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명찰 Viet nam veterans

나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핏물"을 마셨노라

마블마운틴 2011. 8. 24. 12:37

 

문갑식 선임기자

장병(將兵)들의 소원은 한 가지였다. 그것만 먹을 수 있다면 징그러운 밀림도, 적(敵)의 야습이 주는 공포도, 이역(異域)에서의 외로움도 금세 떨쳐낼 것 같았다. 바로 김치였다. 45년 전 월남 땅에서 일어난, 지금은 잊혀진 사연이다.

그곳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이 이 소식에 가슴을 쳤다. 정부가 부랴부랴 '대한식품'을 만들었다. 마침내 김치통조림이 생산됐다. 양국진 사장이 그걸 들고 월남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뚜껑이 열리자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배추와 무는 흔적도 없고 '핏물'만 흥건했다. 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제대로 된 통조림을 만들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대충 흉내낸 깡통이 녹물을 토해내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엉터리김치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병사들이 투덜댔다. 그들 앞에 장군이 나섰다. "이 김치는 조국이 우릴 위해 만든 겁니다. 맛있는 김치를 먹을 방법이 있긴 있어요. 일본기술을 사 오면 됩니다. 대신 여러분이 목숨 걸고 번 달러가 부모 형제 대신 일본으로 갈 겁니다…."

그 말에 병사들이 울었고, 장군도 따라 울었다. 잠시 후 장병들이 하나 둘 눈 질끈 감고 '핏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없던 기술이 하루아침에 생길 리 없었다. 마침내 대통령까지 '김치전선(戰線)'에 투입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각하! 월남에 있는 한국군에게 한국 음식을 공급할 수 있다면 사기와 전투력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겁니다. 한국인이 매일 빼놓을 수 없는 김치를 꼭…."(1967년 3월 8일)

미국 정부 수뇌부가 모였다. "김치가 대체 무슨 음식이냐"는 희한한 토론이 워싱턴에서 열렸다. 며칠 뒤 대통령 편지를 들고 간 정일권 국무총리를 통해 반가운 소식이 왔다. "미국이 우리 주장에 적극 동의해 김치 문제가 해결될 듯합니다!"

1960년대 한국은 텅스텐 같은 몇 가지 광물을 제외하면 팔아먹을 게 없었다. 그 외화 갈증을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서독에 간 광부(鑛夫)·간호사 2만명과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월남파병 군인 32만명이 보내온 달러로 풀었다. 광부들은 청춘을 막장에 묻고 석탄을 캤다. 간호사들은 시체를 만지고 변비 걸린 환자의 항문을 손으로 파냈다. 군인들은 베트콩과 맨주먹으로 싸웠다. 그들은 초라했지만 세계는 거기서 '근면한 코리안'의 상(像)을 보았다.

그에 힘입어 정주영(鄭周永)이 중동건설에 뛰어들었으며, 그 부하가 '샐러리맨 신화'로 대통령이 됐고, 이병철(李秉喆)이 삼성의 초석을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은 이런 희생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폭우 내리던 날 만난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이렇게 반세기 전(前)을 회고했다. 당시 파월장병의 일당은 1달러를 약간 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국군의 학력은 세계 최고이지만 그때 선배들은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노병(老兵)은 증언했다. 못 배웠지만 그들은 조국을 사랑했노라고. 애국심만은 지금 후배들보다 뜨거웠노라고.

그와 헤어져 빗속을 걸으며 조국을 부인하고, 국군을 능멸하며, 기업가를 매판(買辦)으로 모는 철부지들을 떠올렸다. 교사, 교수, 정치인,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종북(從北)'하지 않곤 못 배기는, 그걸 패션처럼 여기는 배부른 머저리들이다. 그들에게 월남에서 기꺼이 '핏물김치'를 들이켠 바보 같은 선배들의 얘기를 몇번이고 들려주고 싶었다.