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로 얽힌 朴正熙와 金智泰 |
- “김지태는 특혜받은‘실크재벌’”(3共 인사) vs. “특혜를 거절한 피해자”(유족) - 김지태씨, 70년대 수출역군(役軍)으로 해마다 수출 산업훈장 받아 - 4·19 당시 ‘박정희 소장’이 김지태의 집에 박태준(포스코 명예회장)을 시켜 헌병 1개 중대 배치 - 부산일보·문화방송 ‘헌납’ 아이디어는 황용주(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창)씨에게서 나왔다? - “김지태는 혁명정부로부터 1800만 달러의 차관 융자받아” - 김지태씨 일부 유족 “현 정수장학회 이사진 사퇴와 유족을 포함한 새로운 이사진 구성해야”
▲ 1970년 11월 30일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은탑 산업훈장을 받은 김지태 회장의 손을 잡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장물(贓物)인가 아닌가. 이 논란의 중심에 박정희(朴正熙·1917~1979) 대통령과 김지태(金智泰·1908~1982·이하 존칭과 직함 생략) 삼화그룹 회장이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수장학회의 운명이 어떻게든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朴槿惠) 대선후보의 당락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김지태 회장은 생사(生絲)와 견직(絹織)으로 사업을 키운 ‘실크재벌’로 통했다. 주력 기업 3사(社)는 한국생사, 조선견직, 삼화(三和)고무였고, 한때는 전국에 19개의 제사(製絲)공장이 있을 정도로 재력가였다. 1970년 9월 19일 자 《매일경제》는 측근의 입을 빌려 ‘돈을 모으는 데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것 같다’고 김지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해 11월 30일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박 대통령이 참석했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니 ‘1971년 새 고지 13억5000만 달러(수출액)에 대비해 전열을 가다듬기 위한 자리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 20명이 산업훈장을 받았는데, 김지태는 은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날 훈장을 받은 수출역군(役軍) 중에는 내로라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한진상사 조중훈(趙重勳·최고상), 한일합섬 김한수(金翰壽·금탑), 반도상사 구자경(具滋暻·동탑), 대우실업 김우중(金宇中·철탑) 등이었다.
김지태 회장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년대 중반 무렵, 직물·신발·건설·전자 부문을 포함해 30여 개의 계열기업을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다. 수출이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넘어선 1977년에는 1억50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려 ‘금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1976년 1월 펴낸 그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는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 박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지금과 같은 이질적인 관계를 유추하기는 쉽지 않다. 5·16이 일어나기 전 김지태는 2대와 3대 부산갑(甲)구 국회의원에 당선, 국회 국방위원으로 8년을 지냈다. 정치권력과 금력을 모두 쥐었던 셈이다. 또 부산일보(1948년 인수)와 부산문화방송(1959년 개국)을 소유해 언론권력까지 거머쥘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기자와 만난 김 회장의 유족들은 “국회의원 시절 국방위원이었다. 박 대통령보다 윗사람인 백선엽(白善燁)·이종찬(李鍾贊) 장군이나 신익희(申翼熙)·장면(張勉) 같은 이들과 어울렸다. 또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5·16 이전 김 회장은 ‘박정희 소장’을 한 수 아래로 봤을 것이다.
또 이런 일화도 취재 도중 들을 수 있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흥분한 시민이 김지태의 집으로 몰려가 소란을 피우고 심지어 똥물을 뿌린 일이 있었다. 당시 부산의 군수(軍需)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경리참모였던 박태준(朴泰俊·포스코 명예회장)을 시켜 헌병 1개 중대를 배치해 김지태 집을 보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 박정희는 대통령, 김지태는 부정축재자 그러나 1961년 5·16의 성공으로 박정희 장군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1.5.18~1963.12.17)이 되었고 반면 김지태는 다른 재벌 사주들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1962년 5월 9일 자 《조선일보》에 김지태에 대한 단신기사가 실렸다.
