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명찰 Viet nam veterans

[스크랩] 마거리트히긴스의 6-25 전쟁의포화속으로

마블마운틴 2012. 6. 29. 09:07

 

역사스페셜 · 마거리트 히긴스의 6 · 25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다’
                     · 마거리트 히긴스의 6.25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든 종군 기자, 마거리트 히긴스가 있었다!

‘서울함락, 낙동강전투, 인천상륙작전’
미국인 여기자의 생생한 6.25전쟁 증언
그녀가 목격한 6.25전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6.25전쟁, 그 치열한 전선에 뛰어든 종군기자가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이틀 후인 6월 27일, 한 미국인 종군기자가 전쟁의 심장부, 서울로
잠입한다. 그녀의 이름은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미국 일간지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극동지국장인 그녀는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가 됐다. 그녀가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은 한국전을 기록한 최초의 단행본으로 한국전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전쟁 르포로 평가되고 있다.

히긴스는 6월 28일 한강인도교 폭파와 서울 함락을 직접 목격했고,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 방어선 시찰을 취재했다. 미 지상군의 첫 전투인 스미스 특수부대의
오산전투 패배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보도한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며 전 세계의 지원을 호소한 마거리트 히긴스. 하지만 그녀는 여기자라는 이유로 전선에서 추방을 당하고 만다. 사실적인 보도로 6.25전쟁의 증언자로 평가되는 히긴스. 그녀는 전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라”
    - 낙동강 전투를 목숨을 걸고 취재 보도하다!


1950년 7월 29일, 미 8군 워커 사령관은 낙동강전선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라”는 사수명령을 내린다. 히긴스는 추방명령이 철회되자마자, 최전방으로 복귀해 낙동강전선으로 달려간다. 한국전쟁의 최대 위기국면 중 하나인 낙동강전투를 생생하게 보도한다. 그녀는 미군과 한국군이 직접 전투를 벌이는 현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또한
히긴스의 취재를 통해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대(They might capture even devil)” 라는 유명한 별칭을 얻게 된다. 낙동강전투의 중요전투 중 하나로
한국 해병대를 중심으로 해군, 공군이 단독작전을 펼쳤던 통영상륙작전의 성과를 정리해본다.


5,000 : 1 의 도박, 인천상륙작전 취재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다

1950년 9월 15일, 성공확률 5,000:1의 도박이라고 불린 인천상륙작전!
히긴스 기자는 인천상륙작전의 준비과정부터 상륙당일에 이어 서울 수복 현장
까지 동행 취재한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의 취재, 보도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
수상자가 된다. 그녀가 보도한 인천상륙작전 기사를 통해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1950년 9월 15일을 재구성해본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데
일조한 한국 해군과 KLO 특수부대의 인천 첩보작전을 추적 보도한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다.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12만 중공군에 맞서 미 해병대의 참혹했던 장진호 전투. 히긴스 기자의 취재를 통해 당시 장진호 전투의 실상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최근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한국 카추샤의 유해가 귀환했다. 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6.25전쟁의 오늘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6.25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미국인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를 통해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와 과제를 생각해본다.

- 중앙일보 한영혜 리포터 [사진=연합뉴스] 2012.06.21


      마거리트 히긴스의 6·25전쟁 종군기 ‘자유를 위한 희생’

  6·25전쟁 종군기 · ‘WAR IN KOREA’ 요약 연재




본지는 다음주 월요일(9일) 부터 6 · 25전쟁 때 종군기자로 참가했던
마거리트 히긴스의 종군기 ‘WAR IN KOREA’ 를 우리말로 옮겨 연재합니다.
히긴스는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로 6·25전쟁 초기 6개월간 전선 곳곳을 누빈 유일한 여기자였습니다. 특히 6 · 25전쟁 르포 ‘WAR IN KOREA’ 는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탐욕이 빚은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전 세계에 동시에 번역 출간됐습니다. 히긴스는 이 책자로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히긴스는 “(우리는) 한반도에서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강조하고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돌면서 “한국을 도와야 한다” 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과 함께 인천으로 가는 항공모함에 있었으며,
종군기간 동안 맥아더를 인터뷰하고 이승만을 인터뷰했습니다. 당시
30세였던 그는 6·25전쟁의 본질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연재는 ‘자유를 위한 희생’ 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처음으로 번역한
이현표 씨가 맡으며, 각 장별로 요약해 15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 국방일보 | 2009.11.05

  ‘자유를 위한 희생’ · 전쟁터에서 쓴 비망록


마거리트 히긴스의 ‘War in Korea’ 와 번역본 ‘자유를 위한 희생’.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훈적이며 경고조의 이 문구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참전기념비의 검은색 대형 대리석판이다.
왜 하필 한국전쟁참전기념비에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일까?

6·25전쟁의 당사자인 우리가 한 번쯤은 가져
봄 직한 궁금증이 아닌가 한다. 본지가 오늘부터
15회에 걸쳐 연재하는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제목의 기사는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자유를 위한 희생’은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라는 미모의 여기자가 1951년에 출간한 6·25전쟁에 관한 책 ‘War in Korea’의 국내 번역본 제목이다. 본지는 올해 번역본을 발간한 코러스 출판사의 동의하에 책자를 요약해 같은
제목으로 소개한다.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 은 매혹적인 여성이 사내들의 싸움터에서
미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작성한 6개월간의 비망록이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6·25전쟁 발발
이후 오늘까지 국내외에서 6·25전쟁에 관한 수많은 책자와 논문들이 발간됐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어느 저술보다도 시사적이며, 객관적이고, 유익하며,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하며, 교훈적이다. 왜 그러한가?

첫째, 6·25전쟁에 관한 저술 중 이렇게 빨리 나온 책은 없었다.
저자는 1951년 1월 1일에 책의 서문을 썼다. 1950년 12월 중순까지
저자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둘째, 전투를 하는 군인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 종군기자가 현장을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는 6·25전쟁터의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저자들의 글이나
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셋째, 이 책에는 미군의 6·25전쟁 총책임자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이등병까지의 미군은 물론, 이승만 전 대통령, 한국 언론인,
한국군, 북한군 및 중공군 장병과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넷째,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본 기록이다.
저자는 여성으로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취재했음을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차별은 이 책이 갖는 매력의 하나가 되고 있다.

다섯째, 생생한 실화인 동시에 섬세하고 감수성 넘치는 문학작품이다.
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독일어 등 수개 국어로 번역된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여섯째, 이 책은 단순한 6·25전쟁 르포를 넘어서 전쟁, 자유민주주의, 국가 존립의 이유, 국가 간의 동맹, 남녀 차별의 사회적 문제, 인간적 유대감, 애국의 의미, 삶과 죽음에 관한 교과서 아닌 교과서다. 히긴스는 누구인가? 그녀는 길지 않은 세월을 불꽃같이 살다간 여인이었다. 그녀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일하면서, 후세에 교훈이 되는 알찬 기록을 남겨 놓은 인물은 흔치 않다.


히긴스는 1920년 9월 홍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1920년대 중반 히긴스 가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했다.

히긴스 어머니는 외동딸을 스타 발레리나, 일류 바이올리니스트, 저명한 학자,
최고의 언론인으로 키운다는 꿈을 가졌었다. 히긴스가 미국의 여자사립 명문
고등학교, 서부의 명문 UC 버클리 대학, 그리고 동부의 명문 콜롬비아 대학원을 졸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히긴스는 1942년 6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정식기자로 채용된다.
1944년부터 동 신문의 런던 특파원으로 일했고, 1947년부터 3년간은
독일 베를린 지국장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우아한 매력, 뛰어난 춤 솜씨와
바이올린 연주실력 등으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가 공군 소장인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베를린에서였다.

그러나 히긴스가 기자로서 탁월함을 인정받은 것은 바로 6·25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 한 달 전 그녀는 일본 도쿄 극동지국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미국
언론의 관심이 극동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히긴스의 편이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그녀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히긴스는 전쟁 발발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김포에 도착한 후, 12월까지 6개월 동안 미군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
그녀는 실제로 몇 번이나 죽음을 모면하기도 했다.

이런 그녀를 미군 장병들은 ‘혈관 속에 얼음물이 흐르는 여자’ ‘드레스보다 군복이 더 잘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진흙을 바른 여자’라며 사랑하고 존경했다. 히긴스는 6·25전쟁 취재로 이름을 날린 후,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했다. 참고로 히긴스 기자는 6·25전쟁에 대해서는 미국의 참전을 옹호하고 독려했으나,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반대했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히긴스의 죽음은 열정적인 삶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베트남 전쟁 취재 중 풍토병을 얻어, 1966년 1월 워싱턴 D.C.의 미 육군병원에서 마흔다섯 해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종군기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기려 그녀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히긴스는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에서 결론조로 말했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이렇게 호소했었다. “우리는 한국을 도와야 합니다.”

그녀의 호소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미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한국인들을 위해서 달려오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의 노력과 그들의 희생에 대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과 감사의 표시로 ‘(War in Korea)’라는 책자의 제목을 ‘자유를 위한 희생’이라고 번역했음을 밝혀 둔다. 히긴스
기자가 저 세상에서 새로운 제목을 널리 양해하고 사랑해 줄 것으로 믿는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09


  제2장 첫 후퇴 · 피란민과 함께 南으로 … 특종을 잡다


6·25전쟁 중에 만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출처: War In Korea]


라이트 대령의 전속부관으로부터 적의 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 막사 주변에 박격포가 터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재빨리 지프에 몸을 싣고
어두운 빗길을 뚫고 한강 인도교로 달렸다. 그때 오렌지색 불길 한 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어이구 큰일이야, 다리가 끊겼네.” 전속부관이 외쳤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이다. 나를 비롯한 미 군사고문단 일행 59명은 본부로 되돌아왔다.

라이트 대령이 증오에 찬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한 마디 경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를 날려버렸다.
자국 군인들을 실은 트럭들이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데 다리를 폭파했다.” 장교들 사이에는 서둘러 빠져나가지 않으면 포로가 될 것이라는 극도의 심리적인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러나 라이트 대령은 침착하게 위엄을 보이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자, 제군들, 주목하기 바란다. 그 누구도 혼자 도망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이제 공동운명체다. 침착해야 한다. 한강에서 차량들을 갖고
서울을 빠져나갈 수 있는 조립교(組立橋)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프·트럭·무기 수송차량 등 60대의 차량대열을 정비하고, 전조등을
밝힌 채 다시 출발했다. 언제 적지에 뛰어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지만,
조립교를 찾아 몇 시간이나 헤맸으나 허사였다.

정찰대가 나룻배로 강을 건널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라이트 대령이 나의 침울한 심정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었다. “젊은 여기자 양반, 기사 송고를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이지요?” 실제로 나는 도쿄에서 함께 온 세 명의 남자 특파원이 수원에 먼저 도착해서 기사를 송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내게 제안했다. “보세요. 여기 통신트럭이 있잖아요. 기사를 짧게 쓰면
당신 메시지를 송출해 보도록 할게요.”

희망의 빛이 보였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타자기를 꺼내 지프 앞에 올려 놓고 미친 듯 자판을 두드려댔다. 정지해 있는 우리 차량대열 옆으로 한국 군인들의 긴 후퇴 행렬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한국 군인들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새벽 안개 속에서 짙은 남색 스커트, 꽃무늬 블라우스, 연한 청색 스웨터를 입은 내가 그들에게는 특이한 존재로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기사를 완성해 송고하려 했으나 대령의 말과는 달리 통신트럭에는 전송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기사 전송을 못해 낙담할 겨를도 없이 벌써 적의 포가
우리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룻배로 어렵사리 강을 건넜다. 그 후 산길을 따라 수원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우리는 일렬종대로 거대한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나는 몸이 원기를 잃어서 일행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쪽으로 흙탕길을 한 시간쯤 걸었을 때, 하늘에서 윙윙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은빛 전투기들이 다가와서 공중곡예를
시작하더니 서울 상공에서 급강하했다. 나는 흥분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것이 맥아더 장군의 메시지에 언급된 ‘중요한 사건’의 하나임에 틀림없었다.

정말 감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즐거움을 맛본 것은 잠시였다.
행진은 긴 환호를 허락하기에는 너무도 냉혹했고 처절했다. 이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패배한 것이 분명했다. 많은 한국 군인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우리 미국인 일행을 보자, 무기를 버리고 방향을 돌려 도망쳤다.

새로운 임시 수도가 된 수원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종군기자들을 모아 놓고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우리를
귀찮은 존재라고 단정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세 명의 신문사 동료를 만났다.
서울에서 나보다 먼저 출발했던 그들은 한강 인도교를 건너다 다리가 폭파되는 바람에 두 명이 부상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날 나는 동료들과 기사 송고가 가능한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로 되돌아갔다. 비행기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당시 한강을 건너 서울을 벗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우리가 한강을 건너던 바로 그 시간쯤 많은 외국인이 적에게 체포됐다고 들었다.

다음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원공항의 활주로에는 맥아더 사령관의 그 유명한 전용기 ‘바탄’이 착륙해 있었다. 맥아더는 지프 편으로 한강을 시찰하러 갔다가 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나는 바람이 세찬 활주로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의 방문에 관한 긴급 기사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그는 금실로 필리핀의 바탄섬 모양을 수놓은 모자를 쓰고, 컬러 부분을 열어 놓은 셔츠 위에 여름용 황갈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활주로에서 나를 보자,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동승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직접 만나보면 맥아더 장군은 인자하고, 대단히 명석한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폼 잡기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는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맥아더를 한국에 보낸 것은 한국을 구원하는 데
공군력과 해군력 지원만으로 가능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기존의 결정을 번복해 이제는
이 반공의 보루를 가능하다면 구원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분명했다.

비행기 내에서의 단독 인터뷰에서 맥아더는 말했다.
“한국인들은 미군 정예부대의 투입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신체 조건이 좋습니다.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 있으면 전의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내게 2개 사단만 주어지면, 한국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2개 사단이면 “한국을 지킬 수 있다”는 맥아더 장군의 신념은 미 군사고문단과 그의 측근 지휘관들의 건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아직도
적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인들이 소련의 지원
으로 군비를 확충했으면 얼마나 했겠느냐 하고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비행기에서 나는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특종을 건졌다.
미국의 지상군 파병에 관한 최초의 언질을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도쿄에 도착하는 순간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2개 사단을 파병해주도록 건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의 건의를 수용할지는 알 수 없군요.”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11


  제3장 공황 · “우리가 포위됐어요” 수원을 뒤로하고 …


6·25전쟁 종군 취재 중인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타자기를 이용해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출처: War In Korea]


맥아더 사령관 전용기에서 그와 단독인터뷰를 한 다음날인 6월 30일,
나는 도쿄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수원 방문길이었다.

비행기에서 막 내렸는데, 심술궂게 생긴 미 육군대령이 나를 맞았다.
대령은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젊은 아가씨,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여자가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나는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걱정에 대해 마음속에 담아 뒀던
답을 쏟아냈다. “위험하지 않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한 사태가 뉴스이며, 뉴스를 수집하는 것이 나의 일입니다.”
대령에게 답변하고 있을 때 지프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놀랍게도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의 전속부관이었다.

