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기록
▣ 한국군 파병과 월남 ▣
과거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벌어진 모든 전란이 그러했듯이 월남전은 단순히 월남만을 적화하기 위한 지역전이 아니라 동남아 전역은 물론 세계적화를 획책하기 위한 서전적인 침략전인 것이다. 따라서 월남의 적화는 곧 한국의 안전보장과 동남아 전체의 안전보장에 위협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한국정부는 동남아 공존공영의 차원에서 국군파월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반공아시아 국가들의 결속된 반공태세와 협동정신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민족의 전통적인 의협심과 양심을 표명함으로써 국제적 신의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6.25동란 당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구원해 준 우방 여러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한, 미, 월간의 경제적 유대를 통하여 조국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군장병에게 실전경험을 체득케하여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고 전국민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인식 시키게하는 지름길을 터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과 사명을 품고 월남전에 참가한 주월 한국군은 월남전의 특수성에 적응한 전략 전술 개념에 입각하여 면밀주도한 작전을 구사하였다. 즉, 월남의 지형적 특수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규전과 게릴라전을 혼용하는 적을 양민으로부터 고립시켜 섬멸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사령관의 훈령아래 소부대 전술에 중점을 두고 점차적으로 대부대작전에 익숙케 하는 전략을 터득해 나갔다. 그리하여 모든 장병이 민사 심리전요원을 겸하여 두 나라 국민의 생활 관습과 풍속의 공통성을 이해 활용하여 그들과의 이민족적인 거리감을 없애는데 노력함으로서 월남정부의 통제지역을 확장하고 점차적으로 획기적인 평정의 폭을 넓히는데 빛나는 성과를 거두어 대한민국의 국위를 내외에 선양하고 국군의 실력을 만방에 떨치게 되었다.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한다는 문제를 놓고 국회에서는 야당이 월남 파병을 반대했고 국민의 여론도 이에 못지 않게 뒤끓었다. 한국의 귀중한 아들들을 타국의 전쟁터로 보내 목숨을 잃게 한다는 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파병안이 가결되고, 한국의 아들들이 월남으로 장도에 오를 때는 파병을 반대하던 야당인사는 물론 국민들 모두가 장병들의 무운을 빌며 환송의 대열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역사적인 거국적 환송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참조문서: 월남파병 환송사 1965년 2월 9일
월남파병환송 국민대회 환송사
1965년 2월9일
친애하는 월남파병장병 여러분! 내외귀빈, 그리고 반공애국시민 여러분!
오늘 우리 국민 전체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자유월남으로 떠나는 국군장병 여러분들의 장도를 축복하고, 무운을 빌면서, 여러분을 환송 하는 우리들의 심정은 헤아릴 수 없는 감회에 가득차 있읍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있게 되는 이 월남파병의 역사적 장거에 즈음하여 우리 정부나 온 국민은 우리 장병들이 오직 조국의 명예나 반공의 대의를 위하여, 그 맡은 바 책임을 충실히 완수해 줄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일찌기 정부는 중공의 지원을 받은 월맹 게릴라의 악랄한 침공에 직면하여 힘겨운 반공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자유월남 공화국으로부터 군사지원 요청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정부로서는 월남전쟁이 지니는 성격을 대국적인 시야에서 예의검토한 끝에, 우리의 국가 안전을 더욱 공고히 하며, 자유우방의 결속된 반공 노력에 크게 기여하겠다는 견지에서,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국회에 그 동의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국회의 동의를 얻어 이제 월남파병은 우리의 국가의사로 확정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정부와 국회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첫째로, 이것이 전자유아세아 집단안전보장에의 도의적 책임의 일환이라는 판단과, 둘째로는, 만약에 월남이 공산화하는 경우에는 아세아지역 전체에 미칠 공산위협의 증대는 필연 적인 사실이므로, 월남을 지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간접적인 국토방위가 된다는 확신, 그리고 세째로는, 과거 6.25공산침략을 당했을 때,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자유우방의 지원을 받아 위기일발에서 조국의 운명을 구출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른 우방이 공산침략의 희생이 되는 것을 피안의 화재처럼 방관할 수 없다는 공동운명의식과 정의감에 입각한 우리의 대의명분인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우리의 판단과 결의가 지극히 정당하다는 것으로 확신 하는 바이며, 또 앞으로의 역사가 반드시 우리의 이 숭고한 결심을 의롭고도 영광스러운 처사였다고 증명해 줄 것을 확신해 마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과 같이 국내외로 당면한 여러 문제가 매우 어렵고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가장 귀중한 한국의 아들들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게 될 월남전선에 파견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물심양면으로 크나큰 걱정과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는 응당 지녀야 할 도의적인 책임이요, 또한 의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6.25동란 때 수많은 우방의 젊은이들이 낯설은 이 땅에 와서 아까운 청춘과 고귀한 생명 을 아낌없이 바쳐가면서, 우리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이었읍니다.
