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6. 민사참모실 # 01 : 잊지못할 월남민들의 가난한 행렬
1970년 8월 말경 월남어 교육대를 수료하니 함께 교육을 받은 전우들은 곧 부대배치를 받아 청
룡여단 소속의 전투중대로 전출들을 갔는데 나는 일등으로 수료를 하다 보니 교육대의 선임하
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예하부대로 발령이 안나고 청룡여단본부 내의 모 부서로 갈 터이
니 여단본부 내의 부서로 발령을 받을 대기자들이 머물고 있는 대기병 숙소로 가란다
어떤 전우의 말로는 내가 월남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여단본부 내의 첩보수집대(MIG) 부대로
갈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아뭏튼 대기병 숙소에서 며칠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드디어 명이 떨
어졌는데 여단본부 내의 민사참모실로 가게되었고 그 민사참모실의 선임자 수병인 경기도 이천
출신의 정수병이 나를 데리러 가고자 대기병 숙소로 나를 찾아왔으니 드디어 1970년 8월 말 그
때 로부터 1971년 10 월 초 귀국하여 곧 제대할 때까지 1년 2개월, 즉 만 14 개월 동안 근무할
G-5, 민사참모실에서의 근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꿈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 남겨진 호이안 해변에 위치한 청룡여단본부의 전경사진이다 상단 왼쪽에 3개월간 교육을
받았던 월남어교육대가 위치해 있고 중앙에 14개월간 근무했던 G-5, 민사참모실이 보인다)
당시 여단본부 내에는 여단장을 보필하는 각종 참모실들이 있었는데 G-1 인 인사참모실, G-2
인 정보참모실, G-3인 작전참모실, G-4인 군수참모실, G-5인 민사참모실 도합 5개의 주요참모
실들이 있었고 원 스타(준장)인 여단장 휘하에 소령급의 장교들이 각 참모들을 맡고 있었는 바
인사참모는 그 중요도에 의해 중령급의 장교가 맡고 있었다
여단본부 민사참모실에서 근무하면서 귀국할 때 까지 내가 모시고 일했던 참모들은 김모소령,
송모 소령등 모두 세분이었고 참모 밑에 대위 계급의 보좌관 1 인, 선임하사 1인, 행정하사 1인,
및 나를 포함한 사병 4인 정도가 민사참모실에서 함께 근무를 하였다
민사참모실의 영문표기는 Civic Affairs and Psycology War(민사업무와 심리전) 이었으니
그 업무는 영문표기와 같이 월남인들을 대상으로하는 민사업무와 심리전 업무를 함께 맡고
있었으므로 대민지원 사업차 우리 부서에서 직접으로 쌀과 의약품, 의류 등을 군용트럭에 가
득 싣고 주로 쾅남성청(청룡부대가 주둔한 지역이 당시 베트남 쾅남성 호이안에 있었으므로)
고아원, 수녀원, 사찰 등지에 나누어주었고 동시에 예하 4개 대대에서 수행하는 동일한 대민
지원 사업에 대한 보고를 매일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여 브리핑 자료를 작성하여 다음날 청룡
부대여단장이 주재하는 아침 참모회의 자료로써 민사참모님에게 드리곤 하였다
이러한 업무 외에 아주 중요한 업무가 있었으니 그것은 매달 한번씩 주월미군사령부(MACV
: Military Assistance Command in Vietnam)에서 청룡부대로 보내주는 일급비밀 문서인
HES( Hamlet Eval!uation System : 민가마을 평가체제) 라는 132 컬럼 컴퓨터 출력용지에 인쇄
된 전산자료를 받아 작업을 거쳐 보고서를 작성하여 참모님께 올리고 참모님은 이를 여단장에
게 보고를 드리는 일이었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HES 출력자료는 월남전 당시 주월한국군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 부대)와 미군이 담당하고
있는 군사작전지역 내의 평정도(Pacification ratio) 를 계산할 수 있는 각종 자료들을 정보원
들을 동원하여 수집한 후 이를 전산처리하여 그 출력결과를 한국군과 미군 각 예하부대에 한달