“헤이, 중위님, 사령부까지 태워다 주시겠어요?”
지프가 내 앞을 휙 스쳐지나가는 사이에 나는 대령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날쌔게 뛰어 올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24시간밖에 안 됐는데 수원에 있던 임시 미군사령부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미 군사고문단 동료들은 도쿄에서 파견된 영관급 장교들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 장교들은 친절했으나, 도쿄에서 온 장교들은
극히 사무적이고 고압적이었다.

저녁 6시, 임시사령부 건물 내에서 장교들이 나지막한 소리로 환담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 그린우드 소령이 내게 다가와 조언했다.
“사령부에서 멀리 벗어나지 마세요. 사태가 또다시 악화되는 것 같아요.”
나와 동료들은 회의실 가까이에서 서성거렸다. 한국과 미국군 장교들로부터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때 갑자기 귀를 째는 소리가 들렸다.

“비행장으로 가시오.” 우리 세 명의 기자는 서로 쳐다봤다.
누가, 왜 공항으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거의 동시에 펄쩍 뛰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침 회의실 안쪽에서 문을 향해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나이
지긋한 대령을 만났다. 내가 그의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왜 그래요? 뭔가 잘못됐다면, 우리 모두가 남쪽의 대전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재빨리 물었다. 대령은 오페라 가수처럼 팔을 공중으로 높이
내뻗으면서 다급히 외쳤다. “우리가 포위됐어요, 포위됐어.”

회의가 갑자기 중단된 이후 5~6분밖에 경과하지 않았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특파원 동료들은 카빈총을 손에 들고 나와 함께 지프에
꽉 끼어 앉았다. 젊은 병장 한 명도 호위병으로 동승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타자기와 칫솔뿐이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후퇴할 때 꼭 필요한 타자기와
칫솔을 빼고는 다른 사물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수원 공항으로 갔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하니 갑자기 공항을 사수하려던 계획이 변경돼 다시 대전으로 후퇴하게 됐다. 밤 11시쯤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는 미군 행렬에 끼어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마침 장마가 시작됐다.
한국의 밤은 여름인데도 싸늘했다. 그런데 비까지 매정하게 쏟아지니
기온이 뚝 떨어져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낀 겨울 새벽 같았다.

도로는 미끄러운 흙탕길로 변했고, 강물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갑자기 차가 심술궂게도 진흙탕 속으로 미끄러져 도랑에 빠졌다. 우리는
지프를 길 위로 끌어 올리려고 사투를 벌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힘이 부족하다는 죄책감을 느낀 나는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국인 가정을 찾아 나섰다.
마침 새벽 5시쯤 나는 농가로 들어갔다. 마루 위에는 여러 명의 사람이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조용한 태도로 나를 맞았다.

내 얘기를 들은 후 성인 남자 2명이 나를 따라 왔다.
그들의 늠름한 근육은 차를 들어 올리는 데 훌륭하게 기여했다.
이들은 수고에 대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보답할지 협의하고 있을 때 벌써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새벽 6시쯤 대전에 도착해 처치 장군을 만났다.
“오늘 아침 미군 2개 중대가 한국으로 공수돼 옵니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미국이 전쟁 중이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물었다. “전쟁 개입이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사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국인들과 일하면서 정말 혼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치 장군은 나중에 한국 군인들의 품격에 대한 이러한 그의 견해를
바꿨으며, 많은 한국 군인을 자신의 부대인 미 육군 제24 보병사단에 편입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기사 송고를 위해 무초 주한미국대사의
대전 집무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전화가 없었다. 대사는 대전역 근처의
미 공보원에서 몇몇 종군기자들이 전화를 사용해 왔다고 알려줬다.

도착해 보니 서로 통신하려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6·25전쟁 기간 내내 기사를 써서 송고하는데, 단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6·25전쟁 취재는 이런 상황 아래서 이뤄졌다. 그날 아침 기사를 송고한 후 나는 동료 특파원과 대사 집무실로 돌아가려고 보슬비가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마침 우리 앞을 지나는 지프를 세웠다. 차에는 유별나게 잘 차려 입고, 영어를 꽤 잘하는 젊은 한국군 장교가 타고 있었다. 내 동료는 장교와 뒷좌석에 탔고, 나는 앞 좌석 운전기사 옆에 앉았다.

기사를 무사히 송고했다는 안도감에서 활기를 찾은 내 동료는
한국군 장교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다정스럽게 치며 말했다.
“이봐요, 친구, 아군에서 싸우는 겁니까?” 장교의 답은 정중했다.
“글쎄요, 싸울 계획입니다. 지금 막 포트 베닝(역주: 미국 조지아 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최대의 육군 군사훈련소)에서 오는 길입니다.”

동료는 그의 어깨를 다시 한번 치며, 유쾌하게 말했다.
“좋아요, 친구, 근데 뭐 하는 분이신지?” 장교가 대꾸했다.
“한국군의 방어를 재편하는 일을 할 겁니다. 실은 방금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받았소. 한국군 소장이며, 이름은 정일권이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12


  제4장 최초의 교전 · 적 탱크에 바주카포를 발사하다


젖먹이 아이를 싸안은 채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이고 황망히 피란길에 오른 한국 아낙네. [출처: War In Korea]


이틀 후 종군기자들은 지프로 미군 최초의 전투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새벽에
대전을 출발했다. 장마는 계속돼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평택 인근에 다다랐을 때, 도로 옆에는 폭격을 당해 수족이 절단된 수십 명의 불운한 피란민 시체가
널려 있었다. 도로 양쪽의 개천과 논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의 대화는 날씨만큼이나 침울했고, 대화의 주제가 묘비명으로 옮겨졌다. 매카트니 로이터통신 도쿄 지국장은 버마에 있는 영국군 무명용사 묘비명을 통째로 암송
했다.

“여기, 우리가 죽어서 누워 있다오. 우리를 낳아준 조국을 위해 부끄럽게 살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라오. 사람들은 생명을 잃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은 생명을 걸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오. 그리고 우리는 젊었다오.”

이날 아침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우울했으나,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 때문에도 침울했다. 나의 소속사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새로 파견한 내 선배 동료가
같은 신문에서 2명씩이나 한국에 체류할 필요가 없다면서 나더러 한국을 떠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도쿄로 돌아가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심지어 내가 도쿄에 독신자 친구(맥아더 장군을 의미)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자기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는다는 식으로 회유하기까지 했다.

6·25전쟁을 취재하는 유일한 여자 기자이기 때문에 나는 많은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미군과 다른 기자들의 도움으로 여름이 다 지날 즈음, 내 신상에 관한 문제는 잔류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평택의 대대 전투지휘소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을 즐기려 했을 때 바쓰 준장이 오두막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적의 탱크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바주카포 팀을 긴급 지원하라.”
우리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공산군의 탱크가 미국인들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임무부대가 방어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포병 중대의 공격을 용케 피해 나오는 적의 탱크들이 있다면, 그들은 곧장 이곳으로 진군해 올 것입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전선에 도착한 미국의 젊고 미숙한 병사들은 이렇게 전투에
돌입하게 됐다. 바주카포 팀을 따라 미지의 전선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불안감과 흥분이 교차되는 매우 불유쾌한 감정을 경험했다. 비에 흠뻑 젖은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우리는 신속히 이동했다. 도로는 한국 군인들로 꽉 막혀 있었다.
헬멧을 나뭇가지로 빗각으로 튀어나오게 위장한 한국군 병사 한 명이 말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외쳤다.

“탱크! 탱크! 탱크들이 몰려와요! 돌아가시오!”
얼마나 많은 탱크들이 우리와 스미스 중령 휘하의 부대 사이에 위치한 이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날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찰스 페인 중위를 만났다. 그에게 다시 전쟁터에 복귀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글쎄요, 일본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솔직히 죽을까봐 겁이 났습니다. 내가 누릴 좋은 운을 이탈리아에서 다 써버렸다고 생각했거든요.
인간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단지 몇 번의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총소리를 듣자마자 이런 감정을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페인 중위가 자신의 행운의 몫이 앞으로 얼마나 위태롭게 될는지를 미리 알았었다면, 크게 겁먹었을 것이다. 내가 8월에 다시 그를 보았을 때 대대본부의 11명 간부 중에서 대대장 아이레스 중령과 페인 중위만이 생존해 있었다.
900명의 대대원 중에서 263명만이 온전히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사망했거나
부상당했다.

우리가 6·25전쟁 최초의 미국인 죽음을 목격한 것은 바로 이곳이었다.
아군 박격포팀 소속 50여 명의 젊은이는 최초의 공격명령을 받았을 때 마치 단편 뉴스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적의 탱크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바주카포를 발사했다. 공산군 탱크들은 포탑을 들어 화염을 뿜어 답례했다. 적군 병사들은 탱크에서 뛰어내려 기관총으로 미군 바주카포팀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쌍안경을 통해 금발의 미군 병사가 목표를 조준하려고 풀밭에서 머리를
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적의 탱크에서 섬광들이 지표에 거의 닿듯이 튀어나오면서 그가 쓰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 확인할 수는 없었다.
몇 분 후 어느 병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섀드릭이 가슴에 총을 맞았어요. 사망한 것 같습니다.”
병사의 말투는 극히 사무적이었다. 나는 그때 전쟁의 실상은 문학작품에서
비쳐지는 그 어떤 묘사보다도 훨씬 더 사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부상자들도 거의 우는 법이 없었다. 누구도 그들의 울음을 들어줄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교전에서 완전히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의 전면 후퇴가
불가피하게 됐다. 적의 탱크들을 저지할 수단을 갖지 못했고, 측면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보병을 막기에 병력이 너무도 모자랐다. 우리는 스미스 전진부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사람들은 전투에 임하게 되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사태를 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도 이 같은 현상을 꽤나 쉽게 경험했다.

본부에 도착해서 내가 한 첫 행동은 몸을 건조시키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의무부대에 가서 이후 나의 가장 귀중한 개인 소지품이 될 살충제를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섀드릭 이등병의 시신이 운반돼 왔다. 그의 얼굴은 덮여 있지 않았다. 시신이 낡은 판자 위에 눕혀질 때, 그의 얼굴에서 약간 놀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죽은 병사에게서 그런 표정을 자주 보았다.

섀드릭 이등병은 자기에게 죽음이 찾아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때 내게는 6·25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던 것처럼. 그는 참으로 어렸다. 19세 나이라지만 금발머리와 연약한 체격을 가졌기에 훨씬 어려 보였다. 누군가 그에게 덮을 마른 담요를 찾으러 나갔다. 의무부대
병장이 분말 벼룩약을 내게 건네주면서 시신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죽다니.”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17


  제5장 어떻게 우리 군이 이렇게 빨리 후퇴할 수 있어
          · 새벽녘 깨어보니 한 명의 미군도 없이…



한바탕 전투가 치러진 후 한 미군이 부상당한 동료 전우에게 링거를 맞혀
주고 있다. [출처: War In Korea]


나는 바닥 위에 보잘것없는 담요 한 장을 깔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밀한 방안의 동요가 내 가슴을 쿵쿵 때렸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사진기자 마이던스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빨리 작전상황실로 갑시다. 급히 후퇴해야 할 모양입니다.” 시계에 플래시를
비춰보았다. 새벽 1시였다. 나는 그에게 응답했다. “또다시 후퇴할 시간이군요. 공교롭게도 서울과 수원을 떠났던 시간과 똑같네요.”

우리는 긴장 속에 침묵이 흐르는 상황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상황실 중앙에는 바쓰 장군과 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이 앉아 있었다. 바로
12시간 전까지도 두 사람에게서 볼 수 있었던 확신감이 이제는 깊은 근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책상 위에서 타고 있는 등유 램프가 두 사람의
심각한 얼굴을 두드러지게 비췄다. 다수의 장교들이 미친듯이 야전용 전화기를 돌려댔고, 이 광경이 애처로운 불빛 속에서 낯선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전투에서 후퇴한 페리 중령이 나타났다. 그는 걷는 데 어려움이 있는 듯했다. 다리에 파편을 맞았던 것이다. 그의 음성에서 극도의 피로와 처절한 불행이 혼재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중령의 보고는 간단했다.
“우리는 적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진격해 왔고, 우리는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사격했습니다.”

나는 바쓰 장군의 눈빛을 통해 그가 잠시 한숨을 돌리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감정을 자제하려고 애써 노력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이었다.

“귀관과 스미스 중령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황은 얼마나 심각한가?” “심각합니다, 장군님. 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부상자들은?”
“들것에 실린 부상자들은 포기했습니다.” 장군은 움찔하면서,
매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부터 간략히 들어보도록 하자.” 

페리 중령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저희는 오산 북쪽의 간선도로 양쪽 산등성이에 참호를 팠습니다. 우리는
75㎜ 무반동총 몇정, 약간의 박격포, 그리고 또 다른 화기로 무장했습니다.
아침 8시 반쯤 적의 탱크들이 굴러오기 시작했습니다. 사격을 개시해 4대 아니면 5대를 명중시켰으나, 적의 탱크들은 아측 진지 바로 옆까지 굴러왔습니다.
바주카 포병들은 도로로 내려가서 사격했으나, 적의 탱크 부대에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탱크들은 우리 후미로 돌아와 뒤쪽에서 우리 진지를 향해 사격을 가해 왔습니다. 동시에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적의 보병부대가 몰려왔습니다. 포위된 상황에서 우리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후 3시쯤에는 병력·식량·탄약이 모두 고갈돼 모든 중화기를 버려 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미스 중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장병들을 지휘해 언덕을 넘어갈 때였습니다.”

페리 중령의 경험담과 우리의 지연작전 수행과정을 종합해보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을 알 수 있다. 중공군도 진격해 올 때 똑같은 전투절차를 따랐다. 적은 전면공격을 피하고, 그들의 큰 이점인 많은 병력을 중점적으로 활용하는 데 뒀다. 즉, 일련의 침투와 포위작전에 의존했다. 물론 전쟁이 전개
되면서 그들은 몇 가지 새로운 전술들을 개발했다. 우리 장비들을 약탈하자
미 군복으로 위장하고, 영어를 사용해 아군을 교란시켰으며,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군 행세도 했다. 그러나 기본 패턴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페리 중령이 설명을 마치자, 바쓰 장군의 첫 마디는 의외였다.
“맙소사, 교량들에 설치됐던 다이너마이트를 해체하다니.”
바쓰 장군은 스미스 중령이 전선을 지킬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적의 탱크 공격에 대비해 다리를 폭파하려고 설치해 뒀던 폭발물들을 제거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정원의 반밖에 채워지지 않은 취약한 대대병력이
곧 적의 공격을 받을 차례였다. 그런데 적은 공격하지 않았다.