오늘날 월맹 게릴라를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고 있는 것은 중공입니다. 6.25 동란 때 북괴를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한 것은 바로 중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기억 하고 있읍니다. 중공은 월남에서 꼭 같은 불장난을 저지르고 있읍니다.
지금 자유월남은 우방의 도움을 바라고 있읍니다.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들 국민은 용기를 상실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체없이 그들을 도와서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여러 우방들이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때, 그들 국민은 용기백배할 것입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이는 곧 승공의 제1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월남사태 해결의 관건은 바로 여기에 있읍니다.
역사는 항상 되풀이합니다.
다시 한번 6.25 때 우리의 처지를 회상해 봅시다.
초기에 적이 남침을 개시하자 우리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읍니다.
유엔군의 선봉으로 미24사단이 즉각 출병을 했으나 초기에는 전세불리하여 한국군과 같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했읍니다.
한때는 우방 국가들 중에도 한국 사태를 거의 절망적이라고 보는 때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과 우리 국민들은 조금도 용기를 잃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읍니다.
왜? 유엔 16개국 우방군이 계속 참전을 하여 우리를 돕고 우리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상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6.25 때 공산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우방의 지원과 우리 국민의 용기였던 것입니다.
출정장병 여러분!
여러분들은 6.25 때 우리를 도와준 자유우방의 전우들과 꼭같은 자유수호를 위한 십자군이라는 것을 자부하십시오.
침략자를 막고 선량한 우방을 도우러 가는 것입니다.
5천년 역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적으로부터 침략을 당했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침략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침략자를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민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로운 일이라면 남보다 앞장서겠다는 드높은 기개를 가진 민족이란 것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이웃집에 강도가 침입한 것을 보고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이웃집을 털고는 다음에 우리 집에 침입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닙니까?.
자유월남의 반 공전선은 우리의 휴전선과 바로 직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정장병 여러분!
여러분들 양 어깨에는 조국의 명예와 2천7백만 민족의 한결같은 기대가 걸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국군 중에서 선발된 가장 정예라는 긍지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에게 부하된 임무를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군기엄정하고 용감무쌍한 국군 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해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여러분을 떠나보낸 우리 국민들은 여러분의 노고를 결코 헛되이 하지 않도록 더욱 분발해서 경제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유의 십자군인 여러분의 장도에 반드시 가호가 있을 것이며, 영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건투와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끝>
▣ 월남전 파월경위 ▣
1963년 이후 월남내에서 베트콩들은 공격과 테러활동을 급증시켜 중남부 산악지역은 물론, 1번 도로를 포한한 각 평야지역까지 거의 그들의 손아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위기의 월남전을 회복하고저 월남정부는 우방국으로써 이미 공산주의의 침략을 받아 갖은 고초를 겪은 바 있고 자유세계의 도움을 받아 공산침략 세력을 격퇴시킨 많은 대공 경험을 가진 역사, 문화, 사회적풍습이 흡사한 동남아시아의 반공 보루국인 한국정부에 월남전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의해 한국정부는 1964년 9월 최초로 1개의 의무단과 건설지원단을 파병시켰다.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월남국민에게 따뜻한 우의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의료지원단의 활동성과가 큼을 통감한 월남정부는 다시 1966년 2월 전투병력 증파를 한국에 요청하였다.
월남정부의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에서는 전투병력을 증파하는데 대한 국내외 정세와 특히 우리나라의 안전보장 문제를 중심으로 제반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고 1966년 2월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처 국회에 동의 요청을 하였다. 1966년 3월 10일 정부는 월남 증파 결의안을 제 55회 국회 제14차 본 회의에서 찬성 95, 반대 27, 기권 3으로 통과 전투부대를 파월하게 이르렀다.
한국군 월남참전 연병력 규모
년도별 |
1965년 |
1966년 |
1967년 |
1968년 |
1969년 |
1970년 |
1971년 |
1972년 |
총 계 |
인 원 |
21,031 |
41,809 |
42,743 |
45,729 |
43,408 |
42,349 |
42,602 |
33,177 |
312,853 |
월남에서의 한국군에 대한 세계의 시각
----- 월남에서의 한국군에 대한 세계의 시각 -----
* 영국 런던 타임즈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흑같은 어둠속을 96km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 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자는 한국군 이외에는 없다.
- 영국 런던 타임즈에서 -
*'고보이' 교훈이란?...
맹호부대 포병대대가 퀴논(Qui Nhon) 근처 고보이(Go Boi) 평야에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보이댐을 건설해주는 공사를 했습니다. 열대지방 베트남의 2모작 농사에서 3모작이 가능하게 한 퀴논 영구댐이었다. 전투부대가 대민 지원을 하는 것을 보고 영국 기자가 놀랐나 봅니다.
