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담
(현대 직원들과 어울려 격의 없는 경영주의를 꿈꿔온
아산 정주영 회장의 사진들)
MC : 여기에 있는 사진들에선 누가 대기업에 회장님이고,
누가 직원인지 모를 정도로 허물없이 즐거워 보여요.
회장님에게 근로자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峨山 : 나에게 그들은 같이 몸을 부딪히며,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란다.
나 자신이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나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일생은 기능공,
근로자들과 함께한 세월인 거지. 작업을 몰아칠때는 혼이 나가도록 무섭게
몰아쳤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과 한데 어울려 허물없이 술잔도 나누고
팔씨름도 하면서 육체적으로 고달픈 그들의 휴식에 동참하고자 했었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했었으까...
(하계 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도 하고 트럼펫을 불던 아산 정주영)
MC : 회장님에 취미가 궁금합니다. 혹시 회장님도 노래나 스포츠를
좋아하시나요?
峨山 : 그럼 물론이지. 난 주로 윤향기의 ‘이거야 정말’과 송대관의 ‘해뜰날’,
서유석의 ‘가는 세월’ 같은 노래들을 즐겨 부르곤 했지.
스포츠도 마찬가지로 많이 좋아했었어. 씨름이랑 야구를 특히 좋아해서
하계 수련회 같은 곳에 가면 내가 그때 나이가 꽤 많았었는데도
새내기 사원들에게 배지기 같은 기술로 이기곤 했었지.
MC : 회장님에게 가족의 의미는 남다를 것 같아요.
峨山 : 난 유가적 전통에 따라 대가족을 이끌길 원했어.
그래서 많은 식구가 살았지. 무엇보다 이러한 대가족을 이끌게 해준
나의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이 있지. 우리 아내는 아직도 재봉틀 한 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알고, 자신이 부자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을 난 많이 존경한단다.
(아산 정주영 회장과 아내 변중석 여사, 밑으로는 정주영의 대가족 사진)
아산 정주영 10주기 추모사진전을 담았습니다...
대한민국 현대화의 주역인 현대의 창시자
아산 정주영의 혼을 보는 듯 했습니다...
▲ 인류의 모든 발전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주도 아래 이루워 졌다.... 아산 정주영...
▲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때도
"한번 해보기나 했어?" 라는퉁명스러운 반문과 함께,
불굴의 추진력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난관을 돌파해 나갔다.
▲ 청년 峨山의 모습이다.
峨山은 서울로 올라와 힘겨운 막노동을 하면서도
"오늘보다 내일"을 확신하며 열심히 일을 했다..
▲ 峨山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 수도인
부산에서 미군 공사를 수주하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진은 미군 공병장교 "맥칼리스터" 중위와 함께 한
峨山(왼쪽 다섯번째). 통역을 맡았던 동생 정인영(왼쪽 세번째)
▲ 峨山이 미군과 공사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峨山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톨령이1952년 12월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했을 때 낙동강 변의 겨울 보리를 옮겨 심어 파란 잔디처럼
보이게 했다. 이 아이디어로 미군의 신뢰를 얻게 된
峨山은 미국 공사를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 현대건설은 1953~1955년까지 대구근처의 고령교 공사를 맡아
큰 손해를 보면서도 끝까지 공사를 완료했다.
덕분에 1957년 9월 전후 최대의 단일공사였던 한강인도교
(현재 한강대교) 공사를 착공해서 1958년 5월 준공시켰다.
사진은 1958년 5월 한강인도교 개통 모습이다.
▲'64년 현대시멘트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峨山 내외.
峨山은 국내 건설사업의 촉진을 위해서는 건설자재의
국산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105달러에 불과했던
1965년 14억 7.9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사 금액이 걸린
프로젝트를 수주함으로써 한국 건설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峨山은 이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를 보왔지만, 최신 장비 사용법과
선진 공법을 익힘으로써 후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완벽한 기술력을 갖출 수 있었다..
사진은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을 살펴보는 峨山의 모습이다.
▲ 1970년 7월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로 평가받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 1970년 7월 峨山의 "우리는 할 수 있다" 는 신념으로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국가의 대동맥으로서 대한민국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1968년 2월 착공해
2년 5개월만에 428km의 고속도로를 완공함으로써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 열사의 사막위에 한국 신화를 세우다.
▲ 1975년 국산차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 생산..
100% 국산차 "포니"로 세계를 놀라게 하다...
▲천수만 방조제 공사에서 최종 물막이 공사는 난제중의 난제였다.
峨山은 일명 "유조선 공법"을 창안해 물막이 공사를 성공했다..
▲ 1983년견 현대중공업에서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峨山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들의 희망에 귀 기울이는
격의없는 경영주이기를 원했다"고 했다.
▲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하는 峨山
▲ 1975년 8월 현대건설 신입사원 하계수련대회에서 파안대소하는 峨山
▲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한 88서울올림픽 유치!1981년 5월
올림픽유치민간추진위원장을 맡은 峨山은 현대의 임직원들과
함께 올리픽 유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당시 정부는 "창피만 당하지 말라"고 요청했지만 峨山은
"반드시 유치하자"고 결심했다.
사진은 서울 올림픽 유치 확정서에 서명하는 峨山
▲ 1978년 울산대학교 입학식에서 치사를 하고있다.峨山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울산대학교와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했다.
▲ 1998년 6월 16일 峨山은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정부 관리의 동행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 1989년 소련 방문 길에 이명박(당시 현대건설 회장)과 함께...
▲ 매일 새벽 3시 30분이면 기상해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峨山.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 온 아들들과 아침 식사를 같이 한 뒤,
걸어서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왼쪽부터 몽구, 몽준, 峨山, 몽근, 몽헌.
▲ 峨山은 변중석 여사와 스물 네살에 결혼했다..
변 중석 여사는 아내이자 어머니, 맏며느리로서 소박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대가족을 보듬으며 峨山을 평안히 내조하였다.
사진은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촬영한 것이다...
▲1985년 11월 고희를 맞아 변중석 여사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峨山은 "아내가 재봉틀 한 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을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설 날 모 습
▲ "시련이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