왜 적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의아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북한군은 잘 무장된 6개 사단병력으로 우리의 기세를 꺾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때 부산까지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을까? 이는 6·25전쟁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만약 그들이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우리의 방어벽은 무너졌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공산주의자들이 개전 초기
몇 주 동안 머뭇거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실수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과소평가한 것만큼, 그들은 우리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최후의 결전에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남아서 전투를 지켜보려고 했으나 바쓰 준장의 권유로 성환으로 갔다. 언제나 그렇듯 전투지휘소는 학교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연대 장교들은 몸을 굽혀 지도를 보고, 전화를 돌리면서
극도로 흥분해 전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됐다. 흥분이 가라앉고, 피곤이 다시 엄습해 왔다. 전쟁에 끼어들어
알게 된 인체구조에 대한 지식이 있다.

나는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그렇게까지 오래 견딜 수 있는지 예전엔 정말
몰랐었다. 나중에 병사들과 해병대원들이 잠을 자지 않고 밤낮으로 행군하고
전투하는 것을 보고는, 종군기자들이 참아내야 하는 피곤의 정량은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나는 방구석에 놓인 흔들거리는 테이블 위에 몸을 쭉 뻗고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5시 반쯤 깨어나 보니(너무 조용하고 벼룩 떼들의 공격이 심했기 때문에
잠이 깬 것으로 생각됨) 방에는 단 한 명의 미군도 보이지 않았다. 지도들, 총기들, 마루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던 통조림 식량을 담은 사각형의 대형 박스들도 사라져 버렸다.

마이던스 기자는 팔꿈치에 머리를 괴고, 아직 잠이 덜 깬 흐릿한 눈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방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아니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어, 우리를 놓고 연대병력 모두가 달아나 버렸잖아. 어떻게 우리 군이 이렇게 빨리 후퇴할 수가 있어?” 우리는 어떤 새로운 재앙이 갑작스러운 이동을 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면서 차를 얻어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18


  제6장 전쟁초기 나날들
          · 북한군의 잔인한 독약'을 맛보다



전쟁의 참상을 피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 한국인 가정.
[출처: War In Korea]


전쟁은 불과 열흘이 경과했는데, 우리는 벌써 네 번씩이나 후퇴했다.
우리가 대전의 미 제24사단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윌리엄 딘 소장은 사령관직을 인수받고 있었다. 이날 작전장교는 열흘만 더 있으면, 반격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후 며칠간 악몽 같은 사태가 사령부를 정신차리게 만들었다.

절망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부랴부랴 증원부대를 긁어모아 한국에 급파했다. 우선 일본 주둔 미 점령군이 한반도로 이동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군의
점령상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미국은 본토 병력이 바닥날 정도로 가능한 모든 병력을 한국에 파병하는 숙명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 한반도에 투입된 미군은 증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적을 막아야 하는 가망 없는 싸움을 벌였다. 지연작전이란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시간을 버는 작전이었다. 지연작전은 낯설고, 먼 이국땅(천안·전의·조치원·금강·대전·영동)에서 우리가 당한 패배를 지칭하는 군사용어이기도 했다.

첫 번째 지연작전이 시행된 천안에서 적은 우리를 죽음의 함정에 빠뜨렸다.
대전으로 후퇴했던 미군은 너무 빨리 후퇴했다고 판단하고 적에게 넘겨준 지역을 되찾기 위해 천안지역으로 갔다. 종군기자들도 함께 출발했다.

정찰대는 시거스 소령이 이끌었다. 키가 크고 미끈한 외모를 가진 그는 영국의
화살표 와이셔츠 광고에 나오는 수준의 미남 장교였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공군에서 육군으로 전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어린애에 불과해요.
어머니께서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나를 끔찍이도 걱정하셨나 봐요.”

소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한마디 더했다.
“그래서 지금은 정찰대를 지휘하고 있지요.” 몇 마일을 진군했을 때 우리 앞에서 참호를 파고 있는 북한군을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허겁지겁 달아났다.
이때 우리 특파원들은 기사송고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대전의 사령부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천안에서 교전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다시 천안으로
서둘러 가 보니 시거스 소령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천안전투에서 제34 연대장이 두 번 바뀌었다.
연대장 러브리스는 명령 없이 후퇴해 해임됐고, 또 다른 연대장 마틴 대령은
15야드 거리에서 바주카포로 적의 탱크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천안전투는
끝없이 이어진 일련의 후퇴를 예고하는 전주곡과 같았다. 이후 나는 전쟁이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미쳐 날뛰는 인간으로 변모시켜 놓는 것을 보았고, 희망이
없는 싸움에 빠져들었다고 정부를 저주하며 무기를 버리는 것도 보았다.

반면에 나는 그들과는 다른 젊은이들도 보았다. 이들은 진지를 구하기 위해서,
동료를 돕기 위해서, 또는 보다 단순히 말해서 위대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잘 싸워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행위를 몸으로 실천했다.
패배를 계속하던 몇 주 동안 미군의 사기는 꽤 낮았으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면 누구든 제대로 싸울 기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나빴다. 이 때문에 당시 다음과 같은 촌평들을 듣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는 마마보이지 영웅이 될 만한 그릇이 못 된다.” “늙은 해리(트루먼 대통령)가 주는 훈장 따위는 필요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나 달아주라고 그래.”

병사들에게 지연작전이 최선의 방안이며, 절실히 필요한 시간을 벌게 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설득시키기 어려웠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동료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다면, 이러한 주장들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명령에 따라 ‘기필코’ 지연작전을 완수하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25세의 제임스 소위는 피로와 노여움으로 입술을 떨며 말했다.

“당신이 본국의 국민들에게 진실을 얘기해주는 종군기자입니까?
25명의 소대원 중 고작 3명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나요?
우리가 병력과 무기도 없이 싸우고 있으며, 이것이 전혀 쓸모 없는 전쟁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까?” 그러나
많은 미군 장교는 솔선수범하며 병사들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고 지연작전을 수행해냈다. 하나의 예가 미 제21 보병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이다. 그는 진지를 지키는 초기전투 하나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 개시 후 일본에서 점령군으로서의 안이한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차출돼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젊은 병사들이 보여준 배신행위와 허겁지겁하는 행위를
경험하고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미국인들은 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에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고 있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미국은 어떻게든 병사들에게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러운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다는 점을 설득시켜야만 한다.

8월 말 이후 전선에서 미군 병사들의 태도가 변했다. 이들은 흉측한 적들과
싸우고 있으며, 가능한 한 조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격퇴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잔혹하게 살해된 동료들의 시체를 목격, 허위로 선전하는 북한의 라디오방송 청취 등으로 이런 변화가 초래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변화를 보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산군은 세 가지 중요한 이점을 갖고 있었다.

첫째, 적은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북한군은 병력 수에 있어서
10대1, 20대1, 심지어는 30대1의 비율로 유리한 상황에서 미군과 싸웠다.

둘째, 공산군은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미군은 개전 3주 후 로켓발사장치가 도입될 때까지 적의 탱크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당초 우리 정보 당국은 북한군 탱크 수를 65대 정도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초기단계의 전투에만
400대 이상이 됐다.

셋째, 공산주의자들은 혼동의 이점을 갖고 있었다. 혼동은 미군이 친구인 한국군과 적인 북한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서 야기됐다. 적들은 이를 최대한 이용했다. 핵심 교통요지인 대전 사수를 위한 전투는 초기 지연작전 중 가장 중요했지만,
그만큼 희생도 컸다. 우리는 대전전투에서 북한군의 잔인성이라는 독약의 맛을 충분히 경험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19


  제7장 기자 히긴스 · 性에 구애받지 않는 훌륭한 기자


미군 병사가 군의관의 도움으로 부상병을 내려 놓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 병사는 전선에서 대전 인근까지 2000야드를 이 부상병을 업고 왔다. [출처: War In Korea]


대전에서 전투가 한창일 때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즉시 벗어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내 기사가
미군 당국의 비위를 거스른 것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기자로서 절실히 믿고 있는 것이 있다. 즉, 우리 정부가 깨어 있고 공정한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면,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면, 우리 기자들이 심하게 ‘상처를 주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하에 나는 6·25전쟁에서 미군과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추방은 내가 쓴 기사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쫓겨날 처지에 놓였던 것이었다. 이유는
“전선에 여성 편의시설(화장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벌써 3주간을
미군들과 지내면서 최악의 상황을 견뎌냈고, 여성용 화장실을 걱정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나무 덤불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당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호소했다.

명령이 전달된 날 오후 어느 소령이 대전을 출발하는 기차에 나를 태우려 했으나 나는 불응했다. 딘 장군도 내 결정을 지지해 줬다. 여러 주 동안 전쟁 취재를
허용하다가 갑자기 ‘강제추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나의
어려운 상황에 관한 소문은 금세 퍼져 나갔다. 지휘관들에서부터 이등병들까지 많은 병사가 내게 와서 위로해 줬다. 전쟁에는 참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포탄이든 기관총 공격이든 간에 개의치 않고 위기를 상호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특수한 연대감이다.

우리 일상생활에는 많은 가식이 있으며, 가식들이 교묘히 감춰질 수 있다. 그러나 포탄이 날아들 때는 가식을 부릴 시간이 충분치 않으며, 한 사람의 인물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당신이 본 것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전우들, 항해사들, 조종사들, 종군기자들을 인간적으로 가깝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같은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이들을 격리시켜 놓는다.

7월 16일, 나는 전선에서의 마지막 기사를 쓰고 대구로 가서 워커 사령관을 만나 담판을 지을 작정이었다. 이날 오후 늦게 나는 지프를 몰고 사단 사령부를 둘러
싸고 있는 구역을 별생각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게 돌아오라는
고함소리가 울렸다. 나는 사령부 건물로 가서 소요의 이유를 알고자 했다.
여러 명의 사령부 장병은 책상 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밖을 보니
딘 장군이 나무판자로 된 울타리에 기대 있는 것이 보였다.

딘 장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군지 서툰 사수구먼. 운이 좋았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
아군 병사 몇 명의 오판으로 아군 간에 사격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쯤 나는 다른 종군기자 한 명과 함께 지프로 영내를 빠져나왔다. 우리는 도심을 가로질러 남쪽을 향해 텅 빈 거리를 달려 자정이 돼서야 대구의
미 육군 제21연대 본부에 도착했다. 벌써 막사의 마룻바닥에 벌렁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장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 옷을 입은 채 자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어느 장교는 내가 자기 옆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상당한 볼거리를 연출했다. 그는 연대장 막사로 뛰어 들어
가면서 탄성을 질렀다. “어이구, 연대장님, 우리가 밤새 여자와 함께 자고 있었던 것 아세요?” 전번 전투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은 미 육군 제21연대 장병들은
부지런히 참호를 파고 있었다. 장병들은 금강 북쪽에서보다 훨씬 침착해 보였다. 그들은 심지어 익살스러운 농담까지 했다.

그날 밤 나는 ‘병원열차’에 몸을 싣고 대구로 출발했다. 기차 객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불결했다. 기차 안에는 들것에 실린 환자들과 걷는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다. 그 많은 부상자를 위한 위생병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맞은편의 어린 병사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나, 그의 고통 어린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워 말을 붙이기가 망설여졌다. 마침내 나는 말을 걸었다.
“물 좀 가져다줄까요?” 18세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그는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국민들에게 우리가 벌지 전투와 같은 가망
없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때 복도 건너편의
다리가 절단된 하사가 끼어들었다. “야, 제발 그런 볼멘소리 좀 그만둬. 어쨌든 우리가 벌지 전투에서 결국 이겼잖아?” 두 병사는 그날 밤 숨졌다. 나는 그들이 죽은 사실을 대구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는 그곳에서 잠시
정차했었고, 이 두 병사의 시신이 실려 나왔다.

미 제8군에 도착했을 때 젊은 공보담당 대위가 딱딱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무도 못 만납니다. 비행장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꼼짝없이 도쿄로
추방됐다. 그런데 도쿄에 도착했을 때, 맥아더 장군이 12시간 전에 추방명령을 철회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위가 나를 짐짝같이 다뤄 공항으로 쫓아 버린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나는 많은 질문을 받고 있다. 여성으로서 직업상, 특히 전쟁에서 받는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내 생각에 가장 큰 불이익은 모든 종류의 기삿거리가 된다는 점이다. 기자들 간의 경쟁이 심한 일간지의 세계에서 여기자가 경쟁에 뛰어들었다면, 남성 동료는 여기자가 매력적인 미소 때문에 특정 기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여기자가 지프를 타고 길 위의 행렬 옆을 스쳐 지나가면,
병사들이 휘파람을 불거나 괴성을 지른다. 그러나 포탄이 터지고 사격이 시작되면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싸움에 몰두하고 총알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누구도 내게 그의 참호로 들어오라고 제안한 적이 없다.

최근 나는 어느 지방신문 사장으로부터 그 신문이 나에 관해 보도한 사설을
받았다. “히긴스는 남성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에서 여성이라는 프리미엄으로 명성을 얻으려하지 않는다. 그녀의 야심은 성(性)에 구애받지 않고 훌륭한 기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 신문 자료실 내 그녀의 기사철 봉투에는 ‘마거리트
히긴스 - 기자(Newsman)’로 표기해 놓았다. 우리는 히긴스 양이 이를 좋아할 것으로 믿는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23


  제8장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라
          · 빗발치는 총알 뚫고 대구방어선 사수



1950년 11월 23일 가평ㆍ춘천지구전투에 참가한 국군5사단 장병들이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다.[국방일보 DB]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여성 종군기자들에 대한 취재금지를 철회한 후
7월 중순 전선으로 되돌아간 나는 처음으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을 만났다. 그는 불독같이 짜리몽탕한 체격의 도전적인 인물이며, 더러운 것을 못 보는 인물이었다. 그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면, 나는 미 해병대 소위 두 명이 미 제8군사령부 내로 들어가려다가 타고 온 차량이 더럽다고 쫓겨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매우 정확하고 솔직했다. 그는 전선이 여성에게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으나, 명령은 명령이므로 이제부터
내가 남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여성인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나는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될 것이오. 미국 국민들이 나를 용서치 않을 것이니, 제발 죽거나 포로가 되지 마시오.”
그는 약속을 지켰고, 그때 이후 나는 미 육군에 관한 한 더 이상의 장애 없이
남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부대가 대규모로 증원됐으나 후퇴는 여전히 계속됐다.
우리는 대구 주변을 크게 반원을 그리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워커 장군의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라” 라는 유명한 사수명령이 하달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워커 장군은 그의 특기인 대규모 정면대결작전을 개시했다. 병력이 부족하고 예비 병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낙동강 하구에서부터 남쪽 해안의 마산까지를 큰 반원형으로 방어하도록 지정학적으로 묘하게 군을 배치했다.

나는 사수명령이 하달된 후, 마침 제25사단이 최초의 전투를 하는 남서부
전선에 때맞춰 도착했다. 마산에서 나는 지프를 빌려 해질 무렵 아름다운
산들을 넘어 진동리로 갔다. 학교 건물에 제27연대 임시본부가 설치돼 있었다.
나는 마이캘리스 연대장(1969~72년 주한 미 제8군사령관 지냄)을 만났다.
그는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직한 인간이었다. 이날 밤 그는 다소 긴장하고 있었다. 마이캘리스는 자신이 진동리에 있다는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고, 더구나 체크 중령 대대를 적지로 보내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게 한 것도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다행히 체크 중령 대대의 탱크들은 적의 대전차포 공격을 받았으나, 부서진 탱크들을 응급 처리해 적의 포위망을
뚫고 새벽 1시에 무사히 진동리로 복귀했다.