* 미국 저널지의 시각으로 본 월남의 한국군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중 전술 책임 구역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활되고 있다.
- 1966.3 미국 에빈스빌 저널 -
* 미 뉴스위크지가 바라보는 한국군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 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 본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방법(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미국은 한국이라는 비범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된 거와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교실에 와서 선생님 미국보다 학생인 한국군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 1967. 4. 10 뉴스 위크지에서 -
* 67년 미국 옵져버지가 바라보는 한국군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할 당시 이 한국군은 지금의 월남과 같았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군은 얼어 붙은 압록강을 떠나 철원의 고지를 떠나, 그리고 인천항, 부산항을 떠나 수천만리 이역땅에서 다시금 공산주의자와 싸우고 있다.
- 미 옵져버지 기사에서...1967. 5. 24 -
* 뉴욕 타임지에서 노획한 베트콩 지령문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군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 1966. 7. 22 뉴욕 타임지에서 -
* 미국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지 기사
미국은 한국이라는 귀한 동맹국을 찾아 내었다. 그들은 건강한 투사, 그 이상이다.
싸우는 정치인들로서 한국인은 동양에서 월남인들과 가장 친근해졌을 뿐더러 미국은 어떤 교훈을 한국군으로 부터 배울 수 있으리라 느끼게 되었다.
- 미국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1967. 5. 15 -
* 사이공 포스트가 바라보는 한국군
한국군은 우군 피해에 대해서 15:1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 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 부터 적을 추격 격파시켰다.
기본적인 한국군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 백마, 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이나 월맹군의 문서에 의하면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 받고 있는 것이다.
- 사이공 포스트 1968. 3. 20 -
* 월남 띠엔. 반지가 바라보는 한국군대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는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술한 전술을 가진 적에 대하여 방심하지 않고 경계를 하고 있는 대담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료를 열심히 해 주고 있다.
- 월남 띠엔. 반지에서 1968. 2. 17 -
* 리챠드 닉슨이 한국군에 대하여
자유 월남의 장래를 위한 한국이 이룩해 온 커다란 공헌은 17년전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협조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명이 되고 있다.
- 1967. 12. 17 리챠드 닉슨 -
월남전과 한국군
월남전 참전 7개국 수뇌회담(1966.10)
월남전 참전국 7개국(월남, 미국,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타일랜드, 필리핀, 뉴질랜드) 정상들의 모습. 사진은 이들 정상 7명 외에 쿠엔 카오 키 월남 부통령의 모습이다.
월남 참전국 정상회의 (66.10.25)
1966년 10월 25일 2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정일권 국무총리 월남방문(67.2.15)
정일권 국무총리가 월남전에 파병된 국군과 월남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공식 방문하였다.
월남 대통령 부대 표창(67.4.23)
주월 사령부는 1966년 8월 15일 전투부대의 효과적인 지휘와 연합군과의 밀접한 협조를 위하여 나트랑 지역에 야전 사령부를 창설하는 등 점차 많은 예하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사진은 월남대통령 명의로 주월 사령부에게 표창을 하는 모습이다.
파리 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68.5.13)
1968년 5월 13일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많은 시일이 걸린 이후, 결국 1973년 1월 27일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파리협정'이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베트남 남부 공화임시혁명정부의 4자간에 체결되었다.
태권도 신조를 선서하는 수련생(68.12)
한국은 군대이외에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하여 많은 월남군인에게 태권도를 보급하였다.
사진은 태권도 신조를 선서하는 모습이다.
비둘기부대 환송식(65.2.5)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는 국방부 명령(육) 제2호에 의거 서울에서 장교 16명, 사병 6명으로 파월 편성을 위한 주월 한국군 군사 원조본부단을 창설하였으며 예하 부대로서 유군 제 127공병대대 1이동경비대대, 제 801수송중대, 해병 제 1독립 공병중대를 핵심으로 편성된 부대이다. 사진은 1965년 2월 5일 경기 현리에서 주월 한국군 군사 원조단 결단식을 갖는 모습니다.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65.2.9)
비둘기부대(군사원조단)이 1965년 2월 13일 선발대 출발에 앞서 2월 19일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가 열렸다.
파월장병 환송장면(65.2.9)
비둘기부대(군사원조단)가 1965년 2월 19일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 후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월남국민들이 비둘기부대를 환영하는 모습
비둘기부대는 1965년 2월 13일 파월 제 1진으로 선발대가 출발하여 2월 24일 도착하였고, 3월 16일 전 부대가 도착하였다. 비둘기부대는 파월 초창기의 어려운 환경속에서 신설공사를 비롯하여 교량, 학교, 진료소 공사와 태권도 교육 및 심리전 활동 등 주월 한국군의 개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
The Head quarters Republic of Korea forces in Vietnam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16호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육군소장(수도사단장 겸임), 부사령관 이훈섭 육군준장이 부임.