<조선견직주식회사 사장 김지태씨 등 8명에 대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및 농지개혁법, 관세법 위반 사건의 고등군재 첫 공판이 오는 11일 상오 9시 경남지구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개정된다. 이날 또한 부산창고주식회사 사장 한기용씨 등 5명에 대한 법인세포탈 사인 부정 사용 혐의의 공판도 아울러 있을 예정이다.>
며칠 뒤인 24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재산도피죄 및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군검찰이 김지태에게 7년형을 구형했다는 기사가 크게 실렸다.
박 대통령이 김지태 회장만을 부정축재자로 몬 것은 아니다. 많은 기업인에게 하루아침에 부정축재자 딱지가 붙었고, 이들 ‘부정축재자들’은 전 재산을 국가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61년 6월 25일 자 1면을 보니 ‘전 재산 자진헌납’ 의사를 밝힌 기업인 7명의 명단이 나온다. 동립산업 함창희(咸昌熙), 삼호방직 정재호(鄭載護), 대한양회 이정림(李庭林), 한국유리공업 최태섭(崔泰涉), 대한산업 설경동(薛卿東), 중앙산업 조성철(趙性喆), 극동해운 남궁련(南宮鍊) 회장 등이다. 당대 내로라하는 기업인이었다.
김 회장 역시 무시무시한 군사정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 주식과 토지 10만평(나중 국방부로 이양)을 내놓았고, 이것이 지금의 정수장학회 자산이 되었다.
사실 기업인들에게 씌운 ‘부정축재’ 혐의는 원조경제를 바탕으로 한 당시 한국경제의 슬픈 유산이었다. ‘절망과 기아의 해방’의 이름을 내건 5·16 군사정부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이 기업과 기업인이었다. 부정축재의 범위, 축재액, 환수방법 및 시기를 정했고 ‘기업별 부정축재 환수상황’이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당시 신문에는 김지태 회장의 부정축재 환수상황이 30명의 다른 기업인의 이름과 함께 실렸다. 김 회장의 환수 통고액은 5457만원(현금 4930만7000원, 은행주 526만3000원)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사, 10만평의 땅 헌납은 이와 별개로 이뤄졌다. 김지태는 왜 부정축재 환수 외에 언론사를 내놓아야 했을까.
★ 김지태의 헌납 재산규모는? - 부산일보·부산문화방송 경영난 겪어 -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국정원 진실위원회는 김지태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구속된 상태에서 ‘강제 헌납’한 재산이 총 8527만279원이라고 밝혔다.
▲ 주식 : 총 5만3100주(평가액 3487만6096원)=①부산일보 100%(2만주, 평가액 1928만5649원) ②한국문화방송 100%(2만주 평가액 1044만6342원) ③부산문화방송 65.5%(1만3100주, 평가액 514만4105원)
▲ 부동산 :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 토지 10만147평(평가액 5039만4183원) 그러나 토지 10여만평은 정수장학회의 전신(前身)인 5·16장학회 재산으로 귀속되지 않고 1963년 7월 국방부에 양도했다.
≫ 조시형의 귀에 “김지태 집 개는 수프를 먹인다”는 첩보
1976년 1월 발행된 김지태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사옥 에 위치한 정수장학회 사무실.▶
<… 이렇게 하여 1948년 4월 이후 14년간에 걸쳐 애지중지 가꾸어 놓은 부산일보와 만 4년 동안 막대한 사재를 들여 궤도에 올려놓은 한국문화방송과 부산문화방송은 1962년 5월 25일, 5·16재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기본재산을 토대로 하여 5·16장학회는 1962년 7월 14일 발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부일장학회의 기본재산인 부산시내 토지 10만평(시가 8억원)은 군에 헌납했다. …>
김지태의 언론사 헌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산일보 주필, 편집국장을 역임한 황용주(黃龍珠·1918~2001)란 인물을 알아야 한다. 그는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동급생이다. 시쳇말로 ‘절친’ 사이였다. ‘박정희 소장’이 부산에 군수기지사령관(1959~1960)으로 내려와 있던 시절,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김지태가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은 박 대통령과 김지태 사이를 오가며 매개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88년 8월호에 실린 황용주의 인터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재산이 많은 김지태 사장이지만 그것 주고 나면 길로 나앉을 판이라고 나한테 와서 손 좀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내가 박정희 의장(국가재건최고회의)을 찾아가 ‘그것은 가혹하다. 다른 사람을 봐서 2억이면 되겠다’고 해서 2억원을 내게 된 것이다. 박 의장이 김 사장을 절대 밉게 본 것은 없다.”>
앞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인 조시형(趙始衡)씨에게 ‘부산의 김지태는 자기 집에 키우는 개에게 수프를 먹인다’는 첩보가 들어갔다고 한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 개에게 수프를 먹인다는 소문에 조 위원장이 분개했다. 그는 곧바로 회의를 열어 “이런 사람에게는 가혹하게라도 환수해야 한다”며 5억원을 부정축재 환수액으로 부과했던 것이었다.
