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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휴전 60주년 한국전쟁중 포로들의 판이한 운명

마블마운틴 2015. 9. 25. 10:02
휴전 60주년 포로들의 판이한 운명





한국 전쟁중,국적이 다른 10만명의 포로가 생겼다.그들의 운명은 포로가 됬을때 탄피가 떨어져 전쟁은 끝났지만, 반면 다른 한쪽에선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됬었다.그들의 기구한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연합군 포로는 호송되어 벽동 수용소로 옮겨져 중국 지원군이 관리했다.1953년 9월 쌍방의 포로 교환때,수용소에 있던 연합군 포로는 1만명이 넘었다.사진은 1950년 운산 전쟁중,중국 지원군 39부대에 포로로 잡힌 미국 병사들이다. 




중국과 북한 포로는 전쟁 초기 대부분 부산 수용소로 또는 거제도로 옮겨졌다.전쟁이 끝난후,중국과 북한 포로는 대략 10만명이였다.사진은 1950년 9월 25일,미군이 서울을 수복할 당시,시민 한명이 북한군 포로에게 발끼질을 하고 있다.(역자주,한국이 먼저 서울을 수복한걸로 아는데 미국에서 먼저 수복을??) 




1950년 8월 17일,북한의 303부대가 고지전에서 5명을 제외한 26명의 미군 포로를 총살했다.사진은 미군 생존자가 총살에 가담한 북한 군인을 지목하고 있다.지목과 동시에 사형이 집행됬다. 




전쟁 초기,수용소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다수의 연합군 포로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줄줄이 죽어갔다.1951년,휴전이 논의되자,벽동 수용소 상황은 호전되었다.포로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았으며,각종 오락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사진은 1952년 2월 16일,미군 포로가 수용소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벽동 수용소,포로들은 매일 약 6시간 수업을 받았다.사진은 두명의 병사가 삐라를 흩고 있다. 




남쪽 상황,연합군은 북한과 중국 포로들에게 개조활동을 시키고 있다.신부를 초정해 그들에게 사상 교육을 시켰다.사진은 1951년 1월 24일,거제도 수용소, 중국 지원군 포로는 한국 고아를 위해 양말을 만들고 있다.(역자주,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기사는 중국 기사입니다.제 의견이 아닙니다.) 




사진에 왼쪽은 연합군에서 나온 성경책이다.오른쪽은 지원군에서 나온 물건이다. 




해방전쟁중,중국 인민 해방군은 전 국민당 병사들을 재편성했다.오히려 미국과 대만은 역 이용할 기회를 얻었다.항복한 군인들은 미국과 대만의 결정하에,수용서 내에 지위권을 얻어 식량과 물자 배달을 조정했으며,심지어 북한과 중국 포로를 폭력으로 대했다.사진은 한 포로가 수용소를 탈출하려 들자,다른 포로에 의해 강제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불리한 환경속에,중국 포로들은 여러번 반발했다.그리고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유명한 '거제도 사건'이다.1952년 5월,중국 포로들은 소용소 관리 하던 미국 사령관 토드 준장을 납치한다.토드 준장은 폭력을 시인하며,안전을 보장과 석방할 것을 밝혔다.'거제도 사건'후,미국측은 수용소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사진은 1952년 5월 15일,지원군 포로가 기자회견에서 토드 준장이 안전 보장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1949년 맺어진 《제네바 조약》규정엔 전쟁이 끝나는 즉시 포로 전원을 송환 해야한다고 밝히고 있다.북한과 달리,미국측은 자신이 포획한 포로들이 중국과 북한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들을 활용해 어떻게 이득을 얻을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이른바 '이데올로기 전쟁'이다.미국측은 포로 본인이 원하면 남을 수 있거나 또는 본국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규정을 뒀다.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은 강하게 반대했다.전쟁이 끝나고 15개월 동안 송환 문제에 있어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1953년이 되자,쌍방은 송환하는데 협의했다.——60일 안에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자는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으로,또는 중립국으로 송환이 결정됬다.어디로 갈지 90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하기 위해,연합군은 중국 포로들이 반공 표어를 입혔다.심지어 몸에다가 대만 국기를 세기게 했다.사진은 1953년 9월 27일,지원군 포로들이 판문점에서 자신의 몸에 세기지 말라며 연합군쪽을 향해 항의하고 있다. 




사진은 1953년 9월, 중국 포로들이 송환되고 있다. 




사진은 1953년,송환된 북한 여성 군인들이 대규모로 미군의 행위를 폭로하고 있다.(역자주,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이 기사는 중국 신문입니다.절대 제 의도는 아닙니다.마오쩌둥 개객이,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개객이,공산당 개객이) 




송환된 병사가 송환해준 미국 기사를 때리려 하고 있다. 




지원군 포로중 3분 2는 대만으로 향했다.그 외에 소수는 중립국인 인도를 신청했다.사진은 1954년,대만으로 가는 지원군 포로이다. 




사진은 1953년 6월 26일, 부산, 한 여인이 한국에 남기로 결정한 북한 병사에게 불을 붙여주고 있다. 




사진은 1953년, 한 미군 포로이다——존 데니스 송환 현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미군 포로 명단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 망연자실하고 있다. 




연합군 포로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송환됬다.사진은 1955년 2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낸 미군 파이럿인 하워드 피셔 중위가 집에 돌아오자 침대 위로 뛰어 나르는 모습이다. 




사진은 1953년, 북한의 포로였던 영국 병사가 본국으로 돌아와 부인과 환여의 키스를 하고 있다.. 




연합군 포로들은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다——한국군의 300명 포로들은 북한으로,미국군 21명은 중국으로 선택했다.미국 병사들이 중국을 선택하자,미국에서 강하게 항의했다.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손가락질 하며 반역자라고 했다.그러나 중국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미국 내에서 극단적인 반공인 매카시즘과 냉전 분위기가 강했었기 때문이다.사진은 1954년 1월 26일, 판문점, 호킨스와 그 외 2명의 병사들이 중국행을 선언했다. 




사진은 1954년 1월, 본국으로 송환을 거부한 5명의 미국 병사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트럭 옆에 표어는 '우리는 평화를 위해 남을 것이다.'(역자주,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공산당이 싫어요.) 



출처 : 렌즈로 본 세상만사
글쓴이 : 올빼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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