학교 건물 안팎에는 연대 내 모든 장병이 모여 있어 왁자지껄했다. 마이캘리스는 전투 지휘소를 전진 배치하려다가 너무 늦고, 장병들이 지쳐 있어 이전을 연기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얼마나 운 좋게 또다시 위기를 모면했는지를 알게 됐다. 장교들과 교실에서 아침식사를 마칠 때쯤 폭음과 함께 사방에서 총알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밤새 적들이 산길을 따라 잠입해 우리를 포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교실바닥에 납작 엎드려 코로 바닥 먼지를 문질러 닦아내면서, 어떻게
사살되지 않고 벗어나느냐 하는 생각뿐이었다. 마분지 같이 얇은 벽을 관통한
총알들이 우리 주변의 마룻바닥을 찢어 놓았는데도 아무도 총에 맞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장교 하나가 갑자기 창문으로 다이빙하듯 돌진하더니,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모두가 그를 따라 뛰어나가 최소한 고지대에서의 빗발치는 사격을 피할 수 있는 돌담을 발견했다.

운동장에서는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밀려오는 총알을 피하며 병사들을 찾았다.
마이캘리스 연대장과 지휘관들은 지프와 트럭 밑에 숨은 병사들을 구둣발로
차면서, “어서 빨리 언덕 위의 소속 부대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새로운 적의 부대가 공격을 위해 북쪽 협곡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또 다른 장교는 수백 명의 북한군이 1000야드쯤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다는
우울한 정보를 갖고 왔다.

이때 나는 전쟁 중에 처음으로 도무지 탈출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운
경험을 했다. 이가 딱딱 맞부딪치고 양손이 떨렸다. 이럴 때 흔히 인간에게 나타나는 반응을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확신이 점차 커지면서, 마음이 단단해지고
비교적 차분한 느낌이 자리를 잡아갔다. 마이캘리스 대령은 총알이 날아오는데도 아랑곳 않고 차를 몰고 운동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사격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조직을 정비하자. 우리가 누구를 향해 사격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점차 운동장의 불안하던 무질서가 저항의 양상으로 굳어져 갔고, 적에 대한
반격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정보장교가 해변에 상륙한 장병들이 새로운 적군이 아니라 한국의 동맹군들이라고 보고했다. 이때 시계가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45분간 적의 공격으로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교전이 느슨해지자 장병들은 부상병들을 등에 업고 응급치료소로 나르기 시작
했다. 나는 거기서 약 한 시간 동안 혈장을 투여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도왔다.
이곳에서 가장 생생한 추억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절뚝거리며 치료소로 들어왔던 웨스턴 대위다. 응급치료를 받은 그는 다시 언덕으로 향했다가 30분 후 어깨와 가슴에 총상을 입고 돌아왔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치료소 바닥에 앉은 그는 조용히 말했다.

“진통제 주사 좀 놓아주세요. 어깨와 가슴의 상처에 통증이 심해지네요.”
오후 1시 반, 적의 마지막 공격을 격퇴하고 난 후 학교 뒤 언덕에는 적의 시체 600구 이상이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우리가 생명을 구한 것은 전투지휘소 이전을 연기하고, 체크 중령 대대에 학교에 잠자리를 마련해준
덕분이었다. 추가병력 1000명이 없었다면 적군은 게릴라 전술을 구사해 우리를 쉽게 살육할 수도 있었다. 마이캘리스는 이 전투의 승리로 대령으로 진급했고,
체크 중령은 ‘탁월한 무공’을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진동리 전투가 끝났을 때, 나는 마이캘리스에게 사단장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쾌했다. “전해주세요. 우리는 악착같이 방어할 것이라고.” 대구 주변 지역에서의 무수한 전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지켜라”라는 사수명령은 지켜졌다. 적의 엄청난 공격에도 대구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기에 전설적인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24


  제9장 인천에서의 대담한 도박
          · 맥아더 장군, 상륙작전을 감행하다



인천을 에워싸고 있는 방파제를 오르는 미 해병대원들. [출처:War In Korea]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의 미 지상군 파병 결정을 인지한 직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전쟁이 카드놀이와 같아 힘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유엔군의 해군과 공군력의 강점을 이용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이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맥아더가 인천을 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보좌관들이 인천상륙이 불가하다고 느낀다면, 적들도 필경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 미군 정보당국으로부터 적의 방어가 가장 취약한 항구가 인천이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종군기자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홍보의 역사에서 가장 큰 혼란 중의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도쿄 프레스클럽 주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 몇 주 전에 이미 알려졌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는 부산항에서 수송선을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에 도착하는 데는 4일이 걸렸다. 인천상륙작전에는 260척의 배가 참여했다. 내가 탄 수송함에 앞서 6척의 순양함, 6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해 60척의 전함이 먼저 출발했다.

상륙은 세 단계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첫 째, 해병부대가 월미도를 강습하기로 돼 있었다. 둘째, 해병대원들은 인천의 심장부인 적색해안과 인천 남쪽의 방파제가 있는 청색해안을 공격하기로 예정됐었다. 셋째, 해병부대는 적색해안 바로 뒤쪽의 고지를 점령하고, 인천 동쪽 교외로 밀고 들어갈 예정이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한국 해병대는 미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는 적군을 섬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돼 있었다.

나는 적색해안을 공격하는 부대에 속하게 됐다. 내가 탈 소형 상륙주정(보트)에는 박격포 1문, 소총부대원, 사진사 1명, 나를 포함한 종군기자 몇 명을 포함해 38명이 타게 됐다. 나는 수송함에서 화물그물을 타고 내려가 마지막으로 보트에 올랐다.

우리는 해협 안쪽으로 9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공격 통제함을 향해 출발했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20분 후에 우리는 월미도를 선회했다.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는 방파제로 다가갔다. 보트가 강하게 부딪치며 방파제에 닿자 해병대원들이 뱃머리를 벗어나 방파제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진사가 자신은 일을 끝냈다면서, 보트가 수송함으로 회항할 때 곧장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순간 나도 그와 함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다시 적의 사격이 시작돼 돌아가려는 마음을 접고, 보트에서 빨리 내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보트에서 뛰어내려 방파제 경사면의 바위 위에 배를 바짝 붙이고, 뱀처럼 꿈틀대며 경사면 최상단 바로 아래 움푹 파인 곳까지 기어 올라갔다.

해병대원 한 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방파제 위로 올라갔다가 화급하게 다시 뛰어 내려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발 하나가 내 엉덩이를 세게 밟았다. 내 엉덩이는 풍만하긴 했지만, 통증이 왔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아무리 급해도 정신 좀 차려요.” 그는 재빨리 발을 치우며 사과했다. 어조로 보아 그는 자기가 여자의 둔부를 밟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헬멧과 외투로 훌륭하게 위장했기 때문에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가 유일했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해병대원들이 입은 초록색 군복 위로 노란색 황혼이 비치자 할리우드 영화사들도 감히 만들어낼 수 없는 찬란한 빛의 향연이 연출됐다. 사실 지는 해가 불타는 부두의 진홍색 연무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광경은 영화팬이 보았더라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저녁 7시쯤 우리는 해안을 장악했고, 소형 무기들의 사격도 미미해졌다. 나와 종군기자 일행은 기사송고를 위해 맥킨리 호로 갔다. 그런데 함장이 남자 종군기자들의 승선은 허용했으나, 내게는 범죄자 취급을 했다. 함장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핏대를 올리며 물었다. 마침 배에 승선해 있던 도일 제독의 도움으로 승선이 가능했다.

이후 나는 이 배의 갑판에서 부대원들과 잤다. 나는 불평하지 않고 꾹 참고 견뎠다. 그러나 남자 기자들이 나를 갑판 위에 남겨 두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버터와 우유를 넣어 볶은 계란을 맛있게 먹으러 갈 때는 우리 해군에게 축복이 있으라고 빌어주는 허세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상륙작전이 성공한 다음날 아침 나와 동료기자 한 명은 해병대로부터 지프를 제공받았다. 아직 불타고 있는 도시를 통과하면서 모든 것이 우리 수중에 들어온 것을 실감했다. 수많은 시민이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거리로 몰려 나왔다. 이들은 미군 차량이 지날 때 정성을 다해 손을 흔들거나 인사를 했다.

맥아더 장군의 대담한 도박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앞으로 며칠 후면 내가 마음속으로 다짐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약속이란 바로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쉽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길이었다. 미 해병대는 서울로 가는 길을 피 흘리며 힘들여 개척해 나갔다. 내가 해병 제1연대 찰리 중대를 따라 서울 중심의 성당을 점령하던 날은 특히 가혹했다. 의무 차량이 우리 앞으로 질주하다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조심스레 차를 몰아 서울의 어느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모든 종교적 상징들은 건물에서 제거돼 있었다. 스탈린과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대형 포스터들이 벽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한 벽에는 미군들이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나 부녀자들을 살해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포스터들도 붙어 있었다. 성당은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건물 밖에는 종이 걸려 있었다. 갑자기 네 명의 한국인이 타종하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소란했던 전투의 종료를 알리듯 청아하게 울렸다. 불타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사랑스러운 소리였다. 얼마 있다가 종을 울린 사람들이 미군에게 서둘러 달려가서는 말을 건넸다. 통역관은 그들의 말을 해석했다. “당신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종을 울렸습니다.” 우리는 눈물이 핑 돌도록 승리에 도취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일시적인 승리가 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25


  제10장 우리의 동맹 한국인들
          · “한국군 장병 포화속 보여준 용기 찬사”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을 거듭하고 있던 국군장병들이 1950년 11월 말 부대순시차 전선을 찾은 신성모 당시 국방부장관의 연설을 듣고 있다.[국방일보 DB]


우리의 동맹 한국인들의 능력은 군인이거나 정치인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6·25전쟁이란 주제만큼이나 논쟁의 여지가 많았다. 전쟁 초기에 한국 군인들이 극도의 혼란 속에 남쪽으로 후퇴함으로써 북쪽으로 진군하는 미군의 진로를 막았기 때문에 미군은 한국 군인들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품었었다.

또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한국군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해 10만 명의 병력이 2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많은 한국군 장병은 옷을 갈아입고 민간인으로 변신해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미군의 노력으로 10일간의 특수훈련교육 시스템이 마련됐다. 신병들은 9회의 사격훈련을 받았고, 카빈총·박격포·기관총 등의 작동법도 배웠다. 늦여름쯤에는 한국군 규모가 15만 명 이상으로 증원됐다. 초가을에는 많은 한국군 부대들이 미군 사단들에 편입됐다. 이후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 장병들이 포화 속에서 보여준 용기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군의 전쟁 초기 전투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예컨대 옹진반도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텨낸 한국군 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단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한국군은 강한 장교단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고, 대부분 미 점령군이 남기고 간 별 볼일 없는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만일 북한군이 외세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남침을 감행했었더라면, 한국군은 그들을 국경에서 격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제 무기와 소련의 지휘를 받는 북한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한국군의 역량이 부족했다. 더구나 북한 침략군은 중공 팔로군 출신의 조선족 병사들을 뽑아 전력을 강화해 15개 사단 이상이 됐다. 게다가 1000대 이상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한국군이 미국의 장비를 공급받은 이후 사정은 크게 개선됐다. 한국군 장성이 지휘하는 사단에 소속된 미국 탱크병들은 덩치가 작은 한국군 병사들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들은 한국군 장병들이 적의 사격을 받으면서도 지뢰가 매설된 8마일이나 되는 길을 확보했다면서,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싫은 내색하지 않고 즐거운 표정으로 감행한 한국군을 극찬했다.

한국군이 일급 장교들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무기를 갖고 전쟁에 뛰어든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갈팡질팡했던 미국의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미국은 1949년 여름 한국 주둔 점령군의 마지막 부대를 철수시켰다. 미군 철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감행됐다.

당시 미국은 군사적으로 한국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전력을 다해 한국을 후원할 태세가 돼 있지 않았으나, 한국을 완전히 포기할 준비도 돼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늦게 한국군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알량한 군 장비를 제공했던 것이다.

북한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한국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이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한국보호의 책임은 미숙한 미 국방부의 무경험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한국경제가 물가상승 등 혼란했던 것도 일부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구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미 경제협력처(ECA)의 자금을 한국에 퍼부은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이었다. 어쨌든 1950년 전후에 한국의 경제상황은 눈에 띄게 개선돼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50년 4월 중순, 물가는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통되는 화폐량이 급격히 줄었고, 국가 예산도 균형을 유지하게 됐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경제안정 기조 강화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남침 시기를 1950년 6월로 결정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되기 전에 행동에 옮길 필요가 있었다. 한국 정치에 관해서 말하자면, 미국 언론계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한국을 경찰국가라고 언급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나는 북한군 남침 전에 꼭 한 번밖에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한국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4년 동안 베를린·바르샤바·프라하 등 철의 장막 이면을 체험한 경찰국가 전문가다.

그런 나의 시각에서 한국은 경찰국가가 결코 아니다. 물론 서양식 민주주의 실현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 경찰은 일제에 의해 훈련을 받아 야만적이었고,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목격한 1950년 5월의 한국 총선은 1947년 1월 폴란드에서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치러진 비밀투표였다. 또한 6·25전쟁 전에 한국 국민의 자유는 증가 추세는 느렸지만, 분명히 신장되고 있었다. 반면 내가 읽거나 본 것에 따르면, 폴란드에서는 개인적 자유가 급격히 제한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단원제 국회를 갖고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공무원은 존경할 만한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는 독재적인 기질을 지녔지만,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인물로 보였다. 그는 한국 국민들을 위해 민주적인 방식의 필요성을 믿고 있었으나, 당면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비민주적인 편법을 자주 동원했다.