≫ “박정희와 김지태, 양쪽의 승낙을 받았다?”
그렇다면 신문사와 방송사는 어떻게 해서 5·16장학회(훗날 정수장학회)로 넘어가게 되었을까. 김지태가 설립한 삼화고무의 사사(社史)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삼화고무는 한때 ‘범’표 신발류 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회사다.
황용주 전 부산일보 주필.▶
<군사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김 사장은 측근 아무개씨를 통하여 재산 가운데 부산일보와 방송국을 당시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5·16장학회로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다. 김 사장은 징역 7년보다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맞서는 경우를 생각해 보니 우선 산하 기업체 간부들이 희생을 당하는 데다 기업경영이 엉망이 되어 수천 종업원이 실직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 결국 협상조건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측근 아무개씨는 황용주 주필을 말한다. 이에 대해 황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김 사장이 인수한 한국문화방송 일로 서울에 와 있었다. 여관에 있는데 하루는 김 사장의 처남 윤우동씨와 큰아들 영구가 찾아와 ‘박정희 의장에게 얘기해서 어떻게 원만히 해결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다. 나는 그동안 그렇게 신세를 졌으니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박 의장을 찾아가 ‘내 말을 좀 들어 도. 김지태를 좀 살려 도’ 하고 부탁했다. 박 의장도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당시 김씨 가족들은 ‘돈을 주겠다. 혹은 토지를 내놓겠다’고 하던 참이라 풀어 주는 명분으로 이 얘기를 박 의장한테 했더니, 박 의장이 ‘돈 얼마 먹으려고 그랬다는 말은 들을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김 사장도 살리고 명분도 살리는 방법으로 재단법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황씨는 “평소 언론이 가장 공정해지려면 개인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법인이 소유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며 “그렇다면 이 기회에 부산일보와 방송국을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재단을 하나 만들자고 생각해 양쪽의 승낙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황씨의 말 중 ‘양쪽의 승낙을 받게 되었다’는 말에 눈길이 간다. 추측건대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의 ‘강제헌납’ 아이디어는 황씨의 머리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釜日장학회와 正修장학회 - 박근혜 후보 10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 맡아 -
부일(釜日)장학회는 1959년 4월 발족한 부산일보 내 장학 관련 부서다. 공익재단으로 출범한 것이 아니어서 정부의 설립허가를 받지 않았다. 김지태 회장은 부산시내 토지 10만104평을 기본재산으로 설립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부일장학회 앞으로 남긴 주식이나 부동산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1959년부터 장학금이 지급되기 시작해 부산일보·부산문화방송 등과 함께 5·16장학회로 넘어갈 때까지 4년 동안 1만2364명에게 1억7703만2445원을 지급했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박정희의 ‘정(正)’과 육영수 여사의 ‘수(修)’를 따 이름을 바꿨다. 현재 문화방송 지분 중 30%, 그리고 부산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1995년부터 10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았다. 현 이사장은 최필립씨다.
≫ 사회 환원이냐, 강탈이냐
김지태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1962년 5월 그로부터 오늘까지 근 15년간 5·16장학회에서 부산일보를 비롯하여 서울·부산의 양 문화방송국을 확장하여 잘 운영함으로써 내가 소망한 대로 문화사업이 이룩되어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한 바 큰 것을 알고 나는 항상 장학회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 1963년까지 사용한 부산일보 중앙동 사옥모습. 김지태 회장은 1948년 부산일보를 인수, 그해 9월 사장에 올랐다.
