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시절

[스크랩] 浦項製鐵朴泰俊과 故朴正熙大統領

마블마운틴 2009. 11. 10. 08:56

 

 浦項製鐵朴泰俊 朴正熙大統領

 <박대통령 서거 30주기에 즈음하여>

 
                                                                             
  • 朴正熙前大統領
  • 出生/死亡1917年 11月 14日 / 1979년 10월 26日
  • 出生地 慶北 龜尾
  • 關聯人物 아내 陸英修, 딸 朴槿惠, 朴서영, 아들 朴志晩
  • 學歷 陸軍士官學校
  • 其他1979年 中央情報部長 金載圭에 被擊
  • 受賞 陸士總同窓會 자랑스런 陸士人
  • 經歷 第5~9代 大統領(1963~1978)
  • 第2代 民主共和黨總栽(1963)
  •  大統領 職務代行(1962)
 
  
  • 朴泰俊 企業人 
  • 出生1927年 09月 29日
  • 活動分野 포스코 名譽會長,
  • 포스코 청암財團 理事長,
  • (前)第32代國務總理
  • 學歷 陸軍士官學校 第6期卒業
  • 所屬 (주)포스코
  • 經歷POSCO청암財團理事長(2008)
  •  中國 發展硏究基金會國際顧問(2003)
  •  POSCO 名譽會長(2001)
浦項製鐵 朴泰俊會長 朴正熙大統領

東方 의 등불
일찍이 亞細亞의 黃金 時期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빛이 될지니.
..........................................

 

위 詩는 우리가 植民國으로서 苦痛스러운 時間을 보낼 때인 1929年, 日本의 招請을 받은 印度의
 
詩聖 타고르가, 東亞日報東京 支局長이 韓國 訪問을 要請하자 卽席에서 써준 詩이다.

어렵던 日帝强占期 韓國民에 對한 憐憫으로 써 준 이詩는 東亞日報에 揭載 되어 當時 우리의 限과 苦痛을 달래주었다.
 
이 詩를 볼 때 마다 筆者는 浦鐵을 생각하곤 한다. 日帝强占期의 恥褥의 對日請求資金으로 建設한 浦鐵,

日本技術支援으로 建設한 浦鐵, 타고르가 써준 東方의 등불이라는 詩, 韓半島 東쪽 끝 浦鐵........
 
日本技術로 建設한 浦鐵이 日本의 技術을  뛰어넘는 高速成長을 하자 日本 鐵鋼界에서는 警戒論이 일기 始作했다.

日本鐵鋼界는 더 以上 韓國에 技術을 移傳해서는 困難하다고 하자 朴泰俊은. 이젠 안 도와줘도 좋다.하고

自身感과 傲氣로 世界 最高의 浦鐵을 만들었다. 浦鐵의 高速成長에 不安해진 日本 鐵鋼界에서 警戒과 聲討 이어지자
 
技術移傳에 앞장섰던 新日本製鐵의 이나야먀會長의 立場이 困難해 지기도 했다. 新日本製鐵 이나야마會長은 “우리가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浦鐵이 너무 잘 한 때문”이라고 抗辨했다고 한다.
 
名實共히 浦鐵은 世界 最高의 鐵鋼會社로  生産量 賣出世界 Top Class 이다.

自動車, 造船, 機械, 建設 等 우리의 主力産業의 躍進에 浦鐵의 功獻度는 莫大하다. 鄭周永會長 조차도 浦鐵이 싼값에
 
鐵鋼을 供給하지 못했다면 우리나라 産業은 成功할 수 없었다고 述懷하였다. 浦鐵은 파이넥스 工法을 世界 最初로
 
開發 變할 수 없다던 鐵鋼産業의 鎔鑛爐 公法을 代替하는 最高의 技術로 100年鐵鋼 産業의 歷史를 다시 쓰게했다.

또한  鐵鋼産業의 꽃이라 불리우는 自動車 鋼板의 技術力도 世界 最高水準이다.
 
當時 浦鐵 建設에 野黨은 목숨을 걸고 反對를 했다. 또한 著名한 英國의 經濟學者도 反對에 加勢하고 있었다.

훗날 浦鐵을 盤石에 올린 後 朴泰俊은 그 經濟學者를 다시 만날  機會가 되어 아직도 浦鐵을 反對하느냐고 反問하니
 
그 英國의 經濟學者는 自身의 失手는 "朴泰俊"이라는 사람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對答했다고 한다.

