017.11.07.
고 '박인환 시인' 의 장남
'박세형 시인'과의 인터뷰.
고 박인환 시인은 생전에 6.25 전쟁과 허무,
비탄과 우울 속에서 술과 낭만으로 시를 썼다.
박인환 (朴寅煥·1926~1956·강원도 인제 출생)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시인이었지만
몇 푼 안 되는 고료(稿料)로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담배)를 좋아한 멋쟁이였다.
폭격 상흔이 가득한 서울 명동을 주름잡던
문인 중에서 박인환만큼 지적이며 세련되고,
감성 풍부한 시어(詩語)를 다룬 시인은 없었다.
박인환은 가장 1950년대 다운 시인이었다.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포연 속을 누볐고,
그 슬픔을 만가(輓歌)로 노래 부를 줄 알았다.
박인환 하면 우선 〈목마와 숙녀〉가 떠오르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노래말이 생각난다.
1970년대 뜨와에 므와(불어 : 너와 나)
박인희가 부르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목마와 숙녀〉는 노래가 아닌 낭송이지만
박인희의 청아한 목소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인은 1955년 유일한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내고
1956년 3월 20일 밤 9시 경 심장마비로 운명.
당시 그의 아내는 서른,
어린 2남1녀 아이들은
9살· 7살· 4살이었다.
당시 9살이던 박세형(朴世馨·67)씨는
그날 밤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우리 집은 서울 세종로 135번지
(교보빌딩 뒤편) 디귿자 한옥이었어요. "
"집 가운데 펌프 우물푸는 마당이 있었는데
그날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와 토하시니
제가 등을 쳐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
"입에서 활명수 냄새가
났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가셨어요.
그때가
밤 9시 경이
넘고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이미 아버진 눈감으셨어요.”
그와 가깝던 문우 증언으로는,
죽은 이상(李箱·1910~1937)의
기일(3월 17일)을 기해 사흘 동안
술을 마셨고, 죽던 그날 화가 김훈이
사준 자장면 한그릇을 먹었을 뿐 빈속.
.
그는 염상섭·박종화·현진건
같은 당대 주호(酒豪)가 아니라
그저 풋술을 즐기던 여린 시인이었다.
그날 술을
이겨 내지
못했던 것.
“당시 부모님은 사랑채를 쓰셨고
저는 외조부와 한방을 썼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늦게
외조부가 잠든 저를 깨웠어요.
‘이놈아, 네 애비가 죽었다’시며…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제가 어떻게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눈을 비비며 어머니가 계신 사랑채로 갔더니
아버지 시신이 옥양목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고 눈은 감고 있었고요.
아버지 친구 송지영 이봉구 시인
증언은, 눈도 못 감았다고 하는데
제 기억으로 그런 것 같지 않았어요.”
“삼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니
사흘 동안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댓돌에 앉아 비를 보며 생각했어요.
다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우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하고 말이죠.”
장남 박세형씨는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이 점점 깊이 다가와
오래도록 가슴을 짓눌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왜
별안간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제 나이 15살 때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보다 16년을 덜 살았다’고
되뇌었고, 서른이 되자 ‘아버지보다
1년을 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보다 오래 살면서 더는 죽음을
떠올리는 공포는 사라졌어요.”
.
“시인 이전에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생활인이셨어요.
자력으로 솔가해 자식을
부양할 생활인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참혹했어요. 당시 고료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됐을까요?”
박인환은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
두꺼운 겨울외투를 1956년 봄이었던
3월 20일 운명하기 전까지 걸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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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인환 시인의 장남인
박세형 시인은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영문과 최인호(崔仁浩·1945~2013)는
같은 학번이고 마광수(馬光洙) 교수는
국문과 1년 후배. 같이 수업 듣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국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지방 출신들이 70%나 됐어요.
‘나는 어느 고교를 나왔는데, 고2때 전국
백일장에서 1등을 했다’는 얘기부터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10번 읽었다’는 얘기까지 문학깨나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렇게 소개했죠.
‘연대 정외과에 떨어져
재수해서 왔다’고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죠. ‘아버지가
시인 박인환인데, 그렇다고
시 쓰러 온 것은 전혀 아니다’.”
마음속으로 절대
아버지처럼 문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
“문학이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문학을
안 했다면 평범하게 사셨을 테니까요.
집안의 가장은 결혼해
땅에 발붙이는 걸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걸까?
현대건설 리비아 현지
업무부장이었던 그가 회사
구조조정에 반발, 사표를 던진 것.
1년 넘게 회사와 송사(訟事)
“그때 저절로 시가 나오더라”.
“직장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제가 바닥으로 떨어져 보니
시가 저를 구제하더군요.
정신없이 썼어요.
유명한 미술평론가 친구놈이 제게
‘미적 감각이 놀랍다’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책과 옷가지 모두 버려
시인이 살았던
세종로 135번지는
박인환의 처가였다.