에 한번씩 내려주었으니 이를 받은 부대들은 신속히 그 결과를 계산하여 자료를 정리하여 각군
지휘관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를 선임수병인 정수병이 담당하다가 그가 귀국한 후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한 여러가지 일들을 수행하려니 자연적으로 대민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군용트럭에 쌀과
의류 및 의약품들을 싣고 청룡부대가 위치한 월남 중부의 호이안 시내를 비롯하여 인근의 다낭
시내까지 출동하여 성청(우리의 군청), 고아원, 수녀원 또는 불교사찰 등지에 무상 공급을 해
주곤 하였다
(월남전 당시 청룡부대가 주둔햇던 호이안에 위치한 쾅남성청)
당시 월남사람들에게 공급하였던 쌀은 청룡부대 해병대원들이 먹는 급식에서 일정량을 공제
하여 주는 방법으로 무상공급하였는 바 이것을 받는 월남 사람들은 한국군 해병대원들이 자기
들의 먹는 양에서 덜 먹고 주는 쌀인지는 알지 못하고 받았을 것이다
당시 그들에게 공급하엿던 쌀은 청룡여단본부 안에 위치한 주월한국군 십자성 부대인 11군수
(육군 파견부대)의 창고에서 받아다가 트럭에 실었는데 그 쌀 포대의 무게는 보통 40 키로엿고
때로는 80 키로 짜리도 잇었다
그러한 업무 중 대민지원 차 출동한 첫날을 잊지 못한다
그날 나로서는 처음으로 육군지원부대인 11군수에서 쌀을 수백포대 군용트럭에 싣고 호이안
시내에 위치한 쾅남성 성청에 도착했을 때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베트남 특유의 삿갓 모자를
쓰고 아오자이를 입은 수십명의 나이든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 그리고 삿갓 모자에 허름한
바지를 입은 나이많은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이 성청 구내 한편에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트럭이 성청 구내에 도착하여 우리가 성청의 공무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적재된 쌀 포대를
다 하역하는 동안 그들은 말 없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그들이 성청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시민들로 알고 무심히 내 할일만 했다
(월남전 당시 청룡부대원이 현지 대민지원차 쌀 나르는 모습)
이윽고 쌀 포대를 다 부리고 트럭 뒤의 적재함 뒷문을 닫으려고 하는 순간 그들이 와르르
내게 몰려왓다 맨 앞의 아주머니가 내게 "엠 어이!~ " (한국말로 얘야!~ 하며 부르는 말)
하며 나를 부른다
나는 나를 부른 나이드신 아주머니에게 "따이 싸오?" (왜 그래요?) 하며 트럭문을 잡은채
물었는데 그들은 어느새 그들의 삿갓모자를 다 벗어서 거꾸로 들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와르
르 달려와 삿갓을 거꾸로 든채 줄을 서 있는 이유가 무었인지 전혀 모르는 나에게 그 아주머니
께서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 데, 말씀인즉 쌀을 좀 달라는 것이다
엥 ??? !!!...
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월남어 교육대에서 열심히 공부한 탓에 당시 나는 웬만한 월남말은 구사 할 수 있어서 이젠 트럭
에 쌀이 하나도 없으니 줄 수 없고 내가 개인적으로 당신들에게 줄 수도 없다고 응답하고는 곧
돌아서서 잡고 있던 트럭 적재함의 뒷문을 닫으려 했더니 그 아주머니께서 내 어깨를 툭툭 치시며
나를 다시 좀 보잔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이거 뭔 일인가 싶어 트럭 적재함을 잡은 채 고개를 돌려 그 아주머니를
보았더니 나에게 애원하는 표정으로 간청한다
"얘야~ 트럭문 닫지마라, 쌀 포대는 없지만 트럭에 남아있는 흙이라도 주라"
응???!!!... 이건 무슨 말?
