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전 상서 / 이화자
추미림 작사 김명파 작곡
이 노래는 당대의 일류 작사가인 조명암님이 가슴 저리도록 아픈 사연을 노랫말에 담아
부평 어느 객주집의 노래 잘 한다는 소문이 난 이화자님을 가수로 발굴하여
김영파(본명;김용환)님이 곡을 붙혀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이다.
파란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냇을 이화자님이 부모님께 향한 마음을 절절히 담은 애절한 곡이다.
이화자 (李花子)
1918년경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순재(李順載)이며 출생이나 성장에 관한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기생이 되어 당시 인천권번 소속으로 인천 부평에 있는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1935년 가요계의 대부격인 작곡가 김용환(김정구의 형)이 인천 부평에 노래 잘 부른다는
열아홉살의 작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갔다.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에 감탄을 한 김용환은 그녀를 서울로 상경시켜 뉴코리아 레코드사와
전속가수로 계약 하고 조명암 작사, 김용환 작곡인 "초립동"을 첫 작품으로
가요계에 데뷔시켰다.
그 뒤로 그녀는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를 하였고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화류춘몽"은 기생의 신세를 노래한 것인데 발표가 되자마자 거리는 온통 이화자의 광고
포스터와 화류춘몽 노래소리 뿐이었다.
애처롭고 간드러지게 흐느껴 울부짖는 듯 한 그녀의 노래 소리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화류춘몽”의 노래로 장안에는 자살소동이 빈번히 일어나기도 했는데
종로에 있는 바에서 종사하는 종업원이 가사가 자기가 살아온 지난 세월과 너무도 흡싸한
처지와 같음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하게 되었다는 신문의 보도였다.
마포에 있는 술집의 화류계 여성도 양잿물을 먹고 자살소동이 일어났다고 하며
장안의 화류계 여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울고 비관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레코드회사에
판매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화자는 과거에 하류계에 몸담았던 지난날이 그녀를 괴롭혀 담배를 많이 피었고
술은 점점 더 마시게 되어 끝내는 아편까지 손을 대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광복 후 이화자는 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비참하게 35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녀가 남긴 노래로는 “어머님 전상서” “화륜선아 잘 가거라“
”꼴망태 목동“ ”초립동“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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