《조선일보》 1970년 3월 27일 자 4면에 실린 김지태 회장 인터뷰 관련 내용이다.
<“요즘 재벌 중 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이는 국가사회에 봉사하는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수년 전 부산일보 등 60억원 상당의 재산을 나라에 바쳐 부의 사회 환원을 시도했던 것입니다”고 말하면서 기업의 사명감을 미덕(美德)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김지태씨 유족들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사와 관련한 수출은 이후에도 잘됐지만, 매스컴을 뺏기면서 아버지가 여러 가지 타격을 많이 입었다”며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었는데 거기서 끊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김지태의 사업이 1970년대 후반까지 번성했음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낮아 보인다.
김 회장의 5남 영철(榮哲)씨는 황용주씨에 대해 “결국 아버지를 배반하고 나중에 매스컴을 빼앗아 스스로 부산일보 사장과 MBC 사장까지 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황용주 주필이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동창입니다. 평소 황 주필이 ‘매스컴을 잡아야 통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해요. 4·19가 촉발된 것이 《부산일보》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 사진이 게재되면서부터예요. 부산에 있던 박 대통령이 매스컴의 중요성을 알게 됐을 것이고, 정치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기자는 ‘재단법인 5·16민족상’을 찾아갔다. 재단이사장은 육사 5기이자 국가재건최고위원과 중앙정보부장(1962년 2~7월)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씨다. 박 대통령이 1964년 설립한 이 재단은 5·16정신을 기리기 위해 47년째 ‘5·16민족상’을 시상하고 있다. 재단 고위 관계자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정이 농후하므로 공소를 취하한다’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의 재산이 김지태에서 황용주로 넘어갔다가 다시 황용주가 군사혁명정부에 내놓은 겁니다. 다시 말해 혁명정부가 직접 김씨 재산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시 문화방송은 개국한 지 얼마 안돼 투자가 많이 필요했던 시절이었어요. 부산일보도 어려웠고요. 그땐 부정축재자에게 최고 사형까지 집행할 수 있었어요. 잘못하다가는 죽겠다고 생각했던지 김지태가 황용주에게 구명을 부탁했고, 황용주는 박정희 의장을 만나려고 들락날락하면서 (언론사를) 내놓은 겁니다.”
이 관계자는 “처음에는 혁명정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김지태가 황용주에게 ‘전 재산을 니가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했고, 황용주가 (언론사를) 정부에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 진실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황용주는 수감 중이던 김지태에게 ‘생사업체는 해야 할 것이고 부일장학회는 재산 내놓고 이사장 맡으면 공익사업 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 그러니 생사부문은 살아야 하고 언론부문은 내놔야 안 되겠나’라며 언론 관련 재산 포기를 종용했다.>
황용주씨의 헌납 직후인 1962년 6월 22일 군 검찰은 돌연 공소를 취하, 김지태를 석방했다. 이튿날 《조선일보》에 김지태의 석방을 알리는 ‘경남발(發)’ 단신이 실렸다.
<22일 상오 열린 경남지구 고등 군재에서 검찰부는 국내재산 해외도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던 김지태 등 피고 8명 전원의 공소를 취하했다. 이날 검찰관 오연근(吳淵根) 대위는 ‘피고들이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국가재건에 이바지할 정이 농후하므로 공소를 취하한다’고 취하이유를 밝혔다.>
★ 김지태 헌납의사에 대한 혁명정부의 첫 반응 - “아직 받아들일지 결정 못했다” -
《조선일보》는 1962년 6월 5일 자 1면에 ‘김지태가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등을 희사(喜捨)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기사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오히려 김 회장의 희사를 군사정부가 꺼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다면 ‘아직 결정 못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5·16장학회의 출범은 3·1운동의 공로자로 존경받는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 박사가 1962년 5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예방해 자신이 모은 월급 25만환을 장학기금으로 써 달라고 부탁하면서부터다. 세브란스 의전(醫專) 교수를 지낸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선교사로 조선을 찾아와 3·1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학살 등을 세계에 알린 애국지사다.