난 내 귀를 의심하며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해서 다시 되물엇는데 내가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고 처음 들은 말 그대로 트럭 위의 흙을 달라는 것이다
참 이상하다 싶었으나 미소를 띄우며 친절히 설명햇다 이젠 쌀을 다 부렸기 때문에 트럭에는
흙만 잇고 흙은 먹는게 아니라고 다소 원시적(?) 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다음 그 아주머니의 말이 충격적이엇다
"얘야 알고 있단다 그렇지만 그 흙 속에 쌀알들이 있지 않니 ... 우린 그 흙을 얻으려 해... 흙을
좀 줘... "
아앗!~~~ 이럴 수가!!!???~~ ........
이 흙을 얻으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내가 타고 온 이 트럭을 기다렸단 말인가!!!....
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그런 그들이 너무나 측은 하였고 동시에 나도 어린 시절 우리나라가
6.25 전후 참으로 어려운 시절에 배들이 고파 너나할 것 없이 먹을 것을 구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월남전 당시의 베트남...
(월남전 당시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호이안 근처 다낭의 마블마운틴 풍경)
당시의 베트남은 마을 인근 지역과 도로를 빼 놓고는 국토의 대부분이 군사작전 지역으로 묶여
있어서 민간인들이 너른 그 옥토에 농사를 지을수가 없엇다 만일에 그들이 몰래 군사작전 지역에
들어와서 농사를 짓다가 아군에 노출되면 베트콩으로 오인되어 사살될 수 있기에 옥토를 소유
하고도 농사를 못지으니 그들이 가난할 수 밖에 없엇다
그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줄 것이라고는 정말로 트럭 바닥에
남은 흙 밖에 없었다
본심은 아니엇으나 그 흙이라도 얻으려고 그렇게 성청 한 구석에 줄을 서서 한동안 기다렸던
그들의 수고와 간청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트럭에 날쌔게 올라가 빗자루를 들고 흙을 쓸어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 쉬더니 거꾸로 든 삿갓에 트럭 위에 남은, 우리의 군화발에 밟혓던 흙을
기쁘게 받기 시작했다
이왕 나누어 주는거 장시간 기다렷던 그들에게 못받아가는 사람 없도록 공평하게 나누어야
했다
한사람 ... 두 사람... 이윽고 마지막 사람...
나는 내 일생의 기억 속에 당시 너무나 안쓰러웠던 그들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제 그들에게 공산화가 됐던 민주화가 됐던 전쟁은 끝났고 그 광활한 농토를 이용할 수 있으
니 그들에게도 힘찬 미래가 열리고 있으리라
한때 어렵고 불쌍햇던 베트남 사람들...
그래도 그들은 우리 한민족과 비슷하게 친절하고 끈기있고 용감하다 나는 그들의 공산분자들과
한 때 총을 겨루고 싸웠으나 그 때는 그것이 옳았기에 싸운 것이고 세월이 흘러 이제는 베트남
이라는 나라를 그리워하고 그 민족을 사랑한다
(월남전 당시 나라의 패망으로 달아나는 베트남 난민들)
요사이 베트남 신부는 도망가지 않는다느니 하는 문구를 통하여 마치 베트남 젊은 여성을 돈
으로 사서 결혼하라는 듯한 상업성의 결혼 선전문구를 대하며 마음이 아프다
또한 간간이 뉴스에 보도가 되지만 베트남 신부들이 한국인 남편에게 폭행을 당한다던지 그들이
낳은 2세 자녀들이 피부가 검고 한국말도 잘 못하여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엄마와 자녀 사이에도
갈등이 있다는 뉴스는 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중진국 대열을 넘어서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을 하고 있는 우리 나라로써 이 같은 차별적이고도
비 인간적인 행태들은 결코 선진국으로써의 품위에 맞는 일이 아닐 것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
줌은 강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닌가
소득만 늘어난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한 때 후진국이었으니 우리보다
뒤떨어진 후진국의 아픔을 덜어주고 도와야하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태어나는 길이
아닌가
베트남과 그 민족에게 우리 대한민국과 같이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활기찬 오늘의 베트남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