나는 그가 자신을 동양의 윈스턴 처칠과 같은 인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망명생활로 보냈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투쟁해 온 많은 애국지사의 지도자였다. 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6·25전쟁의 승리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던 1950년 9월의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자그맣고 마른 체구인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였으며, 목소리는 떨리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 그가 들려준 말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학습했듯이 당신의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준비가 너무 늦어져 그들의 다음 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26


  제11장 중공군의 개입
          · 1950년 10월 14일 중공군 압록강 건너다



두 명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미군 해병대원들.[출처:War In Korea]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은 북한 육군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 유엔군은 북쪽에서 적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으로부터 맹렬한 기세로 공격함으로써 적을 붕괴시켰다. 북한은 유엔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돌격해 왔다.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트루먼 대통령이 6·25전쟁에 미국 공군을 파병하는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시기는 맥아더 장군을 포함해 미 고위 장성들에게 완전히 의외였다. 그들은 중공군이 공격해 온다면 한여름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왜 모택동은 우리가 화력을 증강할 때까지 기다렸을까?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설명은 북한이 자력으로 우리를 이길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한 중공은 전쟁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은 성공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갑자기 전쟁의 판도가 바뀌어 버렸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최단 기간 내에 끝내려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중공의 개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빨리 진격해 중공이 유엔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확전을 막으려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 합동참모본부가 인천상륙작전을 10월까지 연기하도록 촉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기 전인 1950년 10월 초, 중공의 주은래 총리는 북경 라디오 방송을 통한 성명에서 중공이 언제나 조선인민의 편에 설 것이며, 그들의 조선반도 해방을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주은래의 성명에 함축된 개입 위협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러 나라에서 전진을 멈추라고 은밀히 촉구했음에도 맥아더는 10월 11일 미군을 북한지역으로 진격시켰다. 이러한 결정은 전적으로 유엔 결의안에 따라 공식승인을 얻은 것이었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또한 중공의 개입 여부는 미군이 여기서 멈추느냐 저기서 멈추느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미국의 공식 의견이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증빙자료로 중공의 여러 성명이 인용됐다. 유엔주재 중공대표는 미국이 한반도 어디에 잔류하든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중공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의 개입을 비난했고, 북경 라디오 방송은 아시아를 비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38선을 넘기 전에 맥아더 장군은 방송을 통해 북한에 두 가지를 촉구했다. 하나는 항복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한반도에 관한 유엔 결의안을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제안들을 단호히 거절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기 전에도 한반도에는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중공군이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넘기 시작한 것은 10월 14일 밤이었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당시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됐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면서, 적들이 만주지역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 지원을 받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대공세를 지시해 큰 물의를 빚었다. 그는 자신이 경고했던 바로 그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공세는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도박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대공세는 실패했다. 대공세 전에 우리는 상대할 적의 규모나 성격에 대한 분명한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왜 맥아더가 자신의 경고도 무시했을까? 그는 중공군의 참전이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라는 데 패(牌)를 걸었다. 즉, 그는 중공이 북한을 돕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보다 양국 간의 조약을 형식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파병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군 공군의 근접지원 능력도 과대평가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이 북쪽에서 적의 보급로를 성공적으로 차단하면, 적의 병력 보강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며 필수적인 군수물자가 현저히 제한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맥아더가 전쟁을 실제로 끝내기 위한 대공세보다 중공의 의도를 최종적으로 시험하는 공격을 했었다면 확실히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맥아더 장군은 나중에 사석에서 그러한 낙천적인 판단을 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시인했다.

어쨌든 유엔군의 공격은 중공의 육군 ·공군의 힘의 실체가 드러나게 했다. 그들의 병력은 30개 사단 이상이나 됐다. 중공의 반격으로 우리는 한 달 만에 북한으로부터 철수했다. 이 기간 중 서방세계는 끔찍할 정도의 불화의 모습을 보였다. 중공을 비난하기보다 중공과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 군 내부에서 비난받을 책임자를 찾기 위해 광분하는 것 같았다. 물론 맥아더가 호된 시험대 위에 올려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의 천재라는 찬사를 받던 그가 이제는 미국의 일부 언론으로부터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로 비난받는 처지가 됐다.

맥아더에 대한 빗발치는 비난은 그가 공인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희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설이 쳐 놓은 덫에 걸렸다. 고매하고 빈틈없으며 신화적인 인간을 포획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세계는 그를 보통사람이면 용서를 했겠지만, 신화적인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와 여러 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는 사심 없는 국가관을 지닌 완전한 인물이다. 나는 비록 중공군의 개입으로 우리가 북한에서 후퇴했지만 맥아더로부터 역사상 위대한 지휘관의 하나라는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군사적인 천재라 하더라도 일단 중공이 공격하기로 결정한 이상, 우리가 상당히 멀리 후퇴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 군도 처음부터 중공이 최고의 군대를 파병해 힘으로 개입하면 달아나기 시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엔군의 후퇴는 미국 역사를 반전시킨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싸우면서 후퇴함으로써 미군의 역사에 영웅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탰다. 1950년 겨울, 한반도 북쪽의 얼어붙은 땅 유담리에서 미 해병대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것은 전투병들에게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고무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상징적인 전과(戰果)였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1.30


  제12장 영웅적인 해병이야기 · “뒤로 전진하다”
          “해병은 후퇴란 없다 … 단지 벗어나는 것이다”



미국 해병대원들이 흥남부두로 가는 고단한 철수길에 잠시 쉬고 있다.
[출처: War In Korea]


1950년 12월 4일, 북경라디오 방송은 확신에 찬 어조로 방송했다. “미 해병대 제1사단의 전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중공이 이렇게 자만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공군의 대반격이 시작될 때 미 해병대원들은 한반도 북동부지역 장진호 근처의 얼어붙은 황무지에 중공군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미군과 중공군의 병력 수는 6대1로 중공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2월 5일, 나는 하갈우리의 눈 덮인 들판에 서 있었다. 세찬 눈발이 10여 명의 해병대 장교의 추위에 언 얼굴을 모질게 때리고 있었다. 그들은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 속에 서서 미 해병대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의 훈시를 듣고 있었다. “새벽에 우리는 이곳에서 뒤로 전진한다. 우리는 낙오병이 아니라 해병으로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부상병, 장비와 함께 철수할 것이다. 우리는 절대 패잔병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장교들은 병사를 인솔해 5일간 전투를 벌이며, 공산군에게 포위된 얼어붙은 땅 유담리에서 그곳 하갈우리까지 빠져나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들의 체념한 분위기를 파악한 머레이 중령은 엄하게 다그쳤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이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의 앞쪽보다는 우리가 향할 바다 쪽에 더 많은 중공군이 진로를 막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이의를 다는 자는 불구를 만들어서라도 후송시킬 것이다. 누구든 그렇게 되지 않기 바란다.”

이날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11월 24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해병 제5연대는 눈 쌓인 산길을 넘어 장진호 북쪽의 유담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촌락이라고 해야 곧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 판잣집들이 늘어선 지역으로, 인간과 소들이 오두막들을 아주 공평하게 나누어 쓰고 있는 곳이었다. 해병 제7연대는 당시 유담리의 남동쪽의 하갈우리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해병 제5연대를 뒤따르라는 지시를 받고 유담리로 향했다.

미군은 적이 이곳에 1개 사단 정도의 병력만 주둔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우리의 공격으로 항복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미 해병대가 장진호 전투에서 함정에 빠진 것은 잘못된 용병술 때문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미 해병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육군 제10군단의 일부로 편입됨으로써 불상사가 빚어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11월 26일, 해병 제5연대는 유담리를 점령하고, 다음날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사이 중공군은 해병 선봉부대들의 뒤로 잠입했다. 적들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그리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간의 도로를 차단했다. 해병들은 사방으로 중공군의 바다에 갇히게 됐다.

11월 28일 이른 아침,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적게는 6개 사단, 많게는 8개 사단의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향해 몰려들었다. 보급로가 이미 끊긴 채 유담리에 갇혀 있던 해병 제5연대와 제7연대는 비행기로 군수품을 공급받으며 하갈우리로 철수해야만 했다.

테로스 중위가 이때의 전투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당신이 기사화할 사람은 헐 대위 같은 인물입니다. 그는 끔찍한 전투에서 두 차례나 총상을 입은 채 얼어붙은 적들의 시체를 밟고 싸우면서 중대원들을 이끌고 협곡을 빠져 나왔습니다. 나는 그를 통해 전우애가 형제애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나는 그의 성만 알고, 이름은 모르지만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12월 3일과 4일, 미 해병대는 유담리 계곡에서 벗어나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내가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은 해병들의 마지막 대열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때였다. 12월 5일, 하갈우리에서 부상병과 동상에 걸린 환자 4500명이 비행기로 후송됐다. 그러나 걸을 수 있는 해병들은 피로에 지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까리 8마일의 거리를 전투를 벌이며 행군해야했다.

한편 철수과정에서 나는 북한 사람들이 피란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미 해병의 뒤를 따랐으며, 눈 쌓인 들판에서 웅크리고 앉아 모진 추위를 견뎌냈다. 우리는 북한에 진격해 그들이 사는 마을을 파괴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수많은 북한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우리를 따랐다.

12월 7일, 여전히 강추위가 계속됐으나 질풍은 잦아들었다. 우리는 고토리에서 안전이 확보되는 곳인 진흥리까지 10마일의 거리를 다시 행군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날, 우리가 지나가야 할 산길 위의 교량이 폭파돼 조립교가 건설되기까지 행군이 중단됐다. 이곳에서 사망자들을 항공기로 철수시키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언 땅에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3개의 대형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수백 구씩 묻었다.

군목이 얼마 안 되는 청중들 앞에서 ‘주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을 낭송했다. 청중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낭송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12월 9일, 드디어 교량이 가설되고, 행군이 다시 시작됐다. 대부분의 해병들은 지치고 감각이 거의 마비돼 심지어는 간헐적인 기관총과 소총사격은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사살돼도 그들은 지겨운 듯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서 가까이 있는 트럭에 던져 넣었다.

라이프 잡지의 사진사 던컨은 퇴각하던 날, 크리스마스 특집을 염두에 두고 아침식사를 위해 얼어붙은 통조림을 칼로 자르고 있는 해병에게 물었다. “내가 전능한 신이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다면, 무엇을 갖기를 희망합니까?” “제게 내일을 주시오” 해병의 답변은 간명했다.

약 2만5000명의 해병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일’을 받게 됐다. 일요일인 12월 10일 새벽 2시, 해병들은 질서정연하게 함흥에 도착했다. 12월 5일, 머레이 중령이 하갈우리에서 그 추운 날 아침에 비장한 각오로 훈시했던 대로 장비, 부상자들, 오는 길에 죽은 동료들과 함께 왔다.

그들이 흥남부두에서 수송함에 승선했을 때, 그렇게 처절한 전투를 벌였던 곳들(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은 이미 중공군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미 해병대의 명성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전투병으로서의 해병대의 ‘확고한’ 명성은 충분히 지켜졌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2.01


  제13장 적 · 敵은 힘으로 도전 … 자유세계는 전쟁 선택


미군의 안내로 포로수용소로 가는 북한군 포로들.[출처: War In Korea]


소련의 지시를 받는 동양인들은 1950년 6월부터 12월까지의 기간에 우리에게 일련의 뼈아픈 패배들을 안겨줌으로써 그들의 실체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그들은 우리를 수적으로 압도했다. 또한 중국인이든 북한인이든 간에 매우 효율적으로 탱크를 운전하고, 박격포를 쏘며, 기관총을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더구나 동양의 적은 미 육군이 필요로 하는 물품의 5분의 1 정도만
갖고도 전투를 할 수 있다.

적은 미군에 비해 행정병의 비율이 낮다. 행정사무보다는 피나는 전투와 사격에 필요한 장병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적의 의무부대는 원시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궁핍과 불결함에 강인한 인내력을 보였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의 중공군과 북한인들이 간단한 영어를 구사했다. 이들은 사망한 우리 장병들의 군복을 빼앗아 입고, 마치 우리 동료인 것처럼 행세했다. 또 다른 적들은 우리에게 영어로 “medic(위생병)”이라고 소리쳐 우리로 하여금 진지를 노출시키도록
하는 술수도 구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군의 장비를 포획하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본국으로부터의 보급품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에게서 노획한 물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 적들은 진군하면서 식량과 서비스 등 필요한 물자의 대부분을 현지에서 징발해 썼다. 현지 주민에게 탄약운반을 시키고 요리도 시켰다.

중공과 북한의 독재체제가 만들어낸 가장 큰 성과는 아마 장교들의 질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철저한 정치적 주입교육이 성과를 거뒀음에 틀림없다. 5년이라는
정치적인 세뇌교육은 북한군 장교들을 지적 판단 장애자로 만드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는 부산 미군기지에서 북한군 포로와 대화를 나누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부상을 입은 장교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생포됐을 때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로는 투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조국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확신했었고, 남조선 인민들이 핍박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내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고 그랬는지 몰라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남조선 동무들과 대화를 해 보니, 우리가 받은 교육은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믿게 됐습니다. 나는 아직도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지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런 세뇌는 아직 북한군 병사들에게까지 완전히 공유되고 있지는 않다.
많은 북한군 병사는 투항했다.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투항한 중공군들은 우리식 계급으로 하자면, 상병 이상의 계급을 가진 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특이했다. 중공군들은 최고의 훈련을 받았음은 물론,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이 보유한 많은 군 장비는 미국제품이었다.

우리는 산악지대에서 병력 수에서 크게 밀리면, 공군력과 야포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공군의 충분한 지원을 받고 미국 최고의 장비로 무장한 미 해병들도 나팔 불고 울부짖으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드는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중공군 ‘8개 전투수행 규칙’의 하나는 포로를 잘 대우해 주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다. 때때로 중공군은 아군 포로들을 상징적으로 석방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로에 대한 대우가
그들이 천성적으로 온화한 마음씨를 가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의 전술이다. 야수적인 행동이 목적에 더 도움이 됐을 때, 중공군은 주저 없이 그렇게 행동했다.

북한군들은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완전한 공산주의 통치를 실시했다.
그들의 경찰국가적 통치기술은 내가 폴란드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잔인했다.
북한군은 한국에서 크게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들은 한국인들이
개인적 자유를 경험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독재로 회귀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큰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식량을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했다.
또한 과거 미국과 협력했던 모든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를 감행했다.
‘친미주의자’로 분류된 수천 명의 인사를 투옥했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서울의 신문들은 친미적이라는 이유로 그 시설이 압수돼 공산화 목표를 위해 이용됐다.

북한의 한국 내 주요 도시 인수 방식도 어디나 같았다. 행정조직은 평양에서
미리 구성해 점령 즉시 시장 및 주요 간부를 포함한 모든 요직을 북한으로부터
신임받는 밀사들로 채웠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결정적으로 인기 없게 만든
행위는 젊은이들을 북한군에 강제 징집하는 조치를 도입한 것이다.
그들은 한밤중에 총을 겨누고 일반 가옥이나 농가에 들어가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공산군 훈련소로 연행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수많은 북한 주민이 집에 앉아서 공산주의자들의 수탈과
강제징집을 당하느니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부서진 다리 위를 기어서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피란했다. 해군제독 도일은 흥남철수 당시, 해안교두보 흥남에서 도쿄로 무전을 쳤다. “본직이 관찰한 바로는 태울 배만 있다면, 북한에서
모든 주민을 빼내올 수 있음. 그들 거의 모두가 한국행을 바랐음.”

내가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50년 5월 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수의 한국 기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을 얼마쯤은 믿었다. 그들은 비록
공산주의자들의 주도하에 통일이 되더라도 2개의 적대적인 나라로 분열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이 두 번째로 공산치하에 놓일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나는 이들을 다시 만나보려고 했다. 그러나 벌써 남쪽으로 피란 대열에 끼어 서울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못 만났다. 이들에게 공산치하에서의 체험은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으로 충분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최근 몇 달간의 한반도 사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인지를
평가해 볼 좋은 때다. 여태껏 자유세계는 공산세계보다 우수한 무기와 기술을
보유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세계는
이런 무기들을 대부분 가졌고, 게다가 병력까지 갖췄다.