스코필드 박사가 다녀간 직후 박 의장은 공보실장을 통해 “스코필드 박사의 정성 어린 성금을 계기로 정부의 장학계획을 실천에 옮기겠다”고 밝혔다. 당시 군사정부가 김지태의 헌납을 두고 고민한 것은 스코필드 박사의 정신에 따라 ‘장학기금은 정재(淨財)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국 김 회장의 ‘부(富)의 사회환원’ 의사를 선의(善意)로 받아들여 장학회의 기본 자산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 부정축재자에서 산업 役軍으로 군사정부는 부정축재자에게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정도로 분위기를 다잡았고, 기업가들은 “자진헌납하는 길만이 죄책(罪責)의 일부를 속죄(贖罪)하는 것”, “만사(萬事)를 정부에 일임(一任)한다”(《동아일보》 1961년 6월 25일자 참조)고 고개를 낮췄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다음은 《경향신문》 1964년 12월 12일 자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 기회 있을 때마다 개정된 법령과 각령은 그때마다 부정축재자의 편에 유리하게 되었고 이렇게 여러 차례 개정된 법령은 허다한 맹점을 노출시켜 혼란을 주었다. 이러한 부정축재 처리의 변질은 혁명주체의 능동적인 부정처리 자세가 ‘시간과 돈’에 의해서 점차 수세(守勢)로 바뀐 데서부터 기인하겠지만, 재벌의 끈덕진 이면(裏面)공작은 권력구조의 동요와 신악(新惡)의 바탕(?)을 조작했다는 사실까지를 짐작케 했다. …>
이 신문은 일부 기업이 ‘부정축재자라는 이름으로 환수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명분 밑에 금융의 특혜를 독점해 왔고, 정부의 비호를 계속해서 받아 왔으며, 외자도입의 우선권을 잃지 않았었다’며 ‘부정축재 처리는 공수표가 됐다’고 썼다.
5·16 초기의 살벌한 분위기는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느슨해졌고 재벌들은 더 비대해졌던 것이다. 일례로 부정축재로 국가에 몰수된 동립산업에 당시 거액(9억6000만원)을 융자해 주면서 전(前) 주인인 함창희씨에게 고스란히 불하(拂下)했을 정도였다. 재벌들은 고시가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삼분(三粉·설탕, 밀가루, 시멘트)을 거래했고 당시 2배나 뛴 물가는 상대적으로 환수부담을 대폭 경감시켰다. 어느덧 이들은 5·16 초기의 사경(死境)에서 벗어나 잘나가는 산업 역군으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김지태 회장 역시 실크재벌로 번창했다. 한국생사·조선견직·삼화고무(범표 고무신과 운동화)가 주력이었다. 사시(社是)는 ‘인화단결, 부단노력, 심신(心身)연마’였고 1970년대 말 직원 수가 3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해마다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상을 받았고 특히 ‘범’표 신발류 메이커이자 그룹 산하 종합무역상사인 ㈜삼화는 1977년 ‘수출 100억불 달성 기념식’에서는 금탑 산업훈장과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2억불탑을 받았다. 수출실적이 좋을 때는 국내기업 랭킹 3~4위에 들었다고 한다. 계열사가 20여 개나 됐고 전국 농촌에 걸쳐 19개의 제사(製絲)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 한 경제 고위관료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기업을 꾸려 가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그 자금을 금융에서 조달하기 마련입니다. 당시는 관치금융 시절이었으니 정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1970년대 성공한 기업가로 이름을 날린 것은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정부가 수출을 독려하고 기업을 키워 줬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과거 중앙정보부 고위 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5·16 이후 당시로는 조달받기 어려운 차관 1800만 달러를 융자받는 등 (김지태는)혁명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어요. 특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사나 신발 등을 육성해서 엄청나게 부자가 됐고 해마다 수출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박정희 정권 이후 자식들이 기업을 잘못 운영해 결국 부도가 난 겁니다.”