국방부 지령 제12호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사이공]으로 출발하였으며,
뒤를 이어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 본부 40명, 계 134명이
월남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당시의 예하부대로는 전투부대인 수도사단(맹호), 해병 제 2 여단(청룡)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비둘기) 및 해상수송분대(백구)를 총지휘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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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4월 16일 수도사단의 보충부대로 보병 제 26연대가 증파,
1966년 6월 01일 100군수사령부(십자성)를 창설,
1966년 8월 15일 전투부대의 효과적인 지휘와 연합군과의 밀접한 협조를 위하여 [나트랑]에 야전 사령부를 창설하였다.
1966년 9월 05일 전투부대로서 보병 제9사단(백마) 파월,
1967년 4월 10일 한국군 최초로 제11항공중대가 창설되어
1967년 7월 10일 사령부 및 직할부대가 증개편되어 공군 지원단(은마),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태권도 교관단 및 해병여단의 증강으로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총병력 4만 8천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주월한국군 사령부는 월남의 수도 사이공 한복판에서 '초롱'쪽으로 가는 길 옆에 자리 잡고 있다.
'트란ㆍ콕톤' 12번가에 7천평이 넘는 넓은 땅에 2천평의 5층 건물에는 월남전의 오늘과 내일을 주름잡는 한국군을 비롯하여 호주, 뉴질랜드, 월남 그리고 미국군을 망라한 작전 연락장교단이 함께 있다.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퀴논'사단본부에서 맹호부대가 상륙한 후 작전지휘를 직접 맡고 있음으로 사령부는 참모장 이훈섭준장이 거의 통솔하다시피 하였다.
부대창설 : | 1965. 9. 25. 서울 필동 (채명신 소장) |
참전기간 : | 1965. 9. 25 - 1973. 3. 23 |
사 령 관 : | 초대 중장 채명신, 2대 중장 이세호 |
부대지휘 : | 주월사를 비롯하여 3개 전투부대(맹호, 백마, 청룡)와 1개 군수 지원부대(십자성), 1개 군사원조단(비둘기), 2개 수송 전대(백마, 은마)등 8개 |
전 과 : | 1964. 7. 18부터 1973. 3. 23까지 대부대 작전 1,174회와 소부대 작전 576,302회등 총 577,476회의 작전을 실시, 한국군 전술책임 지역 7,000평방Km를 평정하고 월남 난민 120만 여명에 대한 거주를 정착시켰다. |
대민사업 : | 진료 3,523,364명, 식량 19,640톤, 의류 461,764,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Km, 태권도 보급 902,060명, 경로 및 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자매결연 3,364곳 등 끈끈한 정으로 평정사업과 대민사업을 병행실시, 진정한 우정을 심었던 결과로 월남국민들이 따이한을 믿고 따르며 잊지 못하게 했다. |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중장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사령부(이하 주월사령부)는 1965년 9월 25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 16호(1965.9.20.)에 의거, 서울 필동 합동참모본부에서 창설, 초대 사령관에 채명신 장군을 임명하였다. 동일 국방부 지령 제 12호(1965.7.21)에 의거, 사령부 선발대 16명이 월남으로 출발하였고, 동년 10월 20일 사령부 94명, 수도사단 지휘부 40명 계 134명이 사이공으로 이동하여 주월 사령부 지휘소를 개소하였다. 사진은 초대 주월 사령관 중장 채명신 모습이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 부대기에 대통령표창 수치기를 달다
주월 사령부는 지휘소를 개설할 당시 예하부대로서 수도사단, 해병 제 2여단과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지원단 및 해상 수송부대 총 병력 2만 1천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이 주월 한국군 사령부 부대기에 직접 수치기를 달아주고 있는 모습이다.
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The 2nd Marine 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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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9월20일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제 2여단 결단식을 거행되고,
1965년 10월9일 파월 전투부대로써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1965년 12월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1967년 12월22일에는 호아안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중 주요작전으로는 Tuy Hoa에서 청룡작전을, Chu Lai지역에서는 Tra Binh Dong 전투를, 그리고 Hoi An 지역에서는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 작전을 수행하면서 지역내에서 암약,출몰하는 적을 섬멸하여 Quang Nam 성 지역들을 평정하였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써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베트남에서 보여 주었다.