적들은 힘으로 도전함으로써, 자유세계로 하여금 전쟁이라는 불유쾌한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2.02


  제14장 (끝) 6 · 25전쟁이 준 교훈
             · 자유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전진하는 미 육군 24보병사단 장병들. [출처: War In Korea]


만일 우리가 전투도 해보지 않고 아시아 본토를 공산주의자들에게 양보한다면, 이는 적의 힘을 엄청나게 강화시켜 줄 것이다. 이들에게 더욱 강력하고 질적으로 우수한 군대를 양성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또 그들에게 동남아시아를 ‘해방시키는’ 풍부한 전리품들을 챙길 기회를 줄 것이다.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발을 뺀다면 소비에트 공산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다.

“당신네들의 동쪽 측면 보루는 이제 비교적 안정됐다. 자, 이제 서둘러 유럽에 집중하도록 해라.” 소비에트 공산세계에 이런 호의를 베풀면 유럽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도 미국이 순진하게 소비에트 독재체제들이 내부적으로 붕괴될 것이라고 수수방관한 채 기다린다면 전 세계가 소비에트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런 모든 사태가 20년에서 50년이면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7개의 새로운 경찰국가를 관찰했다. 그런데 이들 독재국가들은 내부에서 붕괴될 가망이 없어 보인다. 현대 독재제제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독점하고, 인간의 마음을 거의 완전히 통제한다. 히틀러 제국의 붕괴는 오직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저항운동은 외부로부터 자유의 희망이 보일 때까지는 싹트지 않는 법이다.

옛날에 독재자들은 종속국가들과의 거리가 멀어 이동하는 데 며칠씩 걸렸으므로, 신민들에게 어느 정도 개인적인 창의력을 허용해 줘야만 했었다. 이렇게 조그만 자유가 있었기에 반란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다르다. 모스크바 당국은 장거리 전화로 동독을 통제하고 있다. 공산지배로부터의 아무리 미미한 이탈이라도 즉각 보고되고, 같은 속도로 신속하게 처벌이 가해진다.

이제 우리는 철저하게 대비해야만 한다. 우리는 정치적인 노력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다른 나라들을 도와야 한다. 그들에게 반공주의적 삶의 방식이 투쟁해서 얻을 만큼 가치 있는 것임을 느끼도록 해 줘야 한다.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식민주의와 독재에 대항해 공동으로 투쟁해야 하며, 모든 동반자에게 고귀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 편이 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인들은 모택동 공산주의자들이 장개석의 국민당보다 훨씬 더 악랄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국민들이 굶어 죽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기아는 절망을 낳고, 절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경찰국가를 낳는다.

미국은 세계인들에게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소련과 그 위성국들의 새로운 독재체제와 함께하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행위들로 증명해 줘야 한다.

한편 6·25전쟁은 우리에게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우리는 기계로 사람을 더 이상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방에서 전투 중인 우리 장교들은 본국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1870년 독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유에 대한 독일군 장성의 다음 설명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항상 물질적인 문제에 몰두해 왔었다. 그들은 적의 공격력을 가공할 만한 새로운 무기로 방어하면 분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이런 사고방식이 군의 정신상태를 파멸시켰다.”

우리는 국제적인 인내심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가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안주하고 온순하며 자기 수양이 부족하게 됐으므로 패배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에서 체류했던 북한군 대령은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타락을 한마디 말로 표현했다. “당신네 장병들은 따뜻한 물에 샤워하기를 갈망하고 있으니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모택동은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라는 저술에서 비공산군의 지구력을 경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위대한 군의 육성이 지형·도로·보급물자·막사 시설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는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매우 신중하게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제약들은 공산군에 있어서는 비공산군과는 다르게 적용돼야 한다. 공산군은 비공산군보다 더 큰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꼭 기억해 둬야 할 논평을 덧붙였다. “10년이 걸린 소련 혁명전쟁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찌 그리 오래 걸렸느냐고 놀라워할지 모르나, 우리에게 그 정도의 기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미국인들은 안락함을 사랑한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장병이 응석받이로 키워졌다. 마이캘리스 대령의 설명을 들어보자. “내가 부산에서 연대의 지휘를 맡았을 때 착잡했습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장교들이 신임이었습니다. 병사들도 미숙했습니다. 더구나 우리 장병들은 참전하면서 별의별 것을 다 갖고 왔습니다. 바이올린, 반조 같은 악기도 있었으니까요. 북진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연대에서 나온 잡동사니가 트럭 8대 분량이나 됐으니 그 규모를 짐작하실 겁니다. 평시 훈련에서 우리는 쓸모 없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정보와 교육은 강조했으나, 소총사격술·정찰·방어 진지 구축 등은 소홀히 했습니다. 오히려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안전하게 운전하는 방법, 전시채권 구입방법, 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편지 쓰고 부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 10년 이상이 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모택동에게는 10년이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긴장상태를 조성하는 것은 자유를 위협하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라는 관행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 우리는 군사독재체제가 되지 않고서도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

6·25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비공산세계 안에 손쉬운 표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 어디라도 군사력에 호소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침략을 중지시킬 수 있도록 압도적인 군비와 정신적인 힘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 훨씬 저렴할 것이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역자 | 2009.12.03


      ⑴ 6·25전쟁 휴전과 중공군 장교와의 인터뷰

  히긴스 “미국이 종이호랑이?'”
           · 중공군 “우리가 자제력 발휘…” 운운



1950년 5월 말 개성 시가 / 중공군 포로.


국방일보는 지난해 11월 9일부터 12월 3일까지 15회에 걸쳐 6·25전쟁 르포
‘자유를 위한 희생’을 연재했다. 전설적인 종군 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1920~1966) 여사의 6·25전쟁 비망록 ‘War in Korea’의 핵심부분을 발췌 번역한 것이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지국장이었던 마거리트 히긴스 여사는 6·25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부터 6개월간 전장을 누비며 직접 보고 들은 전쟁의 실상을 기사화해 미국인들에게 생생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1951년 초에는 ‘War In Korea’라는 책을 발간하고, 이 책을 들고 미국을 돌며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녀는 그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히긴스의 기록이 3년에 걸친 전쟁의 초기 6개월뿐이었던 점이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필자는 최근 6·25전쟁에 관한 히긴스 여사의 또 다른 기록을 발견했다. ‘뉴스는 별난 것(News is a Singular Thing, 1955)’이라는 제목의 책자가 바로 그것이다. 언론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히긴스는 25쪽에 걸쳐 6·25전쟁에 관한 자신의 감회를 적고 있다. 특히 그녀는 6·25전쟁에 참전했거나, 정책을 입안했던 미국·중국·영국의 여러 인물과의 인터뷰를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국방일보는 오늘부터 히긴스의 이 귀중한 기록을 국내 최초로
발굴해 6회에 걸쳐 연재한다.




1950년 5월 30일 한국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됐다.
내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지국장으로 부임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됐을 때
였다. 나는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 낯선 나라의 취재 길에 올랐고, 도쿄 특파원으로서 첫 기사를 개성에서 송고했다. 개성은 당시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며,
간헐적으로 북한군의 박격포탄 공격을 받던 곳이었다.

내가 최초의 기사를 송고한 날로부터 꼭 25일 만에 북한 공산군은 야만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아시아에서의
소련의 팽창정책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런던특파원, 베를린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나는 폴란드 등 동구권 국민들이 자유를 열망하다가 무참하게 죽어가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질식해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한민국 구하기로 결정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미국이 대한민국을 구하기로 결정하자,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의 한국전 개입은 국제적으로 설득력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전 아시아지역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직감적으로 우리가
다른 국가들과 국민들에 대한 신뢰를 지키게 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다.
적어도 이번에는 우리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3년간의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됨으로써 이러한 신뢰는 부분적으로만 지켜졌다. 나는 휴전이 향후 가져오게 될 결과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우리가 나머지 부분의 신뢰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내 머릿속에는 그러한 의구심을 정당화해 주는 너무도 많은 기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중공군 소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1953년 여름, 정전이 서명되고, 양측 간에 대규모 포로 교환이
이뤄지기 직전에 이뤄졌으며, 영어로 진행됐다.

인터뷰 중 그 중공군 장교가 조롱하는 어조로 반복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종이호랑이(paper tiger)’라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나는 ‘종이호랑이’라는 용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캐물었다.

중공군 소령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미국인들을 바다로 밀어 넣지 않은 것은
우리 정부가 자제력을 발휘하고,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오.”

내가 중공군이 미군을 바다로 밀어 넣지 못한 이유는 그만한 군사력을 동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우리 중공군이 북한에서 미군을 그렇게 손쉽게 몰아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소? 만일 미군이 ‘종이호랑이’가 아니었다면, 왜 미군은 우리 중공군을 저지할 수 없었단 말입니까? 왜 당신들은 지금 한반도와 만주에 가로놓인 압록강에 서 있지 못하느냐는 말이오?”

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우리는 한반도에 대한 병력투입에 엄격한 제한을 둬서, 지상군의 경우 6개 사단 이하의 병력으로 전쟁을 치렀어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만 6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얼마나 적은 병력인지 알거예요.
둘째, 한반도에서 우리는 핵무기를 포함한 최신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중공군 소령은 코웃음을 치더니 내게 물었다.
“미국이 우리 중공군을 패퇴시킬 수 있는 역량이 충분히 있는데, 이번 전쟁에서 일부러 승리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말이오?” 중공군 장교의 이 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 미국 국민들에게는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즉, 한국전쟁이 국제사회에 위급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동양인들에게는 답변이 거의 불가능하다. 휴전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정체상태가 야기됨으로써 충격을 받은 대부분의 동양인들에게 무슨 뾰족한 답변을 주겠는가?

한반도에 병력투입 엄격 제한

1950년 10월 6일, 유엔 총회는 표결에 의해 유엔군이 38선을 넘도록 승인해 줬다. 이는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유엔군에게 동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 임무는 수행되지 못했다. 6·25전쟁 초기에 8개월 동안 한국에 체류한 이래, 나는 일곱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게다가 홍콩·인도차이나·태국·미얀마·인도·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했다. 이러한 여러 차례 여행을 할 때마다 그 나라 국민들은 내게 한반도에서의 중공의 개입을 거론하며 거의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왜 미국은 중국인들을 저지하지 못했습니까?”

동양인들의 기억 속에는 엄청난 산업 잠재력을 지닌 미국이 아시아인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사실이 입력돼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한반도에서의 휴전이 아시아의 자부심을 지켜준 사건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겨우 1년 전에 인민들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한 중공이라는 신생국에 의해서 말이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07


      ⑵ 맥아더와 트루먼

  “명석하고 매력적” VS “언론관계에 둔감”


종군기자들과 인터뷰 중인 맥아더 장군. / 6·25전쟁 기간 중 연설하는 트루먼 대통령.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관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특파원 생활을 했던 나는 1950년 5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 극동지국장으로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대다수의 도쿄 특파원들이 맥아더 장군과 그 참모들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갖고 있었고, 반대로 맥아더 사령부도 특파원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맥아더와 언론 간의 적대감이 생기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는 맥아더 장군이 실제로 특파원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파원들은 오만방자한 맥아더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특파원들의 맥아더에 대한 적개심은 알게 모르게 본국의 편집자들에게 전달됐다.

내가 미국에서 만나본 언론사 편집자들은 맥아더를 알지도, 그와 얘기를 나눠보지도 않았음에도 맥아더를 ‘극도의 이기주의자’ ‘독재자’ ‘비인간적이고 고리타분한 군인’ 등으로 묘사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나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 나는 부임 직후, 즉 6·25전쟁이 발발하기 1개월 전 맥아더와 최초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본사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오늘 나는 맥아더 원수와 2시간에 걸친 대화를 했다. 너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나 본 인물들 중에서 그는 군사 분야는 물론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명석하고 가장 박식한 견해의 소유자였다. 그는 솔직했고 매력적이었으며, 잘난 체하고 거드름 피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철저한 성격 소유자

6·25전쟁 발발 수일 후 맥아더는 나를 수원에서 일본으로 가는 그의 전용기에 태워 준 적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맥아더와의 관계가 불편했던 특파원들에게는 입방아 찧을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나는 맥아더에게 간단한 메모를 보냈다. 나와 사진기자 데이비드 던컨을 전용기에 탑승시켜 준 것이 다른 특파원들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맥아더는 즉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신을 시기하는 남성 특파원들이 당신에게 뭐라고 하든지 신경쓰지 말아요. 나는 그들을 당신보다 많이 알아요. 그들은 4년 반이나 나를 괴롭혔다오.”

내가 맥아더 장군과의 관계에서 좋은 출발을 한 것은 첫째는 미 전쟁부의 차관이 나에 대한 훌륭한 소개서를 맥아더에게 보내준 덕분이고, 둘째는 내가 그와의 인터뷰 후 송고한 일련의 기사들이 그의 입장과 견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터뷰 중에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말하려는 것을 알아들었나요?” 등과 같이 누차 확인하는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맥아더 장군의 이른바 뻣뻣하고 잘난 체한다는 세간의 평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사건의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1950년 9월 29일 서울에서 개최된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행사는 거대한 중앙청 건물에서 개최됐다.

나는 평생 한 장소에 그렇게 많은 장성이 운집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행사장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들의 잔치였다.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미국·한국·영국·프랑스의 장성들이 도쿄·오키나와·호놀룰루, 심지어 워싱턴에서 날아왔다. 이날 실제로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제1사단 장병들과 특파원들은 본부석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하룻밤 전에 끝난 치열했던 전투에 지쳐 있었고, 입고 있던 옷들이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기념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 기념 열쇠를 맥아더 장군에게 증정하고, 주기도문을 읽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은 빛나는 별들이 반짝이는 제복을 입은 그 많은 고위 장교와 단상을 내려와서 가운데 통로를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몰골이 너무 형편 없음을 알고 행사 중 내내 나는 될 수 있으면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가까이 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불현듯 그를 축하해 줘야 한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그에게 외쳤다.

“헤이, 원수님, 승리를 축하해요.” 맥아더 장군은 군중들 사이를 쳐다보더니 나를 발견하고 대꾸했다.

“이봐요. 키 크고 금발의 못생긴 여자,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 그러자 각국의 장군들, 특히 맥아더 주변의 미군 장성들의 얼굴에는 내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놀라움과 즐거움이 교차했다. 그 순간 나는 영사기를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달 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연례 포럼의 초청을 받았다. 6·25전쟁과 동북아 정세에 관해 연설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연설을 준비하면서 맥아더 장군의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당시의 영웅과의 인터뷰가 너무도 유용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우리 군대는 38선을 넘어 북진하고 있었으며, 맥아더도 미 합참도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들은 공군력을 사용해 만주에 대한 전면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의 전투력을 잃게 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트루먼의 정치적 결정으로 최후의 순간에 거부됐다.  

아무튼 나는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려고 여섯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의 부관은 매번 거절했다. 내가 맥아더의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화가 치민 나는 부관에게 전화로 쏘아붙였다.   “맥아더 장군에게 내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세요. 히긴스 기자가 장군이 한 달 전에 서울에서 한 군사명령을 따르려 한다고 말입니다. 그 명령이란 ‘언제 한 번 와서 봅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메시지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된 것은 그날 오후 3시 반이었는데, 5분도 안 돼 부관이 허겁지겁 내게 연락해 왔다.