≫ “김지태는 관치경제의 특혜를 거절했다?” 그러나 김지태 유족들은 이를 부인했다. 5남 영철씨의 주장이다.
“박정희도 사람인데, 남의 재산을 빼앗아 놓고, 자기도 미안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로 (특혜를) 주겠다고 했고, 정유회사도 주겠다고 했어요. 박정희 정권 때 재벌들 유착하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노름판에 돈 대 줄 일 없다’고 일절 거절하셨어요.”
그는 관치(官治)경제시절, 기업을 한 김지태가 정부의 손길을 모두 마다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3공 당시 경제관료는 “당시 김지태의 기업이 성장했다는 것은 정권의 혜택을 입었다는 것이 포함된다. 박 대통령이 그를 미워해 핍박했다면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했다.
김회장 유족들은 또 1970년 11월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찍힌 박 대통령과 김 회장의 사진에 대해서도 평가절하했다. 영철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해마다 수출의 탑 기념식에 부사장을 내보냈어요. 정보(중앙정보부) 쪽에서 아버지가 안 온다고 방방 뛰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간 거예요.”
김지태 회장의 계열사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이 억지로 회사를 맡겼다. 그래서 어려웠다”고 말했다. 책임 전가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지태씨 부인은 “당시 수출을 독려하던 시절이어서 종합무역상사를 권장했다. 억지로 수출하라며 기업을 못살게 굴었다. 유신(維新)이 인기가 없으니 수출로 쇼한 것이다. 결국 우리 회사도 쓸려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제부터 어려워졌는지에 대해 영철씨는 “1980년대 초”라고 했지만, 그의 아내는 “70년대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힘들어진 게 아니다”고 반박했다. 회사가 어려워진 시기를 두고도 유족끼리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이 김지태에게 써준 휘호
김지태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 박 대통령이 직접 쓴 ‘성업백세(盛業百世)’라는 휘호가 나온다. ‘일구육팔년 오월 대통령 박정희’ 옆에 낙관이 찍혀 있고, 우측 상단에 ‘위김지태사장(爲金智泰社長)’이라고 적혀 있다. 고운 선의 붓질이 아닌 힘써 쓴 박 대통령의 필체가 분명했다.
그해 5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달, 김 회장은 한국생사수출조합 이사장에 피선됐고 다음 달 회갑을 맞았다. 자서전이 1976년 1월 발간됐으니 출간을 기념하는 휘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5·16민족상’ 재단에서 박 대통령이 쓴 또다른 ‘성업백세’ 휘호 사진파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파일에는 ‘위김지태사장’은 빠져 있었다. 그러나 글씨체와 낙관이 같아 보여 둘 중 하나는 편집된 복사본으로 추정됐다.
재단 관계자는 “당시 박 대통령이 성업백세라는 글을 많이 연습했을 것”이라며 “보통 쌍낙관(작품을 헌정할 때 글쓴이가 받는 이의 이름을 함께 적어 넣은 것)은 위조가 없다. 사실상 대통령이 김지태 회장을 위해 쓴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김지태씨 유족들은 다른 말을 했다. 아들 영철씨의 말이다.
“박 대통령이 유신을 해서 인혁당 사건처럼 죄 없는 사람 죽이던 시절에 나온 책입니다. 처음에는 책(제목)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해서 찍었대요. 중앙정보부에서 난리를 치고, 할 수 없이 바꾼 겁니다. 권불십년이 뭡니까. ‘박정희 오래 못 간다’, 그 얘기 아니에요? 그 다음에 다시 나온 게 《나의 이력서》입니다. 그 글씨가 박정희가 실제로 쓴 건지도 모르겠고 ….”
《나의 이력서》에는 1965년 무렵 박 대통령의 무릎에 7살의 박지만과 김지태의 3녀(영미)가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진설명은 이랬다.