1967년 2월14일 밤부터 15일까지 사투를 벌인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파 월 :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5.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
사 령 관 : |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
참전기간 : | 1965. 10. 9 - 1972. 2. 24 |
참전군인 : |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
희 생 :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
전 투 :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 |
해병 제2여단 결단식(65.9.20)
청룡부대(해병 제 2여단)는 1965년 6월 28일 국방부 지령 8호에 의하여 해병 제 2 연대를 기간편성하여 초대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이 임명되었다. 사진은 1965년 9월 20일 포항에 위치한 해병기지에서 결단식을 거행하는 모습이다.
청룡부대 환송식(65.10.3)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3일 출발하였다. 사진은 부대 출항을 환송하는 모습이다.
캄란만에 상륙한 지휘본부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사진은 지휘본부가 먼저 상륙하는 모습이다.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는 청룡용사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 최초로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청룡부대는 1965년 12월 16일 투아호아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66년 8월 17일에는 추라이 지역으로 이동, 1967년 12월 22일에는 호아안으로 이동하였다.
맹호부대 (수도사단)
The Capital Division (Tiger)
65년 8월13일 제 52회 임시국회 제 11차 본회의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 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국내에서 4주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 12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을 거행,
1965년 10월 22일 맹호부대가 최초로 월남 퀴논에 상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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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사단은 1965년 11월15일부로 미101공수여단 및 미해병 7연대로부터 1,200평방km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고 거점을 확보하였다.
1965년 10월29일 풍손부락에서 최초로 서전을 장식한 이래 중대수색작전, 대대규모 및 연대규모의 작전을 실시하던중 1966. 3. 23 ~ 3. 26일간에 "고보이" 지역에서 1연대와 기갑 연대를 투입, 최초의 사단규모작전인 맹호5호작전을 실시하였다.
맹호 5호작전이 끝나자 1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하여 오던 베트콩을 소탕하고 사단전술 책임지역을 1,400평방 킬로미터로 확장시켰다.
세계전사에 새 모습을 드러낸 한국군 고유의 중대 전술기지 운용개념을 확고히 입증한 둑코전투 승리는 월남전의 기적으로써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월남전에 주둔하고 있는 자유우방의 각나라 군부대 전숫전략 전문가와 지휘관들이 한국군 부대를 직접 방문하여 중대단위 전술기지 운용과 대민사업 활동사항 등을 답습해 가서 교훈을 삼아「무서운 한국군」이란 대명사가 되었고 밀림(정글)의 왕자로서 맹호의 위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월남 중동부 해안 Qui Nhon 에 위치한 수도사단은 한국군 전투부대의 핵심부대로서 이곳에 침투하고 있는 월맹군 제 18연대를 중심으로한 지방 VC부대들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간 많은 작전중 둑코(Duc Co) 전투, 맹호 6 호 작전, 오작교 작전, 맹호 12 호 작전, 혜산진 9호 작전, 비호 23호 작전, 창군기념작전, 월계작전, An Khe Pass 작전등은 맹호 부대가 남긴 혁혁한 작전으로 상승 한국군의 기백을 널리 과시한 것이다.
파 월 :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
참전기간 : | 1965. 10. 22 - 1973. 3. 7 |
참전군인 :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
희 생 :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
대민사업 :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 등 |
맹호부대 결단식(65.10.12)
수도사단(맹호부대)은 비둘기부대 파월에 뒤이어 1965년 6월 14일과 6월 26일 두 차례에 걸친 월남 수상의 전투부대지원 요청에 의거, 동년 8월 13일 국회 동의를 얻어 파병하게 되었다. 사진은 1965년 10월 12일에 열린 맹호부대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기를 전달하고 있다.
수도사단 환송식(65.10.12)
국내에서 4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1965년 10월 12일 여의도비행장에서 결단 및 환송식이 열렸다.
맹호 26연대 및 십자성 부대 환송(66.4.15)
1966년 4월 15일 맹호 26연대 및 십자성 부대가 많은 환송을 받으며 출항하고 있다.
퀴논에 상륙하는 증파부대 환영식(66.4.22)
1966년 4월 22일에 월남 퀴논에 도착하는 맹호 26연대 부대원들.
백구부대 (해군 수송전대)-바다의 제왕
The Naval Transport Group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와 의료및 대민지원사업 및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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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4일 한국함대로부터 LST 1척 812함이 파월되어 비둘기 부대에 편입된 후 해상수송임무를 개시하였다.
1966년 3월15일 LST 2척,LSM 2척을 증파하면서 해군 수송전대 백구부대로 개칭하고, 비둘기부대에서 배속 해제됨과 동시에 주월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되어 해상 수송임무를 수행하였다.
1969년 8월29일 월남 해군본부로부터 쿠롱(CUULONG)기지로 이동하였다.