中國의 登小平이 日本에 浦鐵과 같은 製鐵所를 지어 달라고 하자 日本當局은 中國에는 朴泰俊이 없지 않는가?
 
라고 反問하며 難色을 表했다는 逸話는 너무나 有明하다.
 
朴泰俊의 人物됨을 익히 아는 朴正熙는 朴泰俊에게 浦鐵과 關聯된 全權을 委任했다.

朴泰俊을 불러 朴正熙는 浦鐵建設을  成功시킬 수 있는 사람은 任者 밖에 없네. 이 일을 맡길 테니 한번 一生을
 
걸어 보게". 朴泰俊은 綜合製鐵所 建設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제가 一生을 바친다고 어디 될 일입니까? '  "힘들고 어려운 것은 잘 알겠네만 任者나 내가 함께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이렇게하여  浦鐵 建立을 爲하여 渾身의 熱情을 쏟을 朴泰俊에게 朴正熙는 白紙馬牌를 쥐어 준다.

浦鐵建設에 關한한 그 어떤 外部的인 입김이나 權力의 干涉에 介意않고 自由롭게 朴泰俊이 일할수있게  못을 밖았다.
 
産業의 쌀로 일컬어 지는 製鐵産業의 競爭力은 그 나라 産業의 競爭力이다. 타고르가 노래했던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東方의 밝은 빛이 될지니” 그 東方의 밝은 빛이 浦鐵 鎔鑛爐의  타오르는 불덩이가 아닌가 싶다 !
 
 
朴泰俊 朴正熙 靈前 올리는
閣 下 !____ 

浦鐵은 '貧困打破와 經濟復興'을 爲해서는 一貫製鐵所建設이 必隨的이라는 閣下의 意志에 依해 誕生 되었습니다.

그 浦鐵이 바로 어제, 浦項, 光陽의 兩大 製鐵所에 租鋼生産 2,100만톤 體制의 完工을 끝으로 4半世기에 걸친
 
大長征을 마무리 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任者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어려움을 當해도
 
國家와 民族을 爲해 自己 한몸 犧牲활 수 있는 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

1967年9月 어느 날, 英國出張 途中 閣下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重責을 맡기시며 그 카랑카랑한 音聲이 只今도
 
귓전에 生生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年이란 긴 歲月을 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感懷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荊棘과도 같은 길이 었습니다.

資本도 技術도 經驗도 없는 不毛地에서 鎔鑛爐求景조차 해본일이 없는 39名의 創業要員을 이끌고 浦項의 모래沙場을
 
밟았을 때는 閣下가 怨望스럽기도 했습니다. 資本과 技術을 獨占한 先進鐵鋼國의 冷對 속에서 國力의 限界를 感하고
 
한숨짓기도 하였고 터무니없는 謀略과 嫉視와 受侮를 當할때는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鐵鋼은 國力'이라는 閣下의 불같은 執念, 열세차례나 建設現場을 찾아주신 至極한
 
關心과  激勵였다는 것을 敢히 말씀드립니다.

浦鐵 4期完工을 1年餘 앞두고 閣下께서 卒地에 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톤 鐵鋼生産國'의 꿈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絶望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鐵鋼立國'의 遺志를 받들어 初志一貫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結果浦鐵은 世界 3位의 巨大鐵鋼企業으로 成長하였으며, 世界 6大鐵鋼大國으로 浮上하게 되였습니다.
 
 閣下를 모시고 첫삽을 뜬 이래 지난 4反世紀 동안 延人員 4千萬名이 땀흘려 이룩한 浦鐵은  이제 世界鐵鋼業界와
 
言論으로부터 '最高의 競爭力'을 지닌 鐵鋼企業으로 評價받 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必生의 所任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瞬間, 閣下에 對한 追慕의 情이 懇切하고 눈시울이 뜨거워 옵니다.

 "任者 뒤에는 내가 있어. 所信껏 밀어 붙여봐"하시며 盲人과 다름없는 저를 祖國近代化의 祭壇으로 불러주신 閣下의
 
絶對的인 信賴와 激勵를 생각하면 白骨難忘 머리숙여 感謝드릴 따 름입니다.
 
 閣 下 !
 
念願하시던 '鐵鋼 2,000만톤 生産大國 達成報告'드리는 이 자리에, 사랑하시던 근영·志晩君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子女分들도 이 자리를 通해 오직 祖國近代化만을 생각하시던 閣下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 기며, 閣下의 遺志를 받들어
 
더욱 誠實하게 살아갈 것이라 믿습니다. 저 또한 이들의 보살핌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約束드립니다.
 
