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方 의 등불 일찍이 亞細亞의 黃金 時期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빛이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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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詩는 우리가 植民國으로서 苦痛스러운 時間을 보낼 때인 1929年, 日本의 招請을 받은 印度의
詩聖 타고르가, 東亞日報東京 支局長이 韓國 訪問을 要請하자 卽席에서 써준 詩이다.
어렵던 日帝强占期 韓國民에 對한 憐憫으로 써 준 이詩는 東亞日報에 揭載 되어 當時 우리의 限과 苦痛을 달래주었다. 이 詩를 볼 때 마다 筆者는 浦鐵을 생각하곤 한다. 日帝强占期의 恥褥의 對日請求資金으로 建設한 浦鐵,
日本技術支援으로 建設한 浦鐵, 타고르가 써준 東方의 등불이라는 詩, 韓半島 東쪽 끝 浦鐵........ 日本技術로 建設한 浦鐵이 日本의 技術을 뛰어넘는 高速成長을 하자 日本 鐵鋼界에서는 警戒論이 일기 始作했다.
日本鐵鋼界는 더 以上 韓國에 技術을 移傳해서는 困難하다고 하자 朴泰俊은. 이젠 안 도와줘도 좋다.하고
自身感과 傲氣로 世界 最高의 浦鐵을 만들었다. 浦鐵의 高速成長에 不安해진 日本 鐵鋼界에서 警戒과 聲討가 이어지자
技術移傳에 앞장섰던 新日本製鐵의 이나야먀會長의 立場이 困難해 지기도 했다. 新日本製鐵 이나야마會長은 “우리가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浦鐵이 너무 잘 한 때문”이라고 抗辨했다고 한다. 名實共히 浦鐵은 世界 最高의 鐵鋼會社로 生産量 賣出世界 Top Class 이다.
自動車, 造船, 機械, 建設 等 우리의 主力産業의 躍進에 浦鐵의 功獻度는 莫大하다. 鄭周永會長 조차도 浦鐵이 싼값에
鐵鋼을 供給하지 못했다면 우리나라 産業은 成功할 수 없었다고 述懷하였다. 浦鐵은 파이넥스 工法을 世界 最初로
開發 變할 수 없다던 鐵鋼産業의 鎔鑛爐 公法을 代替하는 最高의 技術로 100年鐵鋼 産業의 歷史를 다시 쓰게했다.
또한 鐵鋼産業의 꽃이라 불리우는 自動車 鋼板의 技術力도 世界 最高水準이다. 當時 浦鐵 建設에 野黨은 목숨을 걸고 反對를 했다. 또한 著名한 英國의 經濟學者도 反對에 加勢하고 있었다.
훗날 浦鐵을 盤石에 올린 後 朴泰俊은 그 經濟學者를 다시 만날 機會가 되어 아직도 浦鐵을 反對하느냐고 反問하니
그 英國의 經濟學者는 自身의 失手는 "朴泰俊"이라는 사람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對答했다고 한다.
中國의 登小平이 日本에 浦鐵과 같은 製鐵所를 지어 달라고 하자 日本當局은 中國에는 朴泰俊이 없지 않는가?
라고 反問하며 難色을 表했다는 逸話는 너무나 有明하다. 朴泰俊의 人物됨을 익히 아는 朴正熙는 朴泰俊에게 浦鐵과 關聯된 全權을 委任했다.
朴泰俊을 불러 朴正熙는 浦鐵建設을 成功시킬 수 있는 사람은 任者 밖에 없네. 이 일을 맡길 테니 한번 一生을
걸어 보게". 朴泰俊은 綜合製鐵所 建設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제가 一生을 바친다고 어디 될 일입니까? ' "힘들고 어려운 것은 잘 알겠네만 任者나 내가 함께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이렇게하여 浦鐵 建立을 爲하여 渾身의 熱情을 쏟을 朴泰俊에게 朴正熙는 白紙馬牌를 쥐어 준다.