매콩강에서 활약하는 백구부대
주월 한국군 파월초기부터 해상수송 임무를 맡은 해군의 활약은 지상군들의 눈부신 전과를 올리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사이공에서 다낭까지 800마일 해상항로를 따라 탄약과 중장비 등의 해상수송임무, 의료 및 대민지원사업, 민사심리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백구부대 함정
백구부대는 창설함과 동시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 직할대로 승격, 해상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이공항에 정박한 백구부대 LST
처음에는 LST 한 척으로 비둘기부대에 편입되었으나, 부대 창설 이후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사진은 사이공항에 정박한 백구부대 LST 601과 LST 602
십자성부대 (제100군수 사령부)
The 100th Logistic Command
파월이후 백마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국본 일반명령(육)제22호에 의거, 1966년 6월1일부로 군수지원사령부를 100군수사령부로 개편, 수도사단으로부터 예속해제, 육군본부에 예속과 동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배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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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
1. 주월 한국군에 대한 군수 및 행정 지원
2. 평정 및 개발사업의 적극적 지원
3. 전술 책임지역에 대한 자체방어
기능 :
1. 보급품의 획득 및 저장분배
2. 3~4단계 정비 지원
3. 입원 및 후송
4. 인쇄 및 영현 업무
5. 대민 지원
파 월 : | 1965. 10. 12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 1965. 10. 16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상륙,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 출국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였으나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 1966. 8. 20 십자성 부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
사 령 관 : | 초대 이범준 사령관에 이어 유학성, 이영일, 이창복, 김종달, 신유정 준장이 사령관을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
참전기간 : | 1965. 9. 25 - 1973. 3. 23 |
참전군인 : | |
희 생 : | 전사 213명(장교 26명, 사병 187명) 부상 439명(장교 27명, 사병 412명) |
전 투 : | 106,665대의 차량수송과 396,019명의 병력수송 및 233,669동의 군수등 수송작전을 치루었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심리전으로 베트공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평소에 십자성 사령부를 위협하던 지역내 혼톰산 일대에 1969. 3.1~ 3.11일간에 걸쳐 십자성 3호 작전(일명 올개미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116공병대대, 237수송대대, 경비중대로서 적 사살 : 4명, 포로:1명, 용의자:6명, 소화기:5정, 문서:8점, 취사기구등 150여점을 노획했다. |
대민사업 : |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
100 군수 주력부대 나트랑 상륙(66.9.7)
군수지원 사령부는 맹호 및 청룡의 군수 지원을 위하여 국본 일반 명령(육) 제 31호에 의거창설되어, 홍천에서 교육훈련 후 1965년 10월 7일에 1진 10월 24일에 2진이 각각 퀴논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1966년 5월 15일 군 지원부대로 승격되어 주월 한국군 사령부로 배속 1966년 6월 1일 부대 명칭을 제 100 군수 사령부로 개칭하여 사령부를 퀴논에서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100 군수 사령부 창설기념식(66.11.12)
1965년 11월 12일 100군수 사령부 창설기념식 사진이다. 초대사령관 이범준 준장이 기를 받고 있다.
백마부대 (보병 제9사단)
The 9th Division (White h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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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사단은 편성 1개월도 못된 1950년 11월23일부터 경북지구(영주, 김천, 문경)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하였고, 1951년 1월25일 연합군의 제2차 총 반격시는 제1군단 예하부대로서 괴뢰군 제10사단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여 적 사살 5,549명, 화기 노획 1,622정의 대전과를 올렸으며, 그후 철원지구 반격작전, 금화지구 방어작전, 사두봉 전투를 거쳐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정예부대인 제38군의 12차에 걸친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처절한 피아 공방전 끝에 적병 8,234명을 사살하고 백마고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휴전이 되기까지 8개월동안 중부 및 중,동부 전선에서 삼각고지, 금화 저격능선 등지에서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휴전 이후 금화, 포천, 인제, 화천, 양평, 양주 등지에서 부대정비와 전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투력을 배양하여 오던중 1966년 6월 1일 국방부 지령 제3호에 의거, 제2차 파월 전투사단으로 지명됨으로써 자유십자군의 일원으로 해외에 파병하게 되었다.
백마사단은 월남 중동부 해안지력의 1번 도로와 해안을 따라 길이 270Km, 폭 50Km에 달하는 책임전술(TAOR)지역을 확보하고,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도시와 항만에 있는 군사시설을 보호 해 왔으며 또한 전술지역 내외의 침투하고 있는 적을 격멸하여 왔다.
초대 이소동 사단장의 뒤를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를 맡았다. 파월기간중 478회 대부대 전투와 211.236회의 소부대 전투를 실시하여 총211,714회의 전투를 치루었다.
전투중에도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건설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대민사업을 지원했으며 1967년 1월29일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작전을 비롯하여 1967년 3월8일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 개통의 오작교 작전과 1967년 7월9일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 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 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도로 개통은 월남군과 연합군까지도 공격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였으나 1967년 3월8일부터 맹호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 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날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파 월 :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 인근지역인 닌호아에 주둔했다.