閣 下 !
 
일찍이 閣下께서 吩付하셨고, 또 다짐드린 대로 저는 이제 大任을 成功的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眞情한 經濟의 先進化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山積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閣下께서 불어 넣어주신 國民精神의 結集이 切實히 要請되는 어려운 時期입니다.

魂靈이라도 계신다면,  
 
不肖朴泰俊이 결코 懶怠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年前의 그 마음으 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建設을 爲해
 
邁進할수 있도록 굳게 붙둘어 주시옵소서!
 
不敏한 탓으로 閣下계신곳을 자주 찾아 뵙지못한 허물을 容恕하여 주시기 엎드려 비오며 삼가 冥福을 빕니다.
 
부디 永眠하소서 !
 
1992년10월3일  不肖 朴泰俊 올림. 
 
 
 
<1992년 10月 3日 故 朴正熙 大統領 墓所參拜文>

 


삼가 冥福을 빕니다. 부디 永眠하소서 !
                지난 10월26일 아버지 묘소 앞 고개숙인 박근혜 전 대표
               
             26일 오전 서울 국립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에서 열린 故 박정희 대통령 30주기 추도식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분향을 하고 있다.
                          
 
                                                  추도사하는 박근혜 전 대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26일 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前대통령 서거 3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다

       

       民族의 巨人 故朴正熙 大統領

    
 
대한민국에 박정희 시대가 있었던 것은
필경 하늘이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경제를 먹고사는 중이다.』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박정희 시대의 성공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오늘의 풍요와 여유를 누릴 수 없 었다.
 
그것으로 해서 이룰 수 있었던 근대국가의 면모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걸핏하면 그것을 내세우는 것으로
노벨상도 타고 온갖 재화를 자기 금고에 쌓아놓고
명문 私學(사학)에 기념관을 짓고 지방도시에 컨벤션센터를 짓고
온갖 명예와 부귀를 누리는
이른바 「민주화의 주역」으로서의 무대 생활을 한껏 누리는
前職(전직) 대통령의 「만고의 호강」도 박정희 경제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궁정동 사건으로 박정희 시대를 끝내고도
몇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북유럽을 여행했을 때
그 곳 언론인 한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외신 담당 부국장을 한다는 그는 한국에 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후진국으로 출발한 나라 중에는 군사 쿠데타를 겪은 나라가 많다.
그런 나라들은 하나같이 정치 혼란을 겪고
경제는 정체되고 마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쿠데타 주역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박정희 라는 사람의 덕이다.
그는 부정부패로 혁명의 말로를 그르치지 않은,
세계사에서 몇 안 되는 군인 출신 지도자다.
그래서 한국은 저개발국을 벗어났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지반을 쌓았다.
거의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 이런 말을 그 언론인은 했다.
 
그는 부정부패로 혁명의 末路를 그르치지 않은,
세계사에서 몇 안 되는 군인 출신 지도자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다는 「7가지 惡德(악덕)」이 있다.
 
1. 철학 없는 정치
2. 도덕 없는 경제
3. 노동 없는 富(부)
4. 인격 없는 교육
5. 인간성 없는 과학
6. 윤리 없는 쾌락
7. 헌신 없는 종교.
 
박정희라는 지도자는
적어도 이중 5가지의 악덕은 저지르지 않은 통치자였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그를 보낸 것은 救援(구원)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리운 친구여 (정치근 시) 

그리워라 친구여
너 어디에 있느냐
세월이 흘러도 잊지를 못하여
보고 보고 보고파 보고파라
네 이름을 부르면 내 눈에는
눈물이 자꾸만 자꾸만 고이네
 
아 ~ 눈물이 자꾸만 자꾸만 고이네
그리워라 친구여 너 어디에 있느냐
강산은 변해도 잊지를 못하여
보고 보고 보고파 보고파라
 
네 이름을 부르면
내 눈에는 눈물이 자꾸만 자꾸만 흐르네
아 ~ 눈물이 자꾸만 자꾸만 흐르네
1978년 10월 26일!  5000년 우리歷史의
 가난과 屈從의 歲月을 몰아낸 民族의
 巨人 故朴正熙  大統領의 國葬!!
 
그당시 뭉클했든 感懷를 회상해 보면서
 이 影像을 보냅니다.
 
 

 故 朴正熙 大統領의 冥福을 빕니다.



출처 : 浦項製鐵朴泰俊과 故朴正熙大統領
글쓴이 : 통상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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