“장군님이 아무 때라도 기꺼이 기자님을 만나시겠답니다.” 나는 인터뷰를 했고 연례포럼에도 성공적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트루먼, 맥아더 해고 속내 밝혀

한편 나는 기자로서 수많은 관리를 만나봤지만 언론과의 관계에서 트루먼 대통령같이 둔감한 인물을 접해 본 적이 없다고 확실히 말하고 싶다. 1951년 7월, 나는 백악관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내가 트루먼과의 인터뷰를 갖기 3개월 전에 벌써 해고됐다. 나를 만난 트루먼은 자신이 해고시킨 맥아더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주저하지 않고 드러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트루먼의 발언은 6·25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의 군사전략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는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왔다.

“자, 보세요.” 트루먼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맥아더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얘기해야겠어요. 그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인간이에요. 그게 전부입니다. 항상 거들먹거려요. 늘 폼만 잡는 인간이랍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거들먹거리지 않고, 본업에만 조금 더 충실했어도 나는 그를 해고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08


      ⑶ 워싱턴 ‘중공군 공격 포기’ 결정

  일선 지휘관 “어떻게 싸우란 말인가” 불만 고조


(上)북한 나진 항구 폭격. / (中)6브래들리(왼쪽 둘째) 미 합참의장 방한. (1951년). / (下)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영하 25도의 혹한 속에 최초의 철수를 시작하는 미 해병대.


미국은 6·25전쟁 기간 중에 기본 방침들을 변경함으로써 동양인은 물론,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미국인·영국인·프랑스인들도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체험한 주목할 만한 사례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러한 사례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전의 일이다. 이미 고인이 된 포레스트 셔먼(Forrest Sherman, 1896~1951) 미 해군참모총장이 종군기자들과의 비공식 간담회에서 중공군이 무력공격을 감행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물론 합참은 그 점을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극동군사령부의 공군을 신뢰합니다. 만약 중공군이 개입하면 우리는 만주의 중공군 보급기지를 반격하고, 중공군의 보급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상황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유지할 것입니다.”

이후 의회 청문회에서 드러났듯이 미 극동군사령부는 합참의 승인하에 중공군 개입을 가정한 전시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중공군이 무력공격을 해 오면 우리 공군은 그들의 병참보급을 차단하고 보급품 기지들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공군이 개입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마음을 바꿔버렸다.

내가 트루먼 대통령이 마음을 바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추운 겨울밤, 함흥~흥남 북쪽 개마고원의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 마련된 미 해병대사령부에서다. 그때 미 제8군과 미 해병대는 중공군 개입으로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미 해병대 조종사들은 얼어붙은 장진호 인근에서 중공군의 함정에 빠진 미 제1사단 소속 해병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3만 명이 조금 안 되는 해병대원과 유엔군 잔여 병력이 10만 명 이상의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었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해병들을 살릴 가망이 없다고 단념할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렇게 위급한 때, 미 해병대 장성이 작전실로 걸어 들어오더니 해병대 조종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역주: 여기서 장성은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Oliver Smith. 1893~1977) 소장으로 보임. ‘교수’라는 별명을 가진 독서광이자 미 해병대의 전설적인 인물인 그는 대장으로 예편했음>

“매우 중요한 정보다. 우리(미 극동군사령부를 지칭)가 만주의 중공군 보급기지들을 공격하는 것이 금지됐다. 이뿐만 아니라 워싱턴은 방금 스트레이트마이어(George Stratemeyer, 1890~1969,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공군사령관)의 압록강 다리 폭파계획도 허가하지 않았다. 우리 공군이 출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싸우자는 것입니까?” 방구석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장군이 말했다. “브래들리(Omar Bradley, 1893~1981, 당시 미 합참의장)가 생각하는 바를 알 수가 없다.”

비록 나중에 의회청문회에서 백악관과 국무성의 주도로 그러한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미 합참의장에 대한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어느 육군 지휘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반덴버그(Hoyt Vandenberg, 1899~1954, 당시 미 공군참모총장)가 왜 기본 방침들을 변경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들이 사태를 충분히 더 파악했어야 합니다. 맙소사, 같은 일이 유럽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세요. 라인강 건너편의 독일군 보급기지들과 증원 병력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공중폭격 계획을 세웠다가 발지전투(역주: 1944년 12월 시작된 독일군 최후의 대공세. 연합군이 독일군 보급기지를 공격해 승리)가 한창 진행 중에 공격을 금지시키고, 더구나 독일군 보급품과 병력이 건널 다리들을 그대로 두라고 공군에게 명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중공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당국은 나진과 같은 북한 내륙의 지리적 거점들에 대한 공격을 금지했다. 나진이라는 도시는 러시아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탱크와 다른 중장비들을 해상으로 수송할 수 있는 항구도시다.

나진에 대한 폭격이 허용된 것은 거의 1년이 지나서였다. 나진에 대한 폭격이 이뤄지자 이제 영국 의회가 야단이 났다. 미국 지도부가 극동에서 무모하고 도발적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성조지(Stars and Stripes)’는 영국 의회의 항의 뉴스를 보도했지만, 한국에 파병된 미국 장병들의 영국 의회에 대한 볼멘 논평들은 싣지 않았다. 사실 영국 의회의 비난을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은 한국 내 미군들뿐만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팽배해 있었다.

북한 나진지역 폭격에 대한 영국의 항의가 미국에 전달될 당시, 나는 한국에서 영국군 고위 장교와 이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내게 들려준 매우 인상 깊었던 얘기를 여기서 소개한다.

“나는 물론 군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우리 정치인들과 항상 견해를 같이 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미 국무부는 동맹국들의 압력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의 경우를 보세요. 태평양에 긴 경계선을 가진 미국으로서는 극동지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요. 이점에서 영국과는 다릅니다. 강대국은 동맹국들이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영국군 고위 장교는 말을 이어 갔다.

“보세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어땠어요. 우리 영국은 미국이 나몰라라 하고 있었지만, 전쟁에 뛰어든 것 아닙니까? 만약 그때 영국이 ‘미국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한 이 문제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라고 했다면 사태가 어찌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영국 정치인들이 미국인들을 무모하다거나 도전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흥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비난들은 지혜와 통찰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런 비난들은 대중들의 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영국인들은 폭탄이 떨어질 때까지 크리켓 게임을 즐기는 전통이 있답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국민성은 문제가 많습니다. 나치가 독일을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는 히틀러의 행동에 대해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심지어 우리는 1935년에 영독 해군협정을 맺음으로써 나치가 잠수함들을 다시 건조하도록 했고, 우리는 거의 몰락의 단계까지 몰렸었습니다. 또한 미국인들은 뮌헨협정(역주: 1938년 9월 유럽 열강들이 독일의 체코 영토 일부 편입을 승인)을 체결한 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예언했던 사람이 바로 영국 수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지성인들은 영국이 독특한 역사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의무가 있습니다. 영국은 상대를 제압할 탱크도, 총기도, 항공기도 없는 상황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았기에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영국은 실수를 하고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누렸던 것과 같은 실수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일단 위기에 처하면 의지할 수 있는 또 다른 강대국이 없거든요.”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09


      ⑷ 밴 플리트 장군과의 인터뷰

  “中 완패시키지 않으면 민주진영 악몽에 시달릴 것”


(上)오른쪽 둘째가 밴 플리트 장군, 맨 오른쪽은 리지웨이 극동군총사령관. / (下)6·25전쟁 당시 항공모함에서 출격 준비 중인 F-84 제트전투기.


미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야전지휘관 중의 한 명이며, 인간미 넘치고 정력적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1892~1992) 장군과의 대화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인터뷰는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에서 미 제8군사령관으로 근무 중일 때 이뤄졌다. (역주: 밴 플리트는 미국 장성 중에서 유일하게 100수를 누린 인물임. 그의 전기 ‘승리의 신념’이 국내에 번역본으로 발간됨. 공군 중위이던 아들이 6·25전쟁에서 전사)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밴 플리트는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발언을 거론했다. 즉, 브래들리가 6·25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벌어진, 잘못된 전쟁”으로 규정했는데, 이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브래들리의 발언에 대해서 극동군사령부의 여러 고위 장교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서도 밴 플리트 장군과 같이 강하게 반론을 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이 인터뷰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는 공격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자, 물어봅시다.”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민주주의 국가가 적합한 전쟁의 장소를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민주국가란 항상 잘못된 곳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민주국가들은 결코 그들이 선택하는 곳에서 전투를 벌일 수는 없습니다. 민주국가들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전쟁을 절대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란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을 받은 곳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밴 플리트는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우리의 선택은 적을 반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은 휴전회담이 진행 중인 동안에 대규모 공세를 시작할 수도, 실제 하기도 했지만, 당시 우리 군은 일정한 지리적인 거점들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됐습니다. 이는 지휘를 어렵게 만들고 장병들의 사기를 위축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지상전에서 가장 힘들고 잔혹한 과제는 적을 그들이 준비해 놓은 위치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산허리에 깊게 참호를 파 놓은 중공군을 몰아내듯이 말입니다. 우리 장병들은 피나는 전투를 벌여 중공군을 산마루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거점 이동금지 때문에 적을 계속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지상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술은 기총소사와 포격을 가해 적을 파멸에 이르게 할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어 적을 도주하게 만들고, 추격해서 소탕하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동안에는 적이 새로운 공세를 취하기 위한 참호를 팔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6·25전쟁에서 우리 군대는 이러한 중대한 국면에서 중공군을 추적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금지됐습니다. 우리의 젊은 장교들은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에 두 손을 뒤로 묶고 싸우는 형국이라고 말입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덧붙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시간은 공산주의자들의 편입니다. 지금의 정체상태는 중공군에게 현대전을 교육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수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관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기술들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우리 무기들을 복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155㎜ 곡사포를 포획해 복제를 했습니다. 군사적인 결정을 성취하는 비용은 매일 증가합니다. 우리는 오늘, 내일보다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모레는 다시 비용이 두 배로 뛰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점을 확신합니다. 만일 워싱턴 당국이 내가 요청한 얼마 안 되는 추가 병력을 보내주면, 우리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결국 미국 정부는 밴 플리트의 병력증원 요청을 수용하지 않고, 휴전 때까지 어정쩡한 전투를 치름으로써 그 대가를 치러야했다. 1951년 여름 밴 플리트가 한반도에서 중공군을 패배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추산했던 증원병력 수의 2배 이상의 유엔군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중공군은 몇 번이나 도주했고, 밴 플리트 장군은 우리의 이점을 적절하게 이용해 전쟁을 비교적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의 의견의 핵심은 적의 군대는 패퇴돼야만 하고, 그들 스스로 패배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휴전협정 과정에서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측이 바랐던 것은 일종의 합리적인 휴전을 빨리 이끌어 낼 수 있는 군사적인 결정뿐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적에 대한 공격을 촉구하면서 말했다.

“전쟁은 만주지역의 중공군 기지에 대한 폭격을 하지 않고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군력의 전략적인 이점을 이용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는 공중지원을 받고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보다 공격기간 중에 당연히 더 많은 사상자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나는 밴 플리트 장군에게 도쿄의 고위 외교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대해 물었다. 즉, “우리가 단지 제한적인 공격, 아니 단 몇 미터만이라도 진군한다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시끄러운 불평의 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언급에 대한 밴 플리트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밴 플리트는 자세하게 그의 견해를 피력했다.

“맞습니다. 나도 우리 동맹국들이 이 문제(유엔군의 적극적인 공격)에 대해 끈질기게 반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동기들에 대해서도 얼마만큼은 알 수 있고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들이 너무 근시안적이 아닌가 합니다. 영국인들이나 프랑스인들은 우리가 자기들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탱크·총기·비행기들 중의 일부가 한국에 지원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물론 다른 유럽인들은 유엔군이 이곳에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자기들이 여러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지리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2개의 주요 전선을 갖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적인 교훈을 배워서 한 번에 한 전선에 집중합니다. 만일 이제 중국인들이 한반도 침공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가고, 공업증진과 군사적인 팽창계획을 수행할 시간을 번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산제국은 엄청나게 강화될 것이며, 아시아 전선이 공고해짐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은 갑절의 힘으로 유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한반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군사적인 결정을 밀고 나가지 않는다면 민주국가들, 특히 미국은 수세기 동안 악몽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이번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 모면하고, 전투가 교착상태로 끝나게 되면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대만·태국·미얀마 등 인도차이나로 향할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동남아 지역이 공산화되면 일본이 공산주의자들과의 밀월관계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은 자국의 최대 고객이자, 원료 공급국들이 공산주의의 통제하에 빠지게 되면 자포자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언젠가 우리 국민들이 6·25전쟁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때 공산주의를 저지했어야만 했는데.’”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10


      ⑸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서 많은 것 양보하는 결과 초래

  트루먼 “국민 정서 맞지 않아 병력증원 고려 안 해”


(上)리지웨이(가운데)가 1950년 12월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워싱턴 DC 비행장에서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전송을 받고 있다. / (中)휴전이 서명된 1953년 7월 27일, 미국에서 발행된 편지봉투. 봉투 소장자가 추후에 전직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리지웨이 장군의 서명을 봉투에 받았다. / (下)버나드 바루크.


나는 워싱턴을 방문하는 동안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그에게 한국을 위한 병력증원이 예정돼 있는지 묻고 싶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을 처음으로 제안했던 러시아 외교관 야콥 말리크 (Jacob Malik, 1906~1980, 1948~1952, 1968~1972 기간 유엔주재 소련대사 지냄)를 ‘노회(獪)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응해 우리가 새로운 공세에 나서는 것은 미국 국민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국무부와 국방부에서도 나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실질적인 병력증원이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유는 “미국 국민들이 결코 그것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동맹국들이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미국 경제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등이었다.

나는 고위 정책결정자들이 이런 이유들을 거론하는 것을 듣고 낙담했고, 동시에 황홀한 감정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백악관과 국무부의 모든 관리 또는 국가적 책무를 수행하는 국방장관, 차관, 국장이 갑자기 내게는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미국 국민들이 지지하리라는 것”이라는 주제에 대한 전문가가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자문(自問)해 봤다. 도대체 미국 지도부는 국민들에게 국가안보의 긴급성을 설득력 있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그들이 병력증원에 찬성토록 할 수는 없다는 말인가? 병력보강을 하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대안을 분명하게 제시했는가?

미국 지도부는 극동에서 실패한다면 닥칠 위험을 예측이나 해 봤는가? 그들은 과거에 전쟁이 정체상태가 됨으로써 초래됐던 피비린내 나는 인명(人命)의 희생을 생각이나 해 봤는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체계적인 갤럽 여론조사를 믿을 수 있는가?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갤럽은 트루먼이 아니라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Thomas Dewey, 1902~1971, 미국 여론조사의 허점을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1943~1954 기간 뉴욕 주지사 지냄)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다고 예측하지 않았는가.