사 령 관 : 초대 이소동소장에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
참전기간 : 1966. 9. 22 - 1973. 3. 11
참전군인 : 100,336명 (장교 6,445명, 사병 98,891명)이 참전
희 생 : 전사 1,328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전 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0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0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 1번도로 개통은 이제까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었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백마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자유월남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대민사업 :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백마부대 결단식(66.8.27)
1966년 8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백마부대 결단식의 모습이다.
백마부대 국민환송대회(66.8.27)
백마부대 선발대 월남상륙(66.8.9)
8월 말 정규부대 파월에 앞서 선발진이 1966년 8월 9일 월남에 도착하였다.
백마부대 지휘부 월남도착
제 9사단(백마부대)는 월남정부의 전투병 증파를 위한 공식 요청이 있은 후, 1966년 2월 28일 국무회의 의결, 3월 10일 국회에서 통과됨에 따라 파월하게 되었다. 사진은 월남에 도착한 백마부대 지휘부.
월남전 기간 동안 많은 주요 인사들 및 군 장성들도 월남을 방문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육군참모총장 김용배대장 방문(65.11.10)
1965년 11월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이 전장 일선을 방문하여 야전 시설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 백마사단방문(66.10.13)
박대통령 맹호부대 순시(66.10.21)
박정희대통령은 1966년 10월 참전국 정상회담이후 월남을 방문 국군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사진은 맹호부대를 방문하는 모습.
박대통령 100군수 사령부 순시(66.10.21)
육군참모총장 김계원대장 방문(66.12.5)
정일권 국무총리를 환영하는 월남국민(67.2.15)
월남전 기간동안 많은 주요 인사들이 월남을 방문 우리 국군을 위로하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사진은 1967년 2월 15일 정일권국무총리가 월남에 도착했을 때 뜨겁게 환영하는 월남 국민들의 모습.
정일권 국무총리 일행 백마부대 순시(67.2.15)
맥나마라 미국방장관 수도사단 방문(67.7.9)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여사 환자위문(68.11.26)
오작교작전
오작교작전은 1967년 3월 8일부터 5월 31일간에 맹호, 백마 양 사단을 투입하여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 국도의 개통을 시도한 작전이다. 작전 결과 수도사단이 위치한 퀴논과 9사단이 위치한 투이호아로 연결하는 1번 국도의 개통과 월남주민 약 73,000 명을 적 통치로부터 해방시켰다.
오작교 작전에서 맹호, 백마 양 지휘관 상봉(67.4.18)
42일간의 작전을 마치고 맹호, 백마용사가 상봉하는 광경
1번국도의 개통을 시도한 작전이었던 오작교작전 중 맹호, 백마부대 용사들이 상봉하는 모습이다.
헬리콥터로 피란민 후송
오작교작전 중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하였는데 국군은 이들을 헬리콥터로 후송하였다.
적의 은거지를 돌격하는 용사
오작교작전 중 용감하게 돌격하는 우리 용사의 모습
은마부대 (공군 지원단) - 하늘의 보라매
The Aerial support Group
1966년 6월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를 설치하여 수행하던 전술 항공지원 업무와 주월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수송 지원업무를
1967년 7월1일 C-46 미 항공기 파월을 계기로 보다 효율적인 작전지원과 부대운영을 위하여 분산되어있는 모든 기능을 통합운영코져 공군지원단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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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마부대 창설(67.7.1)
주월 한국군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6년 6월 1일 야전사령부에 전술 항공지원대을 설치하였다. 그 후 항공지원대의 전술 항공 지원 업무와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담당하던 항공 수송지원 업무를 흡수하여 공군지원단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사진은 공군지원단인 은마부대 창설 모습으로 1967년 7월 1일 탄손누트 공항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은마부대는 4대의 C54기를 주축으로 월남전에서 공중수송의 지원활동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결단식를 가졌다.
최초로 파월된 C-46수송기
공군지원단 창설의 계기가 된 것은 최초로 파월된 C-46수송기의 등장이었다.
홍길동작전
홍길동작전은 1967년 7월 9일부터 8월 26일까지 맹호, 백마 2개 사단을 투입, 주월 한국군 전술책임지역을 위협하는 적을 소탕하기 위한 선제공격이었다. 작전 결과 적의 상부지휘 체제와 전투능력을 파괴하였다.
홍길동 작전 도중 헬리콥터에서 한 병사가 랜딩하는 모습이다.
홍길동 작전 도중 동굴을 수색하는 백마용사
홍길동 작전 도중 28전투단이 작전중 노획한 장비(67.7.20)
68년도 계획서에 서명하는 한,미,월 군 수뇌(67.12.1)
1967년 12월 1일 야전사령부에서 열린 한.미.월남 군 수뇌부 회의. 1968년도 연합작전계획에 서명하고 있다.