<김 회장의 3녀 영미 양이 ‘리틀 미스 유니버스’로 뽑힌 뒤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찾아뵙고 재롱을 부리고 있다. 남아(男兒)는 지만 군(1965년).>
그러나 김지태씨 유족들은 “‘리틀 미스 유니버스’로 뽑혀 같이 찍은 것이지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김 회장과 박 대통령과의 작은 인연까지 도려내려 애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 ‘강탈’ ‘헌납’ 여부는 관점에 따라 차이
김지태 회장의 부인 송혜영씨는 “조선시대에도 없던 사유재산 강탈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박정희 정권 때 기업이 성장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정권의 도움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주겠다던 ‘특혜’도 거부했다고 말한다. 일부 유족들은 기자와 만나 “지금껏 정수장학회가 파행 운영됐고 특정지역 사람에게 장학금을 주었다”며 현 정수장학회 이사진의 사퇴, 유족을 포함한 새로운 이사진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지만(당시 7세) 군과 함께 ‘리틀 미스 유니버스’로 뽑힌 김지태 회장의 딸을 안고 있다.
반면 3공 인사들은 “김지태는 3공 시절 관치경제의 덕을 본 사람”, “부실한 언론사를 헌납하고 그 보상으로 충분한 혜택을 받았다”, “5·16 이후 당시로는 조달받기 어려운 거금인 1800만 달러를 융자받는 등 혁명정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3공화국 당시 김지태 회장은 사업상 핍박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에서도 ‘부정축재 기업인들이 환수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명분 밑에 금융의 특혜를 독점해 왔고, 정부의 비호를 계속해서 받아 왔으며 외자도입의 우선권을 잃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경향신문》 1964년 12월 12일 <부정축재 처리의 어제와 오늘> 기사 참조)
만약 김지태의 ‘실크재벌’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유족들이 정권교체기마다 정수장학회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을까. 공교롭게도 박정희 정권이 끝나면서 그의 기업은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고 재계 명단에서 사라지는 신세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경향신문》 1992년 10월 9일자 <한국생사그룹의 몰락> 기사 참조)
취재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직접 5·16장학회 출연에 필요한 헌납을 강요하거나 김지태를 겨냥해 부정축재자로 몰았다’는 증언을 듣지 못했다. 사실, 혁명의 기치를 내건 군사정부 시절,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10만평 땅 등이 자발적으로 헌납됐느냐, 강탈했느냐는 논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국가재건을 위해’ 알토란 같은 언론사와 땅을 자발적으로 헌납할 만큼 ‘이타적(利他的)인 자본가’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지태가 아직 구속된 상태에서 추진된 헌납이었다.
지난 2월 김씨 유족 일부가 낸 주식반환소송 1심 판결은 ‘군사정부에 의해 자행된 강압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법원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시효는 지났다”며 주식반환 청구를 기각했다. 유족들은 항소, 2심이 12월 대선 직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 김지태의 기업이 크게 성장했고 여러 차례 산업훈장을 받은 사실에 대해선 주목하지 않는다. 유족들도 피해만 부각시킨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만든 ‘국민대통합 위원회’의 정신에 맞게 정수장학회 처리문 제도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여론이다.
군사정부가 김지태 회장을 부정축재자로 검거할 때부터 재산을 빼앗을 목적이 있었다면 정수장학회는 분명 ‘장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재 중 이런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군사정부의 사회기강 확립 조치 일환이라는 데 더 공감이 갔다.
그렇다면 김지태 회장이 구속 상태에서 재산헌납을 한 것은 강탈로 보기 어렵다. 이는 본인이 구속상태를 면하기 위해서 군사정부와 협상을 벌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경우에는 강탈보다는 헌납에 가깝다. 김지태 회장이 내놓은 재산은 일종의 보석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수장학회를 강탈이냐, 헌납이냐 중 어느 것으로 결론낼 것이냐는 결국 어느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강탈’이라면 그후 박정희 정부가 김지태 회장에게 베푼 여러가지 특혜와 그후 박정희·김지태의 우의를 설명할 길이 없고, ‘헌납’이라면 김지태 회장이 자유스런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게 마음이 걸린다.
김지태 회장 본인이 이 세상에 없는 상태에서 50년 전의 일을 후세 사람들이 과연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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