浦鐵建設에 關한한 그 어떤 外部的인 입김이나 權力의 干涉에 介意않고 自由롭게 朴泰俊이 일할수있게 못을 밖았다. 産業의 쌀로 일컬어 지는 製鐵産業의 競爭力은 그 나라 産業의 競爭力이다. 타고르가 노래했던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빛이 될지니” 그 東方의 밝은 빛이 浦鐵 鎔鑛爐의 타오르는 불덩이가 아닌가 싶다 !
朴泰俊이 朴正熙 靈前에 올리는 글
閣 下 !____
浦鐵은 '貧困打破와 經濟復興'을 爲해서는 一貫製鐵所建設이 必隨的이라는 閣下의 意志에 依해 誕生 되었습니다.
그 浦鐵이 바로 어제, 浦項, 光陽의 兩大 製鐵所에 租鋼生産 2,100만톤 體制의 完工을 끝으로 4半世기에 걸친
大長征을 마무리 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任者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어려움을 當해도
國家와 民族을 爲해 自己 한몸 犧牲활 수 있는 者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
1967年9月 어느 날, 英國出張 途中 閣下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重責을 맡기시며 그 카랑카랑한 音聲이 只今도
귓전에 生生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年이란 긴 歲月을 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感懷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荊棘과도 같은 길이 었습니다.
資本도 技術도 經驗도 없는 不毛地에서 鎔鑛爐求景조차 해본일이 없는 39名의 創業要員을 이끌고 浦項의 모래沙場을
밟았을 때는 閣下가 怨望스럽기도 했습니다. 資本과 技術을 獨占한 先進鐵鋼國의 冷對 속에서 國力의 限界를 切感하고
한숨짓기도 하였고 터무니없는 謀略과 嫉視와 受侮를 當할때는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鐵鋼은 國力'이라는 閣下의 불같은 執念, 열세차례나 建設現場을 찾아주신 至極한
關心과 激勵였다는 것을 敢히 말씀드립니다.
浦鐵 4期完工을 1年餘 앞두고 閣下께서 卒地에 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톤 鐵鋼生産國'의 꿈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絶望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鐵鋼立國'의 遺志를 받들어 初志一貫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結果浦鐵은 世界 3位의 巨大鐵鋼企業으로 成長하였으며, 世界 6大鐵鋼大國으로 浮上하게 되였습니다. 閣下를 모시고 첫삽을 뜬 이래 지난 4反世紀 동안 延人員 4千萬名이 땀흘려 이룩한 浦鐵은 이제 世界鐵鋼業界와
言論으로부터 '最高의 競爭力'을 지닌 鐵鋼企業으로 評價받 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必生의 所任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瞬間, 閣下에 對한 追慕의 情이 懇切하고 눈시울이 뜨거워 옵니다.
"任者 뒤에는 내가 있어. 所信껏 밀어 붙여봐"하시며 盲人과 다름없는 저를 祖國近代化의 祭壇으로 불러주신 閣下의
絶對的인 信賴와 激勵를 생각하면 白骨難忘 머리숙여 感謝드릴 따 름입니다. 閣 下 ! 念願하시던 '鐵鋼 2,000만톤 生産大國 達成報告'드리는 이 자리에, 사랑하시던 근영·志晩君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子女分들도 이 자리를 通해 오직 祖國近代化만을 생각하시던 閣下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 기며, 閣下의 遺志를 받들어
더욱 誠實하게 살아갈 것이라 믿습니다. 저 또한 이들의 보살핌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約束드립니다. 閣 下 ! 일찍이 閣下께서 吩付하셨고, 또 다짐드린 대로 저는 이제 大任을 成功的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眞情한 經濟의 先進化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山積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閣下께서 불어 넣어주신 國民精神의 結集이 切實히 要請되는 어려운 時期입니다.
魂靈이라도 계신다면,
不肖朴泰俊이 결코 懶怠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年前의 그 마음으 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建設을 爲해
邁進할수 있도록 굳게 붙둘어 주시옵소서!
不敏한 탓으로 閣下계신곳을 자주 찾아 뵙지못한 허물을 容恕하여 주시기 엎드려 비오며 삼가 冥福을 빕니다.
부디 永眠하소서 !
1992년10월3일 不肖 朴泰俊 올림.
<1992년 10月 3日 故 朴正熙 大統領 墓所參拜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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