베트공 통치구역을 벗어나 한국군 지역으로 피난하는 월남인들
1968년 구정을 앞두고 약 4만명의 병력으로 케산의 미 해병기지를 포위하는 동시에 베트콩과 월맹군은 월남의 14개성 주요도시에 대해 소위 구정공세를 취하였다. 사진은 이러한 구정공세의 혼란속에서 베트콩 통치구역을 벗어나 한국군 군사지역으로 피난오는 월남인들의 모습이다.
백마부대 작전지역을 순시하는 최대명 소장(68.6.7)
야전사령부에서는 일선 작전지역을 수시로 순시하였다. 사진은 백마부대 작전지역을 순시하는 최대명 소장의 모습이다.
신,구임 주월 한국군 사령관 티우 월남 대통령 방문(69.4.30)
신,구임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이.취임식 전날인 1969년 4월 30일 티우 월남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 신구임 취임식(69.5.1)
1969년 5월 1일 주월 한국군 사령관 이.취임식이 여러 요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주월 한국군 부대기 인수인계(69.5.1)
주월 한국군 부대기를 1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이세호 장군에게 넘겨주고 있다.
연합지역 심사분석회의(69.10.28)
야전사령부는 1968년 6월 1일 주월 사령부 작편 320에 의거 장교 59명과 사병 36명으로 주월 한국군 사령부 야전 지휘소를 개편, 야전 사령부를 나트랑시에 창설하였다. 사진은 야전사령부 주관으로 열린 연합지역 심사분석회의 모습이다.
주월 한국군 주요 지휘관 및 참모일동(70.1.23)
주월 한국군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맨 앞즐 가운데가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
박정희대통령 이세호중장에게 태극무공훈장 수여(70.4.9)
박정희 대통령이 주월 한국군 2대 사령광 이세호 중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훈장병 훈장수여식
이세호사령관 맹호부대 순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이 맹호부대를 순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0-1호 작전은 1970년 4월 22일부터 5월 16일까지 한국군 전술책임지역 밖에 위치한 투이호아 서북 40Km지역인 폭탄주변, 쑤이카이 계곡 일대의 월맹군 13대대, 베트콩 96대대에 대한 선제포착 섬멸작전이다. 작전 결과 적의 후방 생산시설, 지휘통신시설 파괴, 심리전 근거지 파괴 등과 1번 및 6번 도로의 위험을 제거하였다.
사진은 작전 도중 백마공수 특전부대 용사가 로프을 이용 랜딩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장병들이 베트콩의 은거지를 수색하고 있는 모습이다.
작전 도중 밀림에서 경계중인 병사들의 모습이다.
독수리 70-1호 작전에 투입되는 병사를 격려하는 이세호사령관(69.5.3)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하는 포병의 위용
전단을 살포하여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이다.
밀림수색 작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
작전중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이다.
이 작전의 전과는 적 사살 545, 포로 13, 개인화기 301, 공용화기 40, 무전기 14 등이다.
작전 종료 후 큰 전과를 올린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아동복지센터에 참석한 티우 대통령 및 이세호 사령관
우리 군은 100명의 베트콩보다 1명의 양민을 우선보호한다는 인식하에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민 봉사와 공사작업은 부대 주둔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사진은 비둘기부대기 완공한 아동복지센터에 참석한 티우대통령 내외및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이다.
비둘기부대가 완공한 푸토아면 사무소 준공식에 참석한 이건영 부사령관의 모습이다.
재월교포 가옥 입주식 모습이다.
월남노래 경연대회에서 훈시하는 박노영 참모장
우리 군은 자체적으로 월남노래 경연대회를 열어 월남인에게 좀 더 다가가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창군기념작전에서 노획한 물품을 보는 티우 대통령
월남 국민에게는 한국군이 큰 힘이 되었다. 사진은 창군기념작전에서 노획한 물품을 둘러보고 있는 월남 티우대통령의 모습이다.
월남신문회관 개관식(70.1.10)
월남신문회관 개관식에 참석한 티우대통령과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이다.
사이공 외곽 환산도로 기념탑을 순시하는 신상철대사(69.7.11)
우리 부대가 완공한 사이공 외곽 도로 기념탑을 순시하는 신상철 대사와 이세호 사령관의 모습이다.
비둘기부대에서 준공한 어린이 놀이터(70.2.11)
우리 군은 100명의 베트콩보다 1명의 양민을 우선보호한다는 인식하에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민 봉사와 공사작업은 부대 주둔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각 학교와 자매결연를 맺고 또한 각지역에 어린이를 위한 시설을 준공하는 등 어린이를 위한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다. 사진은 비둘기부대에서 준공한 어린이놀이터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