그곳은 현재 교보생명
광화문 본사 사옥 뒤쪽이다.
그는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제 외조부는 일제시대 은행지점장을 하셨고,
창덕궁 이왕직(李王職)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분.”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
한일병탄 이후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이 아닌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됐다.
시인의 장인은 고종의 재산과
재정 운영을 맡았다고 한다.
“외조부는 딸만 둘을 두셨는데,
어머니는 맏딸과 14살 차이 둘째
어여뻐하시며 애지중지 키우셨어요.
그런 사랑을 받아서인지
어머니 성격이 의존적이셨어요.
평생 모든 재화를 처가를 통해 받았으니
돈 개념도 없으셨어요. 원서동(창덕궁 인근)
시댁에서 밤마다 친정이 그리워 우셨다고 해요.
딸 소식이 궁금한 외조부가
퇴근길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우는 모습을 보셨어요.
하는 수 없이 외조부가
조부에게 얘기해 신접살림을
처가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수레에 한가득 책을 싣고 처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합니다.”
시인의 아내는 귀하게만 자라서였는지
생활력이 없었고 비현실적이었다고 한다.
“어깨 폭이 좁아 어머니처럼 한복을 잘 입은
이를 본 적이 없어요. 키가 170cm로 늘씬했고
진명여고 다닐 때 농구선수 포지션은 포드였어요.
얼마나 날렵하셨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한복을 차려입으셨다면
날아가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또 어머니만큼
얼굴 화장이
아름다운 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어요.
그런 분이 서른에
청상이 되어 평생을
홀로 사셨어요.”
맏이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잖아요.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사실, 저와 어머니는
편한 사이가 아니었어요.
뭐랄까 묘한… 생활 안에
불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불화의 원조는 제 안에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 나이
고작 서른에
애가 셋이었죠.
절망의 깊이를 이해한들
어린 자식들은 알 수가
없을 겁니다. 어머니는
떠난 아버지의 책들,
사랑채 벽면을 빼곡히
둘러쌌던 아버지의 흔적을
죄다 버렸습니다.
넝마주이가
다 가져갔어요.
아버지 옷가지들도
없애 버리셨어요.
우리 집처럼 선친의
유품이 없는 집이
없을 거예요.
그저 사진 몇 장밖에.”
시인의 부인 이정숙은
2016년(향년87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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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이 운영했던
<茉莉書舍> 이야기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다니던
박인환은 광복 이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받은 3만원과
작은 이모에게서 2만원을 얻어
종로 3가 2번지(낙원동 입구),
이모 포목점 옆에
서점을 열었다.
서점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던
‘마리서사(茉莉書舍)’. 김광균 김규동
이봉구 박영준 김수영 이시우 설정식
김기림 같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혹자는 ‘주인이 서점에 없고
장사는 안 되는 데다 책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아닌 문학청년들이 모여서
떠드는 소굴’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마리서사
진열책 대부분이
아버지가 보유하던
외국문학 서적이라 했어요.
아버지와 절친했던 시인 김수영은
‘마리서사를 빌어,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 구별이 없던
몽마르뜨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지요.
아버지는 문우들과 모여
저녁을 먹더라도, 자기가
밥값을 내고 싶어했어요.
.
책 판 돈은 대개
그렇게 나갔어요.”
시인은 서점 손님으로 왔던
이정숙을 알게 되어 마침내
약혼하기에 이른다.
서점은
영업부진으로
몇 년 안가 문을 닫지만
반려(伴侶)를 찾은 셈이다.
“두 분은 마리서사에서 처음 만나셨어요.
여성잡지사 기자였던 어머니의 사촌언니
(이석희)와 누구를 병문안 가다가
우연히 서점에 들렀대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쪽방 같은 곳에서 여름
모시옷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나와 자리를 권하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었다고 해요.
두 분은 많은 시간을
명동에서 보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시의 첫 독자였어요.
시를 쓰면
꼭 어머니께
먼저 보여드렸습니다.
또 그 무렵 개봉하던 영화는
거의 모두 보았다고 하고 두 분이
명동에 나타나면 문우들이
‘한 쌍의 학(鶴)과 같다’
고 말했대요.”
광복 후 미 군정 시절
MPEA(미국 8대 메이저들의
외국배급 카르텔)의 한국사무소가
1946년 생겼다. 정식 명칭은 중앙영화배급소.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배급
한국영화는 연간 4~5편에 불과했다.
당시 이정숙의 사촌언니
이석희의 남편 임동규씨가
중앙영화배급소에 재직했다.
그가 박인환에게 시사회 초대권이나
개봉관 표를 두 장씩 자주 주었다고 한다.
박인환·이정숙 두 커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충무로 바닥을 누볐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생전 많은 영화비평을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가 경기중에 다닐 때부터
시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요.