여론조사란 이렇게 국민의 맥박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인데, 군인들이나 선거로 벼락감투를 쓴 정치인들이 이런 중요한 결정의 근거로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리고 “미국 경제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하다니!” 나는 도무지 그 산출근거를 이해하기 힘들다. 내가 경제학을 이해하는 수준은 그저 대학교육을 받은 평범한 학생 수준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수개월 전인 1950년 초,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의회에서 보고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미국 경제가 국방예산으로 매년 130억 달러 이상을 부담하기 힘들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그의 발언 후 1년 만에 우리경제는 600억 달러의 군사예산을 부담했다. 그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가. 1950년에는 130억 달러도 부담하기 어렵다던 미국 경제가 어떻게 1951년에는 600억 달러를 부담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튼 이렇게 엄청난 지출을 하고도 미국 경제는 붕괴에 직면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이런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화두로 재정전문가이자, 대통령 경제고문을 지낸 버나드 바루크(Bernard Baruch, 1870~1965)와 대담한 적이 있다. 그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제고문을 지냈으며, 1946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유엔핵에너지위원회 대표로 임명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많은 보통 사람들의 다정한 친구였다.

나는 그를 만나 6·25전쟁의 비용문제를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우리나라의 경제 형편이 한반도에서 우리가 승리하기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 경제가 파탄에 이르지 않고 한국에 쏟아 부을 수 있는 군사비용 규모는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국가가 부담할 수 있다거나 없다는 이 모든 논의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고, 부담해야만 합니다. 재정 규모를 올바로 운용한다면, 우리 경제는 그에 필요한 비용을 얼마든 충당할 수 있습니다.”

바루크는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이유를 열거했다. 예를 들자면, 미국보다 산업잠재력이 턱도 없이 부족한 소련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수천 대의 탱크, 포, 항공기들을 매년 쏟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도 포함됐다.

바루크는 당시 소련의 철강 생산력이 연간 3500만 톤이었던 데 비해 우리 미국은 1억 톤 이상이나 됐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총체적인 공업생산능력이 소련의 공업생산능력을 크게 앞지르고 있으므로, 미국은 시민들의 경제적인 희생을 염려하지 않고도 충분히 군사적인 생산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정전문가, 정치인, 금융인으로서의 자질에다가 저명한 철학자로서도 손색이 없는 버나드 바루크의 충고는 트루먼 정부에서 무시되기 일쑤였다. 바루크와 같은 군사재정분야 전문가들이 최선을 다한 판단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워싱턴 당국이 하달한 명령들은 결국 극동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양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해 나는 극동군 총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1895~1993) 장군과 인터뷰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워커 미 8군사령관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한국에 부임했으며, 1951년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자 4성 장군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극동군총사령관이 됐다. 인터뷰는 그가 극동군총사령관이 되고 난 다음에 이뤄졌다.

나는 휴전회담에 관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물었다.

“장군님, 휴전회담이 어떻게 진행돼 갑니까? 제가 이해하기로는 우리가 북한 내 비행장 문제에 대해 양보하라는 압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맞는 얘기입니까?”

리지웨이는 우려 섞인 어조로 답변했다.

“나는 우리가 그러한 양보를 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잘 알 것입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제트기가 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들을 복구하고 개발한다면, 나로서는 일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그 말입니다!”

그는 현대 군용기의 운항속도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일본이 북한에서 출격한 항공기들로부터 폭격을 받거나 기총소사를 받는 등 끔찍한 위험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상세히 설명해 줬다.

그러나 당초 북한 내 비행장 복구와 건설에 반대했던 유엔군 측은 공산군 측에 결국 실제로 양보했다. 이로써 오늘날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북한 내 10여 개의 비행장에서 군용기를 가동시킬 수 있게 됐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11


      ⑹ 아이젠하워와의 만남

  군 출신 기대 저버리고 중국과 휴전 택해


(上)포병지원사격을 관측하고 있는 미 해병1사단 참모들 / (中)6·25전쟁 중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 / (下)6·25전선을 찾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


본능적으로 미국 국민들은 가장 치명적인 파괴무기, 즉 핵무기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핵무기를 혐오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이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한반도에서 이런 끔찍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 인간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지를 목격했다.

내가 그 장면을 경험한 것은 1952년 8월 미 해병대가 중공군과 벙커힐 전투(Korea's Battle of Bunker Hill)를 치르는 과정에서 사상자들이 너무 많아 해병 증원 병력을 항공으로 투입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 체험담을 얘기하기 전에 언급해 둘 것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6·25전쟁이 교착상태일 때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잊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유는 중공군이 아주 잘 준비된 진지들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전이 서명되기 바로 1개월 전인 1953년 6월에만 유엔군 측은 1만8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같은 사상자 수는 중공군이 최초로 개입함으로써 우리가 북한지역으로부터 철수했을 때의 사상자 수보다 많은 수치다.

이야기를 다시 목격담으로 돌려보자. 나를 태운 지프가 벙커힐 고지의 관측소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커브를 도는데, 해병대 대령이 포탄으로 파괴된 길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양팔로 극악무도한 공산군의 지뢰를 밟은 병사를 껴안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부상병의 두 다리는 무릎 아래가 날아갔다. 뾰쪽뾰쪽한 금속들이 그의 얼굴·머리·팔·몸통을 뚫고 들어갔다.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었고, 그의 몸에 도대체 성한 부분이 어디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부상병이 죽고 그의 몸에 판초가 씌워지자, 대령은 나를 보며 눈물을 보이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절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은 마침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이군요. 제게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미국인들은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싸우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저기 산등성이가 보이지요? 그 뒤에 중공군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포상(砲床)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적의 포탄들 때문에 우리는 이곳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을 몇 개의 전술 핵무기로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압니다. 전술 핵무기 사용에 대한 교육을 받기 위해 특수학교에 다녔거든요. 사용하지 않을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도대체 왜 돈을 허비합니까? 흔히 우리는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인간적이 되라는 것입니까? 우리 해병대 제1사단은 벙커힐 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지난밤에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물론 오늘 밤에도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또다시 나올 것입니다. 만일 전쟁이 인간에게 죽음을 요구할 정도로 중요하다면, 마땅히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싸울 기회를 충분히 줘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것은 최선의 무기들을 갖고 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3자로부터 압력을 받은 일부 정치인들이 장병들의 생명을 구해 줄 수 있는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함으로써 수많은 장병이 불필요하게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우리 지휘관들이 어떤 느낌을 가질 것으로 생각합니까? 이곳에서 빌(지뢰를 밟아 사망한 해병 이름)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본 당신은 내게 어떤 무기가 다른 무기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빌어먹을 지뢰는 핵폭탄만큼이나 치명적으로 당신을 살해합니다. 단지 죽는 데 걸리는 시간만이 일반적으로 오래 걸릴 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해병대령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공군에 대한 대응공격이 곧 이뤄질 것이라는 단편적인 소문들이 나돌았다.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도 줄곧 얘기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군인입니다. 그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이젠하워와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것은 그가 1952년 대통령에 출마하기 바로 전, 초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으로 재직하던 때다. 당시 나는 그와 국제문제에 대해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소문대로였다. 어린애같이 천진난만한 그의 웃음 뒤에서 나는 철과 같이 단단한 모습을 보았으며, 그는 인터뷰 내내 긴장감과 때로는 엄격함, 그리고 학자와 같은 인상을 풍겼다. 혹자는 그에게서 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본 그는 기말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이 책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내게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 뜨내기 노동자 생활을 하며 독자적인 철학세계를 구현한 인물)가 집필한 ‘The True Believer’(국내에 ‘대중운동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음)를 선물했다. 그는 단순히 그 책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의 여백에 직접 주석을 달아놓고 친필 서명까지 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특히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에릭 호퍼의 책 중에 나오는 “모든 형태의 봉헌, 헌신, 충성, 자기굴복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헛되고 퇴락한 삶에 가치와 의미를 주는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구절에 달아놓은 아이젠하워의 주석이다. 그는 호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파란색 잉크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국가에 헌신한다는 것은 집단의 과업들이 너무 중요해 우리 개개인이 그 과업들을 헌신적으로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나는 밴 플리트 장군과 같이 아이젠하워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이젠하워가 중공군에 대한 반격을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들 얘기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 당선자로 방한하는 아이젠하워를 직접 만나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젠하워의 오랜 친구이자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위해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했던 인사를 만났다. 그는 내게 아이젠하워가 민간인 대통령이 아니라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므로 군사조치 명령을 내리는 것이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힘들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귀띔해 줬다.

“내가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우려하는 단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군사적 마인드’를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해 반대방향으로 너무 기울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즉, 군국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무 오래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민간인 출신이라면 두려움 없이 적시에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역주: 결국 히긴스와 밴 플리트 장군의 기대는 어긋났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친구 말대로 중공군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지시하지 않고 휴전을 택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14


      <끝> ⑺ 아쉬웠던 휴전협상

  협상으로 인한 휴전…아직도 불안정한 평화


(左)6·25전쟁 전선에서의 클라크(맨 오른쪽) 장군. / (右)1950년 9월 29일 서울수복 기념행사에서의 이승만(왼쪽) 대통령과 맥아더.
클라크 장군.


역사적으로 우연히 그렇게 되었든, 아니면 계획적이든 간에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카드놀이에서 그들의 손들을 겁나게 잘 놀렸다. 우리가 가진 군사카드들은 기동력, 질적으로 나은 공군력, 핵무기를 포함해 질적으로 우수한 무기 등이었다. 적이 가진 강력한 에이스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맹국들은 여론에 촉각을 세우고 정치적인 고려도 해야 하는 심리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적의 에이스가 힘을 발휘하는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대부분의 전쟁기간 동안 우리의 최상의 카드들은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첫째, 기동력은 증원 병력 부족과 적의 일소(一掃)를 금지함으로써 무용지물이 됐다.

둘째, 전략폭격은 압록강 너머의 적의 주요 기지들에 대한 타격이 허용되지 않은 이래로 전혀 시도해보지 못했다. 전술비행은 목표물들에 대한 제한으로 방해를 받았다. 한반도 내의 목표물 제한이 해제된 것은 중공군이 한반도 상공에 상당한 수의 제트기를 끌어들이고, 이러한 목표물들에 대한 보호를 할 수 있게 된 이후였다.

셋째, 중공군이 핵무기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판문점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강요받지 않고 정전협상을 했으며, 정전이 서명된 후 몇 시간 이내에 그 조항들을 조롱하듯 무시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기술을 뻔히 꿰뚫고 있는 전문가는 단연 마크 클라크 (Mark Clark, 1896~1994, 미 육군 역사상 최연소 중장 기록, 아들이 육군대위로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 장군이다. 마침 그는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1952년 5월 극동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클라크 장군은 극동에 부임하기 전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 주둔군사령관(대장)으로 오스트리아 처리문제에 대해서 소련인들과 길고 지루한 협상을 해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클라크는 이러한 경험을 6·25전쟁 정전협상에서 잘 활용할 수 있었지만, 그의 상관들은 클라크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았다.

클라크 장군은 내게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방식을 아주 단순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거의 똑같은 기본 패턴을 따랐습니다. 미국과 공산주의자들이 엔젤 케이크(달걀흰자로 만드는 고리 모양의 케이크) 하나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고 가정합시다. 문제의 케이크는 양측이 갑론을박하는 원형 테이블의 정확히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 날이 가고, 여러 주일이 흘러갑니다. 어느 날 협상 테이블에 나온 미국인들은 밤새 케이크의 반쪽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을 알고 기겁을 합니다. 사라진 이유는 분명합니다. 소련인들이 케이크를 싹뚝 잘라서 공산주의자들의 방으로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미국의 항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됩니다. 세계는 소련인들이 그들의 상품을 얻기 위해서 또다시 힘에 호소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놀란 우리 동맹국들은 워싱턴 당국에 도발적 혹은 성급한 보복을 하지 말아 달라고 주의를 줍니다. 대화는 계속되며, 시간은 그 문제를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만듭니다. 세계 여론은 러시아가 케이크의 절반을 가져갔다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결국 반쪽의 케이크는 러시아 측의 것으로 기정사실화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평소에는 무뚝뚝하던 소련 대표단이 만면에 함빡 웃음을 띠고 회의장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아 있는 미국 대표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자 보세요. 우리 이성을 차립시다. 당신들이 타협을 원하면 우리는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돼 있소.’ 미국 대표단은 적어도 소련인들이 케이크의 반쪽을 불법적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이오?’라고 반문합니다. 소련 대표단의 답변이 걸작입니다. ‘그럼요, 사실입니다. 국제적 긴장을 완화시키고, 세계 평화를 위한 우리의 소망의 표시로 우리는 당신들과 타협하려는 것이오.’ 그 다음에 소련 대표단은 아직 회의장에 남아 있는 반쪽의 엔젤 케이크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없어진 반쪽 부분을 포기하면, 여기 남아 있는 케이크의 반에 대한 당신들의 권리를 인정해 줄 수 있소.’ 결론적으로 이것이 소련인들이 케이크의 4분의 3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이 차지하려고 술수를 부리는 방법입니다.”

어쨌든 동유럽·중국·티베트·외몽고·북한에 이어 가장 최근에는 북부 인도차이나의 그 비옥한 논과 광물들이 ‘케이크 조각’이 돼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공산화 과정에서 내가 체험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법은 전투 지휘관 등의 현지 의견이 워싱턴에서 표명된 견해보다 정확했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르면서 밝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여당은 대중의 표를 의식해 강렬한 어조로 평화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나름대로 이해할 만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1개월 전 트루먼 대통령은 중요한 성명에서 대중들에게 “평화를 얻을 기회가 지금보다 더 좋을 때는 없었다”고 천명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때때로 미래에 대해 그러한 장밋빛 관점에 빠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기술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즉, 평화와 장밋빛 미래에 대한 정치적인 수사가 우리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국가적인 풍조에 기여한다면 그 진정성이 의심된다. 나는 미국 국민들이 평화의 꽃들을 잡아 뜯기를 바라는 위험한 쐐기풀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협상은 공산주의자들에겐 시간 끌기용

오늘까지 7회의 연재에서 마거리트 히긴스는 맥아더·밴 플리트·리지웨이·클라크 장군 등 최고위 지휘관을 비롯, 미군 및 영국군 현장지휘관의 입을 통해 6·25전쟁에서 야만적인 무력도발을 감행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등 정치인들과 백악관 및 국무부 등 워싱턴 당국이 국내외의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전쟁을 정전협정으로 매듭지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히긴스는 미국 국민들의 경각심을 촉구했다.

이런 점에서 히긴스는 트루먼과 아이젠하워보다도 이승만과 같은 정치지도자를 오히려 더 높이 평가했는지 모른다. 히긴스의 또 다른 저술 ‘War in Korea(1951, 한국어판 ‘자유를 위한 희생’)’에 실린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하며 연재를 마친다.

“이번에 우리가 학습했듯이 미국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은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준비가 너무 늦어져 그들의 다음 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 국방일보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2010.06.15
출처 :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부산지부
글쓴이 : 천마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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