당대 문인처럼 서양문물을
체감한 유학파도 아닌 분이
어떻게 첨단의 모던한 현대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저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돼요.
항간에는 아버지가 경기중을
자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경기중에 다닐 때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 자리에 있던
부민관에서 영화를 보다
선생님에게 들켜 퇴학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 이모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학창시절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열면 외국영화 포스터가
두루룩 굴러 나왔대요.”
1948년 5월 결국 두 사람은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서점 ‘茉莉書舍’의 유래는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나왔다”
| 서울 종로3가 2번지, 파고다공원 근처에 있던 서점 마리서사. 박인환이 소장하던 문화·예술 서적이 가득했다고 한다. | 박인환의 서점 ‘마리서사’의 이름은 독특하다.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일부 문인들은 ‘마리’라는 명칭이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 안자이후유에(安西冬衛)가 31살 때 출간한 첫 시집 《군함 말리》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말리(茉莉)란 외래종 떨기나무의 일종. 당시 말리를 일본에선 ‘마리’라 불렀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도 훗날 “박일영(朴一英)이란 화가가 ‘서점 상호를 시집 《군함 말리》에서 따 준 것’이라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장남 박세형씨는 다른 설을 제기했다. “아버지는 프랑스의 여류 예술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좋아하셨는데 그분의 이름 ‘마리’와 관련 있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당대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등과 교우(交友)하신 분입니다. 자유로운 환상과 감상을 화폭에 담은 독특한 화가였다고 해요. 저나 어머니는 《군함 말리》보다 ‘마리 로랑생’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
박인환의 사후 20주기가 된 1976년 후손들은
생전 아버지가 펴낸 《선시집》(전체 54편)에다
이후 발표된 시, 미발표 유작(遺作), 첫 시집에서 빠진
이전 시들을 더해 시집 《목마와 숙녀》(61편)를 펴냈다.
“본래 첫 시집 《선시집》은 한정판으로 나왔었는데,
그 후 화재로 절판돼 시중에서 보기가 어렵게 됐어요.
물론 월간지, 문학지 등에서 아버지의 시 일부를
초록(抄錄) 전재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렇게 거의 모든 시편을 묶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전 어머니에게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시집이 잘 나갈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게 어쩌면 현실화됐습니다. 《목마와 숙녀》가
10만 부 이상 팔렸으니까요. 자식들 결혼할 때 인세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시집장가 갔으니 말이에요.”
—많은 시 중에서 시집 제목을
왜 ‘목마와 숙녀’로 정했나요.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라는 도입부가 리드믹하지 않습니까. 그 시 속에
뭔가 많은 그림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1971년인가 72년인가 박인희라는
가수가 낭송을 해 크게 알려진 후였어요.”
박인희의 감성적 목소리에 실린
목마와 숙녀〉는 쓸쓸함이 묻어 있다.
유신이라는 시대적 분위기까지 더했다.
당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중략)’에서
뭔지 모를 슬픔에 당시 국민이 젖어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명동쌀롱’에 모인 예술가들이 박인환의 시에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붙여 소위 ‘명동 엘레지’로
알려진 시가 〈세월이 가면〉이다.
1950년대 명동의 주점
<은성〉에서 탄생한
것으로 회자한다.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崔佛岩)씨의
어머니가 주인. 곡은 박인환의 절친인
이진섭이 만들었다. 박씨의 말이다.
“시는 말이죠,
영감이 떠오르면
후닥닥 금방 쓰잖아요.
굳이 퇴고를 안 하죠.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씁니다.
그런데 작곡은 달라요. 시어에 맞춰
작곡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시에
즉흥적으로 곡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월이 가면〉
악보를 본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됐나요?
세종로 집으로 아버지와 이진섭 선생이
왁자지껄하게 오셨는데, 그날 8절지 도화지에
〈세월이 가면〉이 적혀 있었는데 좀 특이했어요.
콩나물 대가리 같은 음표는 없고,
아라비아 숫자가 잔뜩 있었거든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음표더라고요.
예를 들어 ‘도·미·솔’ 하면 ‘1·3·5’라는 식으로….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으셨어요.
〈세월이 가면〉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불렀으리라 추정해요.
왜냐? 제가 어렸을 때
사랑채에서 두 분이 함께 불렀던
샹송이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어떤 샹송인가요.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라모나’라고 하는 노래였어요.”
그는 샹송의 리듬을 콧노래로 불렀다.
“요절 시인의 시가 지금도 회자하고,
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명동을 활보할 당시
다 어렵고 참혹하던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불행하게 가셔야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결국 아버지는
불행한 시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아버지 시를) 좋아하고,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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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시인의 부인
사망.,2104년7월25일
이정숙 여사는
박인환 시인 사후
58년 4개월 세월을
홀로 지냈던 셈이다.
망우리공동묘지가
만장이 되